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에 메시지를 입력하며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답장을 확인하는데 계단 끝에서 웬 아저씨가 인사를 건넨다.
“여어~.”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대충 던지는 인사말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코로나 기간 2년, 그전에도 자주 본 적은 없으니 어쩌면 3년 이상. 오랜만에 만난 것치고 인사가 담백하다.
“아이고, 아저씨. 오랜만이다.”
무심한 인사로 마주한 그와 나는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우리가 졸업한 대학교. 그는 택시 기사님께 학교 이름을 말하고, 정문에서 한 명 더 태우고 본관까지 들어가 달라고 했다. 무심코 듣던 나는, “아니요, 아저씨. 정문 앞에서 그냥 내려주세요.” 다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본관까지 어떻게 걸어가려고?”
“그래도 걸어가면서 학교 좀 봐야지. 얼마 만에 온 건데. H도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잖아.”
“나는 자주 와서 감흥 없다. 20분은 넘게 걸어야 할 텐데 마음대로 해.”
친구의 집은 학교와 가깝다. 친구의 부인은 학교에서 강의를 하나 맡고 있다. 학교가 산책길이 된 그들이 어쩐지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20대, 학교 안에서 느끼던 그때의 감정들을, 나는 어느새 잊고야 만 그 느낌들을 매일 되새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학교 안에 있을 때는 정작 몰랐던 그 시절처럼, 학교가 산책길이 된 그들도 다시 익숙함에 시선이 무뎌진 것일까.
기차역에서 잡아탄 택시는 시장을 둘러 학교로 향했다. 20년 전의 909번 버스처럼. 택시 안에서 보는 풍경은 불평을 문 얼굴 하나를 데려온다. 버스가 ‘ㄷ자’로 역전을 두르지 않으면 등교 시간이 10분은 단축될 거라고 툴툴대던 909번 버스 안의 나를. 같은 행로, 다른 시간. 20년 전의 불평은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골라내는 탐사로 바뀌었다. ‘바뀐 것은 무엇일까요?’ 퀴즈쇼가 벌어지는 동안 택시는 묵묵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건너편에 서 있는 H가 보인다. 입학 첫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몇십 명의 동기들 중에서 함께 909번 버스를 탔던 그 친구가.
대학생이라는 설레는 타이틀을 안고 아침 9시에 시작하는 1교시 수업을 위해 7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기상 시간과 등교 시간은 0교시가 있었던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역의 곳곳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속속들이 둘러 가는 시내버스로 50분 거리. 정류장에서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는 빠른 걸음으로도 10분이 걸렸다. 7시 30분에 집을 나서 운 좋게 10분 만에 버스를 탄다고 해도 수업 시작까지 빠듯했다. 아빠는 나를 깨우고 엄마는 아침밥을 차렸다. 온 가족이 새벽부터 몰아치듯 시작한 입학 첫날은 허무하게도 10시 30분에 종료되었다.
대학생이 되니 갑자기 ‘시간부자’가 되었다. 고등학교 쉬는 시간은 10분 동안 화장실도 가고, 매점도 가고, 친구들과 전날 본 H.O.T. 이야기를 하려면 단 몇 초도 빈틈이 허락되지 않았다.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달랐다. 내 교실, 내 자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은 그곳에서 1교시 수업밖에 없었던 그날, 나는 넘쳐나는 빈 시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하루가 통째로 쉬는 시간인 대학교는 나를 집으로 향하게 했다. 벌써 집으로 가도 되는 건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어쩐지 허탈했다. 그날 정류장에서 나와 비슷한 얼굴로 서 있던 H.
“저기.. 정행학부 맞죠? 몇 번 타요?”
같이 909번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떠들었던 그 친구가 지금 정문 앞에 서 있다. 그때처럼. 같은 옷차림, 같은 헤어 스타일로. 얼굴만 조금 늙은 채.
