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림이 심한 모녀가 미국에 살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 커서야 나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겪을 때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릴 때는 힘들어도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른 채 남들도 다 비슷할 줄 알았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순간 중 하나가 있다. 아빠가 유치원생인 나에게 일종의 훈련으로 마트에 가서 껌 하나만 사 오라고 시켰는데, 가게 앞을 서성이던 나는 끝내 빈손으로 돌아와 아빠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았던 기억이다.
그래도 성인이 된 후에는 자리에 따라서 적절하게 그 자리 행세를 해낼 만한 여러 가면이 생기게 되었고, 내 안에 숨은 다른 모습들을 꺼내거나 혹은 내 안에 없다면 연기라도 하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 한동안 그게 또 다른 내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내가 내성적이라고 하면 손을 내저으며 ‘너 아닌데?’라고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나는 유쾌한 사람이긴 하다. 그 둘은 별개니까. 내 동생은 내 투박한 유머의 빅팬이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긴 휴직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한해 한해 지나면서 내가 가진 가면들도 한겹 한겹 내려놓으며 결국은 원래의 나로 거의 되돌아오고 말았다.
다시 내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상황에 나를 맞춰가는 내 색깔이 없는 나로... 그럴 때쯤 난 학부모가 되어 있었다.
매해 초 학교생활이 힘들고, 짝에게도 먼저 말을 못 걸고, 발표 시간에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질문은커녕 대답도 조리 있게 못 하고, 친한 친구 없이는 학원도 다니기 싫어하던 내가...
이제 한 명 추가되었다.ㅠㅠ (다행히 둘째 아이는 내 유전자를 피해 갔다.ㅋㅋ)
우리 딸을 보면 잊었던 내 모습들이 다시 떠오른다.
“이 바보같...”
그 옛날, 결국 껌을 못 산 채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아빠가 내뱉다 삼켰던 말을,
나도 내 딸을 보며 속으로 수십 번도 더 하게 된다.
사실은 호기심도 많고 유머러스하고 자유에 대한 갈망도 큰 나의 속모습마저도 닮은 우리 딸.
그 껍질 안팎의 온도 차이에서 오는 엄청난 내적 갈등 속에서 살게 될 우리 딸.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아이도 언젠가부터는 여러 가면들을 쓰고 벗는 법을 깨닫게 될 거라는 걸. 그렇게 살아내질 거라는 걸.
우리 모녀의 미국 적응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이런 성격이었다. 아이 걱정을 많이 했지만, 사실 나 자신에 대한 걱정도 컸다.
1년이 지난 지금. 미리 하는 걱정을 없앨 수는 없지만 막상 해내고 나면 ‘할만 했던’ 일들이 쌓여가고 있다.
조금씩 내 마음이 열리고 있다.
이 시절에 겪은 조금은 특별한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더 멀리 더 깊이 그리고 더 다양하게 생각해 보는 힘이 생기길 바란다. 그리고 이 말은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