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다시 태어나면 혼자 살아”
남편은 나에게 한줄기 축복 같은 존재다. 이 사람과 결혼해서 이렇게 마음 편하고 행복한 거 보면 혼자 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좋은 사람을 만나 딸을 낳았고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이 탄생했다. 마치 신이 주신 선물이다. 결혼하면 ‘너의 삶에 안정과 평온만이 주어질 거야’라는 주문을 내게 부여하신 느낌이다. 아이 키우는 일은 원래 어려운 것이니 가볍게 패스하겠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다음 생에는 남편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혼자서 맘껏 자유롭게 살아보라 허하고 싶다. 만일 우연이라도 마주친다면 모른 채 지나가 주겠다 싶을 만큼.
나중에 백발 할머니가 되어 남편에게 받은 사랑을 어느 정도 되돌려줬다 생각되면 한번 물어봐야지
“나랑 결혼해서 행복했어?”라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나 자신에게 한 점 후회가 없을 만큼 큰 소리로 떳떳이 물어보았으면 좋겠다.
남편은 채 결혼할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순간을 맞았다. 나라고 다를까. 남편을 만난 건 2007년 하늘이 열린 개천절 어느 낮 시간이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날 회사 친구의 소개였다. 항상 소개를 받으면 두 번 만남은 없었다. 큰맘 먹고 세 번은 만나보겠노라 친구들과의 약속과 스스로의 다짐을 안고 소개팅에 나갔다.
첫인상 나쁘지 않았다. 대화를 해보니 소개해준 친구가 간식거리로 등장하며 이야기가 편안하게 흘렀다. 호수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과 수다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이 멀고 차가 없는 나를 데려다 주겠다는 남편을 사양하지 않았다. 차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예고를 들으며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콩깍지가 씌려고 했는지 당시 ‘엘란트라‘가 꽤 멀쩡해 보였다. 어두운 조명 탓이었다. 물욕이 없어 보이는 쿨 함이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앞까지 데려다주고 담에 또 기회 되면 보자는 인사치레를 하고 헤어졌다.
두 번째 만남은 시내 극장 데이트였다. 그때 남편의 차 상태가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앞 범퍼가 많이 찌그러진 상태를. 가족들 특히 어머님이 걱정을 많이 하신단다. 차 얼른 바꾸라고. 본인은 이 차가 내부 부품이 너무 좋아서 마음에 든다고 괜찮다고 했다. 뭐 내차 아니니까. 찌그러진 차는 남편 형님께서 새 차를 바꾸셔서 원래 타던 차를 남편에게 하사하시며 운명을 다했다. 차를 주차하고 극장까지 걸어가며 남편이 물었다.
“생일이 언제예요?”
“음력 12월 20일이요”
“정말요? 저도 생일이 음력 12월 20일이에요”
대박. 나이도 같고 생일도 같은 외사촌이 한명 있는데 또? 신기했다.
울 엄마 말씀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생일이 같으셨다 했다. 두 분이 그렇게 금실이 좋고 사이가 좋으셨다고. 그래서 너네도 이렇게 사이좋게 잘 사나 보다 두고두고 이야기하신다. 사이좋게 잘 사는 건 좋으나 약간의 단점도 있다. 둘의 생일을 너무 대충 챙기게 된다는 것이다.
무튼 생일이 같은 사람을 만나 신기했다. 다음번 만남은 둘 다 아는 언니네 집에서 얼떨결에 이루어졌다. 정신 차려 돌아보니 어느덧 5번째 만남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누군가를 꾸준히 만나다니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때까지 나는 모태솔로였다. 인연인 걸까?
우리 둘이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계기가 생겼다. 당시 연말이라 지리산 자락에서 열린 송년회에 참석했다 밤이 돼서야 사는 지역에 도착했다. 서로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던 때라 남편이 나를 데리러 나와 주었다. 버스에 내려 남편 차로 갈아타고 출발하는데 마침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출발한 지 1분이 채 안됐을 무렵 쾅하는 충격에 나는 바로 의식을 잃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없다.
달려오던 차가 우리 차를 친 것이다. 충격에 차는 빙글빙글 돌아 반대편 차선에 서있었단다. 정말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그 일로 둘은 나란히 병원에 12일간 입원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교통사고 입원환자가 병원에서 할 거라곤 검사와 치료, 누워있는 것 외엔 없다.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진 탓에 병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야기하고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급속도로 정이 들었다. 만나서 6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는데, 우리 아버지의 말씀이 큰 영향을 끼쳤다. 퇴원하고 식구들과의 식사자리에서 “결혼은 언제 할 건가?”라는 말씀에 “빨리 하겠습니다”라고 답하곤 서둘러 결혼 준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오빠 그때 그렇게 결혼 안 했으면 아마 지금도 혼자일 거야”라고 가끔 농담을 던지곤 하지만 나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성장 과정 중 부모로 받은 사랑으로 우리 몸에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이 내재되어 있어요. 자식을 낳으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대뇌의 신경 세포와 신경 전달 물질이 자식을 사랑할 준비가 시작돼요. 자식의 생존과 건강과 성장을 돕는 부모가 되죠"
-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정호근 편 -
부성애가 생겨 책임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15년의 결혼생활 남편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었을까. 처음 하는 외동딸 육아에 정신적인 지주 노릇을 남편이 해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내 교육철학을 지금처럼 단단히 뿌리내리며 올 수 있었을까. 남편의 도움이 없었다면 많이 흔들렸을 테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때마다 늘 남편이 옆에 있었다. 이게 맞다 확신을 계속 심어주었다. 조바심을 계속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아이의 눈빛을 보고 그 속도에 맞출 수 있었다. 육아는 20년이 아닌 평생이니까. 아이와 나의 연결은 평생이니 급할 게 하나도 없다. 그걸 남편이 항상 짚어주었다.
“엄마. 엄마 아빠는 나이 들어도 지금처럼 재미있게 살 것 같아”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오래오래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우리에게 긴 시간이 주어져 오래오래 사랑하며 아끼며 살 수 있기를. 나의 소중한 가족에게 더 많이 사랑해주고 표현하며 살 수 있기를. 남편에게 짊어줬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아빠로서의 무게를 덜어주고 싶다. 한번쯤은 남편이 자유롭게 살게 도울 수 있기를. 그런 준비를 해나가는 요즘이다.
봄날을 맞은 남편이 씩 웃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