학교 앞에서 셋이 만나니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진짜 괴성을 질렀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봐도 20대처럼 보이는 학생들이 우리를 힐끔거렸으니까. 우리가 입학했던 20년 전에는 ‘정문’이 실재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처럼 양쪽에서 드르륵 끌어와 철컹 자물쇠를 채우는 철문 같은 것은 없었다. 본관까지 길게 뻗은 광막한 광장으로 진입하는 도로만 있었을 뿐. ‘천마로’라 이름 붙은 그곳은 막걸리를 먹고 자랐다. 입학의 설렘이 사그라지면 천마로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단대 건물까지 지름길로 가기 위해 정문을 들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의 자랑거리인 드넓은 캠퍼스는 오히려 학생들의 발을 묶었다. 단대 건물에서 먼 곳의 수업은 제아무리 명강의라도 수강신청에서 제외됐다. 어디든 디뎌야 할 의무가 있는 대학생의 발은 광활한 캠퍼스라는 전족에 묶여 소극적으로 자리잡았다.
편의상 정문이라 불렸던 장소에 어느 날부터 조형물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천마로 초입에 잔디가 깔리고 돌다리가 박히고 물이 고였다. 작은 정원 뒤편으로 비행기의 양 날개 같은 기하학적인 구조물이 들어섰다. 정문은 활주로에 들어선 비행기 같았다. 양 날개가 교차하는 중앙 부분에는 갤러리 같은 공간이 만들어졌고 무언가 전시가 되기도 했다. ‘전시’와는 관련 없는 전공이었기에 정문의 조형물은 한 번도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정문을 이토록 유심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문의 이름이 ‘천마지문’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천마지문 앞에서 스무 살 청춘의 시작점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두 번째 스무 살의 끝 무렵, 장년의 문 앞에서.
학교를 졸업한 지 15년. 정문을 뒤로한 채 본관으로 가는 길에 가장 처음 본 것은 천연잔디 구장이었다. 학생 주차장 자리에 우리의 등록금으로 만들어졌지만, 정작 학생들은 한 발자국도 밟을 수 없었던 곳. 불통의 온상이었던 천연잔디 구장을 아름드리나무가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 원래 나무가 있었나? 15년의 세월이라면 새로 심은 나무가 자랐을 수도 있겠지만, 나무는 성인 두 명이 양팔을 벌려 에워싸기에도 힘들어 보였다. 축구장을 지나자 바로 보이는 노천강당 주변에는 키 큰 은행나무가 즐비했다. 학교에 은행나무라니. 기억에 전혀 없었다. 학교에 나무가 이리도 많았었나. 학교의 나무가 이리도 예뻤었나. 온통 새로웠다. 휴학 기간 1년까지 총 5년 동안 나는 학교의 무엇을 보고 다닌 것일까.
학교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앙도서관 앞은 도서관의 높이와 견주는 메타세쿼이아 길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그 중앙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만 한 청동 거인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어쩐지 예전만큼 흉물스럽지 않았다. 주황빛으로 물든 나무들 사이, 은빛 초록색을 띤 거인과 사진을 찍는데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별일 아닌 것에 웃고 떠들던 그 시절처럼. 광대가 아팠고 목이 따가웠다. 숨이 차고 눈물이 났다. 숲길 벤치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최소한 열다섯 살은 어린 그들에게 기이한 인상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본관으로 향하며 말했다.
“쟤네들, 우리 보고 자기들은 늙어서 저러지 말아야지. 이러는 거 아니겠지?”
“교직원인 줄 알겠지? 원서 내러 온 학부모로는 안 보일 거야.”
“설마. 근데 요즘도 직접 원서 내러 오나?”
목이 메는 학교 구경의 종착지는 본관 뒤 꿀막걸리 집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먹고 수업 시간에도 먹었던 꿀막걸리. 본관 뒤편의 숲길을 지나니 꿀막걸리 집이 보인다. 어쩐지 흑백이었다. 건물은 흑백사진처럼 색이 바랬고 문이 닫혀 있었다. 좌절하던 찰나 바로 옆 건물로 이전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이 꿀막걸리를 셋이서 함께 마시기 위해 먼길을 왔다. 막걸리 집의 문을 여는데 입학 첫날의 설렘이 살아나는 듯했다. 오천 원이었던 꿀막걸리는 10년에 천 원씩 인상된 것인지 칠천 원이었다. 메뉴판에서 가장 비싼 안주, 칠천 원짜리 해물부추전과 순대볶음을 시켰다. 기본 반찬은 김가루와 설탕 뿌린 튀긴 떡볶이. 그대로였다. 곧이어 주인공이 등장했다. 항아리에 담긴 뽀얀 막걸리와 종지 가득한 꿀. 남자는 꿀을 항아리에 부어 주걱으로 섞었다. 남자의 투박한 손길에 두 여자는 역정을 냈다.
