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에 한 발을 겨우 걸치던 햇살이 어느덧 거실 안쪽까지 무자비하게 들이닥친다. 어느새 가을이다. 따사로운 햇살에 창틀 앞 올리브는 기다렸다는 듯 키를 높인다. 동그란 수형을 지키려고 가지치기할 곳을 들여다보는데 눈이 부시다. 집 안이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닌 계절이 돌아왔다. 가을의 집 안은 한여름 바깥의 뙤약볕 아래처럼 위험하다.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선크림을 찾았다. 올리브 이파리는 햇살을 받을수록 매끈해지겠지만 자외선이 관통한 내 피부는 산화된다.
옴팡지게 두드린 선크림에 알량한 안심을 얻고 거실 화단으로 돌아가 화분들을 살폈다. 거실 창문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유칼립투스의 잎 몇 개가 붉게 물들었다. 상록수에 단풍이라니 반가운 소식일 수 없다. 호주가 원산지인 유칼립투스는 직사광선과 통풍이 중요하다. 이 까다로운 식물을 위해 밤낮없이 창문을 열어 놓았던 것이 화근이었나. 어느새 가을인 줄 알았는데 거실 창문 앞 밤은 겨울인가 보다. 은빛 나는 초록 잎이 붉게 물든 것이 예쁘면서도 아릿하다. 단풍이 들어 잎이 떨어진 자리는 내내 비어 있을 테니까. 잎이 떨어진 곳 옆자리에 운 좋게 새순을 피운대도 단풍이 진 자리는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
만추. 晩秋. late autumn.
가을이 가득 차서 滿秋인 줄 알았는데 늦은 가을이라 晩秋라니. ‘늦가을’에 한 음절을 끼워 넣었을 뿐인데 ‘늦은 가을’이 되니 어쩐지 헛헛하다. 늦었다. ‘늦었다’라는 말에 나를 데려다 놓으니 저무는 가을처럼 마음이 내려앉는다. 삶의 시간이 나도 모르게 불혹에 가닿았는데 그 시간마저 어느새 절반을 훌쩍 통과하고 있다. 현미경으로 그즈음의 내 시간을 들여다보면 그저 무(無)일 것이다. 촘촘하게 짜여진 시간의 조직에 아무것도 들어찬 것 없는 무. 거실 안쪽까지 들이치는 햇살과 스산한 바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느새 가을이 저문다. 면 재킷과 울 재킷 사이에서, 얇은 트위드와 부클 트위드 사이에서, 크롭 재킷과 트렌치코트 사이에서 이것도 저것도 고르지 못했다.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가을의 문턱에서 어느 것 하나도 온전하게 입어내질 못했는데, 가득 들어찬 적 없는 나를 내버린 채 저 혼자 꽉 찬 가을이 비어져 간다. 오후의 늘어지는 햇살이 무심하게 나를 훑고 지나가 버린다.
늦은 가을이란 말에 헛헛해진 마음이 고무줄 하나로 묶어 올린 머리칼,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로 몸을 감싼 탕웨이를 떠올린다. ‘만추’는 탕웨이니까. 영화 <만추>는 남편의 폭력을 피하다 실수로 남편을 살해하고 감옥에 수감 중인 애나, 탕웨이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3일간의 특별휴가를 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7년 만에 만났지만 반가움보다는 어색함이 감도는 가족들, 어쩐지 변해버린 시애틀의 거리. 애나는 애써 사흘간의 자유를 누려보려 하지만 동선을 확인하는 감옥으로부터의 전화에 한껏 바른 립스틱을 지우고 화려한 옷을 벗어버린다. 달이 찬 듯 밝았다 이내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돌아서는 애나의 텅 빈 얼굴이 이지러지는 달과 겹쳐진다.
애나에게 7년 만에 생긴 자유는 72시간이란 제한 시간 안에서 견고하게 억눌린 체념일 뿐이다. 믿었던 사랑에 배신당해 과거를 잃고, 현재는 속박되어 미래마저 알 수 없는 그녀에게 우연히 만난 남자 훈, 현빈은 자꾸만 시계를 선물한다.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에서 만난 애나에게 돈을 빌리면서 훈은 시계를 저당잡히려 한다. 시애틀에서 다시 우연히 만난 그녀가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 멀어지려고 할 때도 훈은 또다시 시계를 내민다. 가진 시간이 없어 아무것도 채우지 않으려 하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시간이 없기에 이 순간을 오롯이 담으려 한다.
시간에 속박된 애나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쫓기는 처지이기에 시간이 촉박한 훈. 그들의 만남은 그들 삶에서 정말 늦은 것이었을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려는 훈과 함께 시애틀의 거리를 누비는 애나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어린다. 기우는 달이 다시 차오르는 것처럼. 그들을 보며 짧은 시간일지라도 사랑은 시작되고 이내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72시간이라는 제약은 그들에게 더는 무의미한 족쇄다. 관계의 밀도는 이미 높아졌으니까.
그들 삶에서 사랑이 늦지 않았듯 마찬가지로 삶의 시간은 그게 언제든 늦지 않았다. 구멍이 뚫려 비어버린 것은 살아내는 동안 무언가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육아와 살림에 치이느라 삼십 대의 뜨거운 여름을 땀방울로 흘려보냈어도, 그리하여 마흔 살의 나는 이도 저도 이룬 것 없는, 가운데가 텅 빈 도넛 같지만 늦은 것은 아니다. 시간에 물성이라는 게 있다면 붙들어 둘 수 있었을까? 설령 움켜쥐었다 하더라도 손을 펴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을 것이다. 다만 손가락 사이사이 묻은 모래알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겠지. 지금을 온전히 대하면 언젠가 모래알이 잔뜩 묻은 손바닥을 마주할 것이다.
출소 후 카페에 앉아 훈을 기다리며 웃음 짓는 애나를 생각하는데 발꿈치가 간지럽다. 뒤꿈치가 만추다. 발꿈치를 뒤덮은 각질을 보며 나에게도 가득 들어찬 것 하나를 찾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뒤꿈치를 두텁게 꽉 채운 가을을 살살 긁어 비운다. 불시로 들이닥친 겨울에 발바닥에 크레바스가 생기지 않도록. 텅 빈 것을 만들지 않기 위해 가득 찬 것을 오히려 비워낸다. 다 채우지 못한 나의 가을이 행여 크레바스 사이에 고립되지 않도록 꾸덕꾸덕한 크림으로 덮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