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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짝 Sep 20. 2023

출근 길, 버스를 놓치고 거하게 넘어졌다.

쪽팔린 순간을 재치있게 넘기는 꿀팁


버스를 타러 뛰어가던 길이었다. 이 버스를 타지 않으면 틀림없이 지각을 하게 된다는 걸 인식한 순간 종종거리며 뛰던 걸음의 보폭을 더 커졌다. 눈앞에 버스가 보이고 조금만 더 달려가면 가까스로 탈 수 있겠다 싶었던 바로 그때, 스텝이 엉켰다. 애석하게도. 휘청거리며 발을 구르며 공중에 잠시 떴다가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차도에 대자로 뻗어버린 채로 고개를 겨우 드니 매정하게 멀어져 가는 버스의 엉덩이가 보였다. 손으로 바닥을 짚은 탓에 손에는 갓 생긴 생채기가 가득했다. 무릎에도 멍이 든 건지 통증이 전해진다. 힐끗거리며 쳐다보는듯한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지금 버스를 타서 제 때 도착할 묘수는 없어 보였다. 카카오택시 어플을 켰고 3만 원에 웃도는 금액을 확인하고도 울며 겨자 먹기로 호출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참 스스로가 덤벙거린다 느끼던 순간은 많았지만 이렇게 비참한 기분은 오랜만에 느껴봤다. 난 늘 왜 이럴까 하는 생각에 울컥한 마음 반, 또 쓰라린 통증에 울적한 마음 반. 피가 조금씩 맺히는 손바닥을 살살 털고 욱신거리는 무릎을 비비며 지금의 구세주를 기다렸다. 겨우 택시를 타고 늘어나는 미터기 요금을 보니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다 상처가 너무 따가워서 기사님께 휴지나 물티슈가 있는지 여쭤봤고 기사님은 물티슈를 건네며 그 용도를 궁금해하셨다. 말하는 게 조금은 민망했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 기사님은 예상보다 더 큰 액션을 취하며 '아이고 액땜했다고 생각하고 훌훌 털어내면 아무것도 아니에유~'하고 능청스러운 조언을 덧붙였다.(그렇다. 이곳은 충청도이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 기사님이 그 순간만큼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얄미워 보였다. '그렇게 털어내기엔 제 손과 무릎은 너무 처참한걸요!'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그냥 조용히 웃어 보였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순간 조금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방금의 그 철푸덕이 영화나 드라마 속 코미디의 한 장면이었겠다 싶은 거다. 묘사해 보며 이렇다. 주인공은 헐레벌떡 뛰다가 버스를 놓치고 아침부터 아스팔트와 진한 포옹을 한다.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뻗는 꽤 과한 행동을 보여주고 수군대고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웃음을 짓는다. 그런 주인공을 비추며 브금으로 나오는 얼렁뚱땅하지만 밝은 노래. 택시에서 만난 천진난만한 기사님에게 멋쩍은 미소를 보이고 심통 난 목소리가 내레이션이 나온다. 아,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뻔한 말이 이렇게 와닿는 순간이 있었나 싶었다. 그러자, '그래 코미디 장면 하나 기똥차게 찍었네'라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피식 났다. 



'당신은 영화 속 주인공입니다!' '인생을 주인공처럼 사세요!'라는 상투적인 말의 요지는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일 테다. 나 역시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날 이 뻔한 문장에 나만의 해석이 한 겹 더해졌다. 아주 직관적인 해석이 말이다. 나를 영화 속 천방지축 말괄량이 주인공으로 대입하니 마음에 묘하고도 희한한 안전장치가 생기는 것 같았다. 나를 덜 자책하고 덜 한심해할 안전장치. 주인공의 서사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 예를 들면 주인공의 수모, 라이벌의 존재, 한 움큼의 좌절, 갈등의 순간 등. 그 중 '주인공의 쪽팔린 순간'에 해당할 에피소드가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좀 전에는 쉽지 않았던 '훌훌 털어내기'가 가능했다. 다음에 또 넘어지거나 버스를 놓치면 오늘과 오버랩하며 좌절하는 장면을 연출해야겠네. 그렇게 미리 안전장치를 걸어두고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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