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학교 하랑 EP 6
“자네 대체 이걸 보고서라고 작성한 건가!”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이 청년의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자신이 야근까지 하며 공들여 썼던 보고서가 수십 갈래로 찢어져 눈앞에서 흩날립니다. 날아가는 종잇장 사이로 잔뜩 성이난 문어.. 아니 부장님의 분노로 시뻘겋게 물든 대머리가 보입니다. 청년은 눈을 딱 감고 차라리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아..”
부장실 문을 닫으며 청년은 한숨을 포옥 내쉰 채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청년의 옆자리에는 에이팟을 낀 채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는 후임이 열심히 타이핑을 치고 있습니다. 나 때는 에이팟은커녕 노래를 흥얼거리는 일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이 맹랑한 후임님은 맑은 눈을 광인처럼 치뜬 채 이렇게 에이팟을 끼고 노래를 흥얼거려야 일의 능률이 오른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을 입사 첫날부터 보여주었습니다. 생각보다 일은 잘하는 편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빠른 속도로 치는 키보드 소리와 언밸런스한 콧노래는 그의 신경을 연신 거슬리게 합니다.
“내 코가 석 자지..”
그러나 마음 약한 청년은 차마 쓴소리는 못하고 이내 갈기갈기 찢긴 보고서를 수정하기 위해 컴퓨터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피곤함이 가득 담긴 눈과 앞으로 굽은 목이 모니터 화면에 비치며 오늘따라 한층 더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늦은 퇴근 시간 이후, 청년은 비틀비틀 거리며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쓸쓸한 원룸의 불을 켠 청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부스럭대며 꺼낸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냈습니다. 오늘은 요즘 유행하는 순두부라면을 해볼까 합니다. 파를 송송 썰어 넣고 물은 평소보다 1/2 가량 적게. 마지막으로 순두부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면 위에 올리면 준비는 끝났습니다. 면이 알맞게 삶아졌을 때, 화룡점정으로 후추를 팍팍 뿌려주면 완성입니다.
“하아.. 라면도 질린다 질려.”
양은냄비에 먹음직스럽게 익은 순두부 라면을 보면서도 청년은 연달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습니다. 어릴 때에는 그렇게나 좋아했던 라면이 요즘은 왜 이리 먹기 싫은지. 마주 앉아 먹는 사람 없이, 홀로 휴대폰에 영상을 틀어놓고 밥을 먹는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더 처량하게 느껴졌습니다. 취업을 하고 거리 탓에 고향을 떠나 자취를 시작한 지 어언 3년째. 청년은 어느 순간부터 라면냄새가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밥먹듯이 하는 야근의 끝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이나 배달음식으로 채워지기 일쑤였습니다. 한두 젓가락 깨작거리며 라면을 집어먹던 그는 멍해지는 정신 속에서 어느 순간 몽글몽글한 추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꿈속에 있는 듯 흐릿하지만, 그 속에서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정겨운 냄새와 시끌벅적한 소음.
“그땐 그렇게나 먹기 싫었던 음식인데… 오늘은 너무 그립네.”
추억을 회상하던 그의 눈에 빛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추억의 시간 속 그 장소에서 밥을 먹어보고 싶다고, 그의 마음속 강한 욕망이 그에게 속삭였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은 외투만 걸친 채 집을 나섰습니다. 막차가 끊기기 직전의 시간. 돌아온다면 결근은 불가피할 테고 대머리 부장의 극대노할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고향을 가는 버스에 몸을 맡겼습니다. 심야버스는 그를 태운채 조용한 밤의 거리를 유영하며 금세 도시를 빠져나왔습니다. 곧 버스는 불빛이 가득한 도시를 벗어나, 고요한 어둠 속으로 도망치듯 사라졌습니다.
“쌀쌀하네...”
숀은 외투를 여미며 무심코 손을 비볐습니다.
그치지 않고 내리던 비가 오던 여름밤은 눈 깜박할 사이 지나 있었습니다. 운동장 여기저기에 사각사각 거리며 휘날리는 낙엽들과 밤인데도 울리고 있는 늦깎이 매미의 맴맴 소리가 숀의 귓가를 때립니다. 한껏 짧아졌던 숀의 소매길이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숀은 그럼에도 추운지 그 위에 얇은 바람막이를 껴입었습니다. 손을 비비며 손바닥 사이로 후후~ 숨을 불어넣고 있던 숀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정확히 12를 가리키는 순간 앉아있던 의자에서 비척비척 일어났습니다.
왼쪽으로 한 번, 그리고 오른쪽으로 한 번. 마지막으로 림보 하듯 뒤로 크게 한 번.
사계절 변함없이, 꾸준한 그만의 준비운동이 끝난 후 그는 조용히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는 습하지 않은 맑은 밤바람이 숀의 볼을 간지럽힙니다.
"순찰돌기 딱 좋은 날인걸?"
밤바람이 제법 상쾌합니다. 여름의 향수를 지나, 고독한 가을의 정취가 한 뼘 가까이 다가옴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던 숀은 이 자유로운 밤바람을 조금 더 자리에 서서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을 고개를 휘휘 돌려가며 애써 쫓아낸 후, 가까운 급식실부터 순찰을 돌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텅 빈 정자를 지나서 급식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오늘따라 하염없이 길고 멀게 느껴집니다.
끼이익
철로 된 급식실문을 열어젖혔습니다. 오와 열을 맞추어 곧게 늘어져 있는 흰색 탁자들이 그를 반깁니다. 매끈한 탁자의 표면에 반사된 달빛이 숀의 얼굴을 비추고 지나갔지만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순찰을 도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급식실 탁자들을 지나서 숀은 끝에 위치한 조리실 문을 열었습니다. 밤이지만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대형 냉동실 불빛이 웅웅 거리며 조리실을 지킵니다. 아무래도 달빛이 들어오지 않는 조리실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오늘도 사명감이 투철한 숀은 꼼꼼한 순찰을 위해 조리실 스위치를 켰습니다.
탁
“어..?”
불이 켜진 조리실에는, 아이고.. 몇 달 만에 찾아온 새로운 불청객이 먼저 와 었었습니다. 하얀 와이셔츠에 반쯤 풀린 넥타이를 맨 청년은 희한하게도 국통 뚜껑을 들고 고장 난 고양이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숀 역시 가만히 청년을 살피느라 이 기묘한 눈싸움은 몇 초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자네가 생각해도… 지금 상황이 웃기지?”
긴장을 좀 풀어보고자 숀은 먼저 말을 꺼냈지만..
탱…. 탱그랑!!!
청년은 양철로 된 국통 뚜껑을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둥근 보름달처럼 동글동글한 국통뚜껑은 바닥을 구르며 정적만이 가득했던 조리실에 엄청나게 큰 굉음을 쏟아냈습니다.
“죄…죄송합니다…!!!”
자기가 떨군 국통뚜껑 소리에 청년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지르며 냅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청년이 열고 뛰쳐나가버린 조리실 뒷문을 보며 숀은 조용히 혀를 끌끌 찼습니다.
“거기 막힌 길인데…”
-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