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월 나무 Apr 14. 2023

다시 허니문(Honeymoon again)

 어느 심리전문가가 은퇴를 앞둔 여자들에게 강의를 하는 도중 다음과 같이 물었다.

 “여러분, 은퇴한 남편으로 다음 중 어떤 분이 좋습니까? 첫째 건강한 남편, 둘째 자상한 남편, 셋째 요리 잘하는 남편, 넷째 씩씩한 남편.”

 “강사님, 그중에서 꼭 골라야 하나요?”

 “아니요,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남편을 원하시나요?”
 “집에 없는 남편이요.”

 대화 속의 여자는 왜 집에 없는 남편을 원했을까? 은퇴 부부의 모든 아내들이 이 여자처럼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 대화를 보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2월 말에 남편이 퇴직을 했지만 집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은 많지 않다. 남편은 일주일에 이틀 일을 하러 나가고, 나도 일주일에 이틀 한국어 봉사를 한다. 그리고 각자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지인들과의 모임에 나간다. 가끔은 함께 여행을 하고, 남편이 정기연주회 일 년 예약을 해서 2주에 한 번 정도 음악회도 간다. 따로 또 같이를 잘하고 있어서인지 아직까지 남편의 퇴직이 실감되지 않을 때도 있다. 남편이 걱정했던 은퇴로 인한 부부 갈등은 그다지 없다. 


 남편은 직장에 다닐 때에도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퇴직 후에는 그 빈도와 양이 좀 더 많아졌다. 청소를 할 때, 나는 세밀한 부분을 하고 남편은 기본적인 것을 한다. 빨래를 할 때, 남편은 세탁기를 돌리고 나는 빨래를 갠다. 음식을 할 때, 남편이 재료를 다듬고 씻으면 나는 음식을 만든다. 식사 후, 남은 반찬이나 식탁 정리는 내가 하고 남편은 설거지를 한다. 쓰레기 분리수거는 거의 남편이 해 준다. 30년 넘는 결혼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이 나뉘어서 분업이 잘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퇴직을 했다고 해서 나 혼자 삼시 세 끼를 모두 챙겨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내가 세끼를 제대로 먹게 된 셈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흔히 남편이 퇴직을 하면 겪게 된다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


 평소에 나는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아서 요리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편인데, 반대로 남편은 먹는 것에 진심이고 먹거리나 요리에 대한 관심도 많은 편이라 장보기나 요리도 잘하는 편이다. 그런 남편 덕분에 하루 세끼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고, 남편이 퇴직을 해서 세끼를 같이 먹어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 전에 남편이 짐을 무리하게 들다가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집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내가 거의 모든 집안일을 해야 했다. 아침 먹고 설거지 마친 후 돌아서면 곧 점심때가 되어 있고, 점심 먹으며 저녁에는 무엇을 먹나 생각해야 했다. 남편이 퇴직하기 전 나의 하루는 거의 나만의 시간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서 외출을 하지 않는 날 나의 일과는 아침 스트레칭, 간단한 아침식사, 영어공부, 독서, 간단한 점심식사, 글쓰기, 걷기 운동, 시장보기, 저녁 식사 준비 등으로 대부분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남편이 퇴직하고 함께 집에 있을 때에도 나에게 뭔가를 해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왠지 혼자 있을 때보다 몸과 마음이 더 분주해진다.


 흔히 은퇴한 남편들은 평생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자신의 노고를 가족들이 알아주고 대접해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들은 남편이 퇴직을 하면 그동안 일하느라고 못 해 준 집안일을 같이 해 주고, 함께 여가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동상이몽을 꿈꾸는 은퇴부부 사이에 자연히 충돌이 생기고 다툼이 벌어지는데, 조사에 의하면 은퇴자보다 은퇴자의 배우자의 건강이 더 나빠진다고 한다. 은퇴 직 후 나빠진 부부의 건강은 은퇴 3년 후부터 점차 회복이 되는데, 다시 말하면 은퇴 후 3년은 부부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3년 동안 부부가 서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은퇴 후의 삶의 방향과 행복지수가 결정되는 것 같다.


 전문가는 이렇게 조언한다. 

 ‘하루 세 시간은 바깥 활동을 하고, 하루 한 끼는 남편이 준비하며, 은퇴 후부터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던 배우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과 같이 산다고 생각하라’


 하루 세끼를 준비하는 것이 버거웠던 나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자기, 이제 우리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이 어때요?”

 허리가 아픈 이후로 몸무게가 3킬로 정도 줄었다고 힘 없이 말하는 남편에게 ‘하루 두 끼만 먹자.’는 제안이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신혼 때가 생각난다. 우리 부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 시간을 맞춰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만나 가까이에 있는 재래시장에 갔다. 제철 야채나 생선들이 즐비하게 놓인 가판대를 지나며 저녁에 무엇을 해 먹을까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시장을 봤고, 집에 돌아오면 같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서 먹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남편과 나의 역할이 나뉘었다. 나는 주로 아이들 교육을 맡았고, 남편은 집안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이제 아이들이 모두 독립을 하고, 남편과 나 둘만 남았다. 우리 부부가 함께 도란도란 시장을 보고,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다시 신혼시절 그때처럼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그때보다 상황은 훨씬 좋아졌다. 나는 신혼 때보다 음식 만드는 것에 더 익숙해졌고, 우리 둘은 시간도 넉넉한 은퇴부부가 아닌가. 

 가끔 내가 남편에게 퇴직 후의 삶이 어떠냐고 물으면 남편은 장난스럽게 말한다. 

  “It's the honeymoon! Honeymoon again.

 기분 좋은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맏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