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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짝 Sep 13. 2022

나는 조급함과 친구가 되기로 했다

집단상담을 통해 나의 두려움과 화해하다

눈이 부실만큼 푸르르던 올해 여름의 초입. 학교에서 하는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세 번째로 참여하는 집단상담이었다. 집단 상담이 생소할 수 있으니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집단상담은 상담해주는 사람과 상담을 받는 사람이 일대일이 아니라 다대다(多對多)의 형태로 진행된다. 쉽게 말해 상담자와 내담자 여러 명이 함께 상담하는 형태를 말 그대로 '집단상담'이라고 한다. 일대일로 진행되는 개인 상담에 비해 집단 상담은 첫 발을 떼는데 조금 더 용기가 필요할 수 있다. 상담자 한 명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힘든 소리를 안 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한번 물고를 트면 봇물 터지듯 자신을 개방하기도 한다. 여러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해서 들어주고 돌아가며 나에게 격려를 보내주는 일은 생각보다 더 사람을 무장해재 시킨다.


집단 상담을 시작하면 2~3시간 혹은 더 오래 하기도 한다. 이 시간 동안에는 음악을 틀어두지도 않고 핸드폰을 볼 수도 없다. 꽤 긴 시간인데 그동안 대체 무엇을 하느냐, 대화를 한다. 오직 말 그리고 경청이 있다. 그리고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질문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것들은 대체로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평소에 잘 생각하지 않던 물음들이다. 지금까지 당신의 인생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어떨 것 같나요? 눈에 밟히는 사진을 골라보세요. 왜 그 사진을 골랐나요? 당신이 기억하는 가장 초기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생소한 그 물음표들에 올라타 각자의 내밀한 세계를 여행한 후 다시 모인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로의 세계를 기꺼이 들여다본다. 그러다 보면 때로 그 안에 숨어있는 어린아이를 만나기도 한다. 누군가는 몰랐던 자신의 아이와 마주하게 되고 누군가는 다른 이의 눈물에서 자신 혹은 주변 사람을 발견한다. 그리고 서로를 보듬는다. 위로를 건네고 격려한다. 이것이 내가 집단 상담을 세 번이나 하게 한 원동력이다.


이번 상담에서는 이런 물음표가 떨어졌다.


"이제부터 이 풍선을 원하는 만큼 불고 여러분의 가장 큰 두려움을 적어보세요."


풍선을 한참 꼼지락대면서 고민했다.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이 당연한 것 말고 내가 유독 두려워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두려움을 꺼내보고 싶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지? 그러다가 머릿속을 쓱 스친 단어가 있었다.



조급함



번아웃을 겪었던 시기에 조급함이라는 감정과 지독하게 싸웠다. 당시에 나를 가장 두렵게 했던 것은 '결국에 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것, 나의 하루와 현재에 몰입하지 못하고 늘 미래를 걱정하며 조급해하기 바빴다. 조급함이 불러일으킨 부정적 감정의 그림자는 걷잡을 수 없이 나의 중심을 흔들었다. 내 두려움은 아마 조급 함인 것 같아. 오랜 고민 끝에 펜을 들고 풍선에 글자를 적었다. 나의 두려움: 조급함.


각자의 여행을 마치고 이야기를 할 시간이었다. 자신의 두려움을 소개하는 모두에게서 부단히 애써온 흔적들이 잔상처럼 보였다. 상담사 선생님은 자신의 두려움과 직면한 그들에게 뾰족한 펜을 주고 풍선을 터트려도 된다고 했다. 펑- 자신의 두려움과 맞서는 용기 로운 소리. 나까지 마음이 가뿐해졌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조급함과 부단히 싸웠던 때를 회상하며 가장 나약했던 시간의 나와 그 감정을 꺼내어 놓았다. 이야기가 끝나고 집단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조급함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더 발전하려 하고 더 나아지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삶에 열정이 있으니 더 그 감정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급함이 드는 건 지금 잘하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그때 꽤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순간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조급함이라는 감정이 미운 정이 잔뜩 들어버린 오래된 연인처럼 느껴졌다. 나의 부정적 감정에 친근함과 애틋함이 든다는 건 새롭고 신기한 감각이었다. 내가 의식할 새도 없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장이 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어쩌면 조급함이 저와 계속 동행해야 할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급함이 제 정체성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을 나의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말을 내뱉고 스스로도 놀랐다. 내 안에 이런 마음이 있었구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도전하길 좋아하는 나에게 조급함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감정이었을지 모른다. 항상 더 발전하고 변화하고자 하는 열정에 대한 응당한 반응을 그동안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치부해버린 거 아닐까? 조급함이 들 때마다 어떻게든 빨리 이 감정을 없애고 다른 감정들로 채워 넣기 바빴다. 나와 맞서 싸워야 하는 감정, 나의 중심을 흐트러트리는 감정, 나의 적. 나의 뒤틀린 시선 끝에 나의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벗어나려 했던 조급함은 나라는 사람의 일부이다. 내가 나이기에 가질 수 있는, 나다운 감정. 내가 나로 살아가는 한, 조급함은 나와 계속 함께해야겠구나. 나의 적이 아니라 나의 오랜 친구이구나. 나의 두려움에 애정이 생긴 순간이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상담사 선생님은 나에게 풍선을 터트리라며 펜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풍선을 살짝 끌어안고 말했다. 음, 저는 안 터트리고 집으로 가져갈게요.



아이유의 노래 <어푸>에 이런 가사가 있다.


어 또 보네.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행운을 빌어.

지겹게 보자고.


나는 이제 나의 가장 큰 두려움에 오랜 친구를 보듯 이렇게 반갑다는 인사를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어 또 왔구나. 그래 네가 안 오면 내가 아니지. 지겹도록 봐야지 우리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부족한 모습, 나의 가장 밑바닥의 감정까지 나는 모조리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부족하고 숨기고 싶은 그 모든 면들도 전부 '나'이다. 나를 숨기는 어떠한 도구나 꾀 없이 거울 속 나와 대면하는 것. 나의 두려움조차도 나답다고 생각하며 애정을 갖는 것. 나는 그렇게 나의 두려움과 화해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한, 나는 조급함과 친구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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