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마운틴에서
신문마다 방송마다 가을 단풍을 소개하느라 분주하다. 3시간이면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다는 소개부터 며칠 묵으며 지방으로 다녀오는 상품까지 각양각색이다. 마음은 훌쩍 떠나고 싶지만 벌려놓은 일이 많아 그저 사진 속 풍광을 위안으로 삼는다.
뉴욕의 가을도 아름다웠다.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집 앞 노던 블루버드부터 멀리는 뉴저지의 베어마운틴(Bear Mountain)과 헌터마운틴(Hunter Mountain). 그리고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까지. 어느 해 가을이었을까. 울긋불긋 나뭇잎들이 마치 커리플라워 송이처럼 발아래로 때로는 머리 위로 펼쳐지고 있던 계절, 친구와 함께 패키지를 따라 가을 여행을 떠났다.
그랜드센트럴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로 달려 도착한 헌터마운틴에는 이미 독일 민속축제 옥토버페스트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가 세계 어디서든 설날과 추석을 챙기듯, 뉴욕 위쪽 지역 독일인들이 모여 즐기고 있는 축제. 비록 타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도 고국을 기억하며 즐기는 축제다.
저마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 게임을 즐기는 사람, 상점의 물건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산 등허리는 오색 물결로 출렁거렸다. 우리 일행도,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확성기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댔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씽긋이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얼굴도 피부도 몸집도 다른 사람들의 웃음과 흥겨움이 가을 오후 햇살 아래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 아름다운 사람들!
인파 속을 겨우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팀별로 나누어 숙소로 들어갔다. 친구와 나는, 딸 산후조리를 위해 서울에서 왔다는 혜경 씨와 긴 우울증의 터널에서 겨우 빠져나와 뉴욕의 남동생 집을 방문하고 있다는 현숙 씨와 한 팀이 되었다. 함께 여행하다 보면 한 두 끼만 같은 테이블에서 밥 먹어도 금방 속내를 드러내고 만다. 혜경 씨는 이웃집 아저씨같이 서먹한 아들보다는 살가운 사위가 더 위안이 된다면서 온갖 우스개 만담을 쉬지 않고 선물해 주었다. 현숙 씨는 남편과 사별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며 눈시울이 촉촉해지기도 했다. 우리는 맥주 한 잔씩을 들고 이야기가 있는 가을밤을 걸었다.
다음 날 가이드는, 우리 팀이 가장 젊고 방방 뛰어다닌다고 반다걸스(wander girls)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그때만 해도 젊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오래간만에 풋풋한 젊음을 과시했다. 나이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지만 놀 때는 모두 한 몸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하루를 함께 묵으면서 서로의 다름을 섞고 비비면서 한 그릇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가을 여행을 만들어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여행의 큰 매력이다. 생면부지의 남과 몇 날을 보내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도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지내다 보면 교집합 같은 자리가 만들어진다. 서로의 자유와 개성을 인정하는 사이, 그 정도 여백이 있는 사이가 좋았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저 비 내리고 나면 아파트 단지 단풍들도 홀연히 사라질 것만 같은 조바심에 문을 나선다. 길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들,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양이 없다. 팔이 잘렸는가 하면 온몸이 상처투성이기도 하고 목이 부러져 있기도 하다. 붉은색에 별 모양, 갈색에 삐쭉삐쭉한 몸매까지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양이 없다.
사람도, 우리의 삶도, 길 위에 떨어져 있는 낙엽까지도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참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문득, '언니! 우리 넷 재미있었죠! 서로 좀 다르기는 했지만....' 헤어질 때 혜경 씨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시월이면 가끔 그때의 옥토버페스트가 생각나 혼자 생맥주라도 찾아 마신다. 눈부시던 시월의 헌터마운틴, 그때 그 반다걸스는 그 빛나던 가을 산을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