20210906 | 혜진
가비언니에게.
평일에 술 안 마신지 정말 오래됐는데 귀가길에 작은 와인이랑 치즈를 사왔어요.
(첨부파일로 사진을 보내요.)
나를 지키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언니의 편지를 읽으며 나를 온전히 지키며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문제구나 생각했어요. 균형을 잡는 일은 늘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엔 해방촌에 집을 보러 다녀왔어요 보광동도 보았고요. 부동산 아저씨가 아소키 앞에 전셋집 매물 나올 게 있으니 기다려달라고도 말했어요. 지금 사는 곳 집주인이 자기가 매일 집을 관리할 수 없으니 제게 동물 배설물을 관리해 달라고 집에 20m 호스를 보내겠다고 하더라고요 물청소를 해달라고 하네요. 매일같이 현관 앞에 똥을싸고 가는 고양이와 제가 치우지 않으면 아무도 치우지 않아 쌓여가는 오물과 담배꽁초를 그대로 방치하는 건물 사람들, 동네 사람들이 몰래 버리는 각양각색의 쓰레기들. 구청에 민원을 넣고 집주인에게 부탁을 드려도 달라지는게 없어 지긋지긋해서 집을 보러 다녔는데, 같이 갈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부탁을 드렸어요.
엄마를 끌고 해방촌 골목골목의 언덕배기를 오르는데 사진과 다른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공간들을 보며 허탕 칠 것을 직감했고 멀리까지 와준 엄마에게 미안할 정도로 면목이 없었습니다. 봐두었던 몇몇 곳을 돌며 엄마와 사소한 대화들을 나누었고 대화의 순간 순간 우리의 가치관은 조금씩 상충하고 엄마는 먼 곳에서부터 저를 위해 한걸음에 와줬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부딪히는 의견 때문에 마냥 고마워하지만은 못했어요.
결국 우리는 쇠퇴하고 죽을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순간도 후회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데요 너무 사랑해서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욕심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으려는 욕심 없이 사니까 내가 사랑하는 당신만이라도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는 욕심.
오늘도 퇴근한 뒤 몇 곳을 더 둘러보고 왔고 아무래도 이사는 당분간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될거라 믿어요.
비가 많이 내리네요.
이사 준비 수월하게 진행되길 바라겠습니다.
p.s 아 그리고, 편지는 너무 읽기 좋고 편안했어요. '글쓰기'라는 강박 안 가져도 될 것 같아요
혜진
이 글은 [EP01] 메일에 대한 답장입니다.
https://brunch.co.kr/@96fd332c1ea84bf/2
* '세개의 손' 프로젝트 | 30대 / 서울 거주 /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세 명의 여자가 2021년 가을부터 현재까지 메일을 주고 받고 있다. 세 명의 편지에서 나아가 목소리를 더하고 싶은 동시대 독자들의 시선을 모아 물성을 가진 형태로 엮는 것을 기획하고 있다. @3hands_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