“더, 더 섬세하게 저으라고!” 우유 같은 막걸리는 이내 버터색이 되었다.
잡꿀을 섞은 막걸리는 달았다. 꿀의 등급은 이 자리의 맛을 내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꿀벌이 560만 개의 꽃에서 따온 꿀이든 설탕을 절여 만든 꿀이든 이 순간은 프리미엄 등급 꿀이었다. 꿀막걸리 세 잔에 얼굴이 달큰해졌다. 달아오른 기분이 한몫했을 것이다. 오후 4시 30분. 이 시간 막걸리 집에 우리밖에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요즘 아이들은 술을 안 마시는 것일까. 한 항아리를 더 마시고 싶었지만, 학교 앞 번화가에서 먹고 마셔야 할 것들이 줄 서 있었다. 후배들아, 이 시간 이곳을 비워두지 말기를. 낭만적으로 마셔주기를.
얼굴에 사과 빛을 띤 불혹들은 다시 정문으로 걸어갔다. 학교로 들어오는 복숭앗빛 스무 살들을 역행하며. 이곳에 어울리는 낯빛에게 자리를 비켜주며. 학교 앞 상가에는 우리가 자주 갔던 식당과 술집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달큰했던 입안이 어쩐지 쌉싸름해졌다. 눈에 보이는 횟집에 들어가 각자 술을 시켰다. 술도 이야기도 다시 시작이다. 소리 없이 강하다는 카피로 출시된 자동차, ‘레간자’를 애칭으로 부여받았던 나는 이제 소주와 데면데면하다. 아저씨가 된 친구는 빨리빨리 마시라고 주문했다. 자작하게 하지 말라는 주문도 동시에 내놨다. 대단히 ‘아저씨’스러운 주문에도 나의 909 친구는 고결했다. 한 잔도 빠지지 않고 정갈하게 들이붓는다. 맥주로 아저씨 회식 문화를 따라가려니 배가 불러 목이 다시 멨다.
소주와 맥주가 섞인다. 스무 살과 두 번째 스무 살이 섞인다. 스물의 이야기와 마흔의 이야기가 골뱅이와 소면처럼 한데 버무려진다. 강의실과 전공 수업, 축제 같은 캠퍼스의 환락이 주름과 처지는 가슴, 몸속 혹에 대한 걱정으로 교체된다. 입학했을 때는 어른 같은 선배들과, 학년이 올라갈수록 동생 같은 후배들과 꿀막걸리를 마셨지만, 졸업 후 연락하는 것은 결국 동기들뿐이다. 취업 문을 열고 결혼식을 시작으로 돌잔치를 축하하며 부모의 장례식에서 울어주었다. 내 아버지의 장례식에 먼 곳까지 찾아와 주었던 동기를 한 달 뒤에 다시 보았다. 그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에서. 동기란 생애주기가 같음으로 연결된 사이 같다. 생애주기별 국가건강검진처럼 우리는 같은 해에 국가암검진을 받는다. 대나무 마디처럼 일정한 길이마다 붙어 있다. 띄엄띄엄 띄어져 있지만 새로운 문을 열어야 하는 일생의 구간마다 마주한다.
내년부터 우리나라도 ‘만 나이’로 통일된다고 한다. 다시 두 번째 스무 살이다. 백세시대, 절반도 살지 않았다. 생애주기가 같은 우리들은 앞으로 몇 개의 문을 더 열게 될까. 어떤 문에서 또다시 마주칠까. 삶이란 결국 붉은 동굴 앞에 굳게 닫힌 철문을 향해 가는 것이다. 지금처럼 무구하게 달뜬 얼굴로 붉은 동굴에 입장하고 싶다. 철문이 닫히고 불길이 치솟을 때 찬연하도록. 술이 섞이고 기분이 섞이고 마음이 섞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