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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주 Dec 25. 2022

길. 동. 무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연일 날이 매섭게 춥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보다는 겨울을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추운 겨울이 반갑지만은 않으니 나도 나이가 들어감이겠지... 불현듯 동남아의 어느 따뜻한 나라로 이 겨울동안 피한(避寒)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로 애써 나름 합리화를 시키며 지인이 추천해 준 책을 겨우겨우 한 페이지씩 읽는다. 너무 오랜만에 책을 잡아서인지 읽는 속도가 더없이 더디기만 하다. 분명 읽고 책장을 넘겼건만 무슨 내용을 읽은 건지 도무지 이야기의 전개가 이해되지 않아 어느 단락에서는 읽고 다시 읽고를 반복하며 몇 번을 봐야 겨우 이해가 되는 부분까지 있다.

하긴... 이해는커녕 어떤 때는 분명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단어가 있거늘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만 아른거리고 입 밖으로 내뱉기가 힘들어 "그거 그거" 하며 곤란해하면 상대방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단어를 꺼내주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뿐이랴..  말하는 중간에 부연 설명이 길어지다 보면 정작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잊는 경우까지 있으니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저 마음의 나이일 뿐일 거라 짐작해 본다.


몇 년 전, 10년 이상을 살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이사를 했다. 나이가 들어서 이사를 해서인지 예전과는 다르게 낯선 곳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이사한 후로 이런저런 일들을 잘못 처리해서 금전적으로 많은 손실로까지 이어져 '이사를 잘못한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자책을 하며 한동안을 힘들게 보냈다.

새로 이사 온 집터로까지 탓을 돌리기도 했으나 그나마 다행히 집 근처에는 천변을 활용해 조성된 멋진 산책로가 있어 그 길을 걸으며 울분에 찬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기도 했다.

매끄럽게 잘 조성된 산책로의 끝에는 다른 구역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부터는 포장이 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흙길로 비라도 내리면 물웅덩이까지 생기는 그런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이 다리 주변으로는 여러 가지 꽃들도 많이 피고 봄이 되면 쑥이며 달래를 캐는 모습까지 종종 볼 수 있다.

지난봄 어느 날도 그 길을 걸으며 홀로 쑥을 뜯고 계신 분에게 말을 걸며 그 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분도 나와 같은 곳에서 살다가 이사를 나왔고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서로 가까운 단지인 데다가 겪고 있는 복잡한 심경의 이유까지 서로가 비슷한 우울감을 가지고 있어 처음 만난 분인 데다가 나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얘기가 참 잘 통했다.

거기다 사주명리학을 공부하셨다며 나의 생년월일로 사주풀이도 해 주시고 어떤 때는 풍수지리에 대한 설명까지 해 주시는데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나름 흥미롭게 여러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신다.

그렇게 가끔 만나며 지내던 지난여름 어느 날도 그 분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저혈당 쇼크 --당뇨는 아닌데 가끔 공복 시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고 손발이 떨리고 쓰러질 것 같은 증상-- 증상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마침 그분이 수박주스를 준비해 오셔서 그걸 먹고 힘을 낼 수 있었다. 금방 죽을 것 같던 그 순간에 주신 수박주스가 너무 감사하여 그분께 감사표시를 하면서 둘의 사이가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나하고는 거의 띠동갑에 가까운 나이차임에도 전혀 나를 하대하지 않고 늘 존대를 해 주시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스럽지도 않게 대해 주시는 그런 것이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

그분도 나처럼 걷는 것을 좋아하셔서 볕 좋은 날은 걷다가 벤치에 앉아 준비해 간 간식을 먹기도 하고 두어 번은 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도 했는데 젊은 시절 다른 일을 많이 하셔서인지 살림은 내가 한 수 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번 김장 때 했던 겉절이를 나누어 드린 적이 있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 누군가에게 재료가 아닌 음식을 드리는 것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드리고 나서도 걱정스럽긴 했으나 다행히도 남편분이 김치가 너무 맛있어 감탄을 하며 드셨다고 조금 더 줄 수 있냐고 까지 물으신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셨다며 손맛 좋다는 칭찬까지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우리 둘째 아들은 엄마가 만들어 준 김치만두를 유난히 좋아한다.

엄마표 김치만두를 유난히 좋아하는 둘째 아들 때문이라도 가끔 김치만두를 만들어 먹는데 엊그제도 둘째와 만두피를 밀어가며 한창 만두를 만들고 있는데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경동시장에서 들깨를 한말 사서 들기름을 짰어요. 한병 드릴 테니 우리 만나던 그 벤치로 나오실래요?"

"에구.. 말씀 낮추세요. 힘들게 장만하신 건데 뭘 저한테까지 주시게요.. 그런데 제가 지금 만두를 만들고 있어서 나가기가 곤란한데 내일은 어떠세요? 괜찮으시면 내일 제가 만든 만두 좀 드릴게요"

"만두 좋아하는데 주시면 잘 먹을게요"

경동시장에서 국내산 들깨 한말을 산 후 방앗간에서 중국산과 바뀌어질까 염려되어 지키고 앉아 계시다가 짜온 들기름이라고 하신다. 그렇게 힘들게 장만하신 걸 주신다니 값을 떠나서 마음이 참 고마웠다.

다음 날에 어제 만든 만두를 조금 가지고 나갔더니 들기름과 곶감에 귤까지 한 보따리를 주신다. 내가 드린 것 이상으로 너무 잘 챙겨 주셔서 미안스럽기까지 하다.

감사한 먹거리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는데 둘째가 "엄마, 물물교환한 거네요?" 하며 웃는다.

그리고는 이내 오후에 그분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점심에 만두 구워서 먹방 했어요. 입과 속이 뜨거워지는 만두였네요. 손맛이 느껴졌어요!"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음식을 누군가에게 드리는 일은 늘 조심스럽더라고요. 저희도 귤과 곶감 맛있게 잘 먹었고요~ 귀한 들기름도 잘 먹을게요^^"

"그 댁 음식은 솜씨자랑 하셔도 돼요"

맵지는 않을까, 입맛에는 맞을까 조심스러운 데다 많은 양을 드리지도 못했는데 먹방이라니..  그래도 맛있게 드셨다니 조심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이웃들과 서로 스스럼없이 지내며 음식도 서로 나누어 먹기도 했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서로 육아 품앗이도 해 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세상이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언젠가부터는 바로 옆집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나야말로 지금 이사 온 지가 몇 년이지만 옆집 사람을 길에서 만나면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다. 겨우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을 눌러야 비로소 저 사람이 우리 옆집 사람인가 보다 하고 짐작할 뿐 인사조차 인색해지는 각박한 세상인데 우연히 만난 길동무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게 된 기분이라 따뜻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신 분인 것 같아 감사한 마음까지 든다.


며칠째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로 거의 두문불출하다시피 지내고 있다. 겨울은 그래도 추워야 된다고 말하지만 요즘 같은 심한 강추위는 어느새 벌써 봄을 기다리게 한다. 엄청나게 추운 올해의 겨울을 지나온 내년의 봄은 여느 해의 봄보다 훨씬 더 따뜻한 봄으로 다가올 거란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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