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보고만 있어도 아련한 그런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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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다, 너무나. 시린 코를 목도리 안으로 밀어 넣어도 보고, 얼어붙은 두 귀를 주물러 보았지만 매서운 바람은 그칠새를 모르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움직이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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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외할머니는 병원을 전전했다. 쓴 약, 독한약에 간신히 기대어 헐떡이는 숨을 부여잡고 그렇게 할머니는 입원을 했다.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이라 할머니의 간병에 골치를 먹고 있던 와중, 나에게 연락이 왔다. 할머니 시술할 동안 잠시 간병 좀 해줄 수 없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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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회사에 합격하고, 입사 전 친구들과 놀 생각 그리고 집에서 쉴 생각 밖에 없는 나는 이 소식이 달갑지 만은 않았다. 마음 아픈 엄마 앞에서 쉽사리 내색할 수 없었지만, 엄마도 알았을 거다. 내가 가기 꺼려한다는 것을. 간병도 간병이지만, 외할머니와 오랫동안 단 둘이 있어 본 적이 없던 나라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내가 잘 보살펴드릴 수 있을까, 잘 버틸 수 있을까. 매서운 바람 마냥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병실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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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그 왜소한 몸에 주삿바늘이 주렁주렁했다. 아프지 않냐며, 걱정하는 손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연신 괜찮다고 외치는 그녀였다. 쪼글쪼글한 손을 잡고 하얗게 튼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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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엄마, 아빠의 연애스토리 그리고 할머니의 결혼생활 등 여자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들에 물꼬를 트고 나니,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결혼 절대 안 한 다는 손녀를 보고 어찌나 설득시키던지, 못 이기는 척 웃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할머니의 그 말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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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시술이 있었다. 작고 가냘픈 할머니의 손목과 허벅지를 타고 들어가는 심혈관 시술. 걱정하지 말라며, 다 잘 될 거라며 다독여보는 나였지만, 어째 할머니보다 내가 더 긴장했나 보다. 오히려, 날 다독여 주는 외할머니였다. 자식들이 살라고 이렇게 입원시켜 주고, 현아 너도 보내줬는데, 시술 잘 받아야 되지 않냐면서. 나보다 더 강인한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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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술을 마치고, 외할머니가 퇴원하던 날 인자한 웃음 뒤에 고통을 애써 숨기는 그 입꼬리가 도무지 아른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그저 괜찮겠지. 이겨내실 거야 하며 억지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조금만 더 입원해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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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끝으로 외할머니는 우리와 작별했다. 영영 볼 수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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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몰아쳤다. 울고 울어도 눈물은 쉴 틈 없이 흘렀고, 불러도 대답 없는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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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불쌍했다. 안타까웠고. 엄마를 잃은 슬픔에 공감해주지 못한 내가 미웠다. 아직도 엄마의 말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이제, 엄마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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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위로, 아련한 웃음과 애써 즐거운 분위기로 그렇게 외할머니를 모셨다. 이전과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은 반복되고 있고 나도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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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할머니가 생각날 때면 일하다가도 눈물이 맺힌다. 다시 볼 수 없는 그 얼굴이, 계속 아른거려 눈시울이 붉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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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외할머니를 추억하며, 병실에 함께 있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현아가 있어서 할머니는 참 호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