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세계여행(아르헨티나)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계획하는 걸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집착했다. 학생 때는 공부하는 시간보다 스케줄 짜는 시간이 더 걸리기도 했다. 이런 성격 탓에‘계획 없이’, ‘목표 없이’ 행동하는 것들을 병적으로 싫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친구들끼리 만나서 뭘 할지 몰라서 ‘무작정 걷는다’던가, ‘일단 만나서 생각’한다던가 하는 행위를 너무 싫어했다. 또 지켜지지 않는 계획들이 있으면 나 자신을 매섭게 질책하고 자책했다. 그래서 언제나 계획이 틀어지는 스트레스는 나와 가장 오래 함께한 스트레스였다.
당연히 이런 성격 때문에 세계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한 달에 걸쳐 약 1년간의 여행 계획을 짰다. 각 나라별 체류일 수, 예상 도착 날짜, 해야 할 액티비티와 정보들을 찾고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계여행의 첫 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내 ‘완벽한 계획’ 엑셀 파일 안에 스카이다이빙이라는 버킷리스트가 들어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맑은 하늘에서 자유롭게 낙하하는 스카이다이빙은 내가 꼭 이루어야 할 계획 중 하나였다.
‘날씨가 왜 이래’
그런데 막상 도착한 나의 세계일주의 첫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날씨가 꿀꿀했다. 아니 오히려 그 당시 아르헨티나의 상황이 오버랩이 돼서 울적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 보던 활기찬 여행의 시작은 어디에도 없었다. 먹구름 낀 하늘은 어떤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그 안에 들어있는 나까지 우울해 보이게 만들었다.
결국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예약한 스카이다이빙 업체에서 못 할 것 같다는 메일을 받았다. 아무리 계획적이라고 해도 기상악화까지 예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정된 여행 일자안에는 뛸 수 있겠지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하는 날이 다가와도 날씨가 좋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스카이다이빙을 위해 조금 더 머무르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세계여행 처음부터 계획을 바꿔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사로잡혔다. 또 한편으로 아르헨티나의 날씨를 생각해서 조금 더 넉넉하게 계획을 짰으면 어땠을까 자책성 후회도 남았다. 마지막 날, 나는 끝내 예정되어있던 스카이다이빙을 포기하고 탱고의 탄생지 La boca지구를 방문했다. 길거리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탱고를 추는 남녀와 음식점마다 하는 탱고 공연들을 보며 스카이다이빙을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그렇게 한 가게 앞을 저벅저벅 지나가는데, 가게에 걸린 한 포스터를 보았다. 나중에야 그 포스터가 알 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 포스터라는 걸 알았지만,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강렬한 탱고를 추는 한쌍의 커플이 아니라 그 밑에 적혀 있던 문구였다.
“If you make a mistake, if you get all tangled up, you just tango on”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 라오”
‘스텝이 엉켰는데 탱고라니?’
한 가게에 들어가 앉아 찾아보니 탱고는 즉흥성이 가장 큰 춤이라고 한다.
탱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정착한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삶의 고충을 담아 만든 춤답게 즉흥적으로 커플이 합을 맞춰가며 추는 춤이다. 이런 즉흥성 덕분에 탱고에선 스텝이 엉켰다고 해서 멈추고, 고치지 않는다. 탱고를 추는 커플은 엉킨 스텝마저 자기들의 탱고로 여긴다. 엉킨 스텝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며 그게 자신들만의 탱고가 되어 춤사위를 이어간다.
‘자신만의 탱고’
나는 왜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살았을까, 틀어진 계획과 못 이룬 목표들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나는, 그것 마저도 ‘나만의 인생’인 것을, ‘나만의 탱고’인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실수투성이라도 결국 나만의 고유한 ‘탱고’인 것을 말이다. 파편처럼 휘날리는 나의 틀어진 계획들을 두고 이것마저 잘했다고, 이것 또한 ‘나’라고 사랑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텐데. 그 실수마저 잘했다고 응원해줬을 텐데.
그날 밤 La boca 지구에서 숙소에 돌아와 게스트하우스 테이블에 앉아 다시 메일을 보냈다.
“나 버스 취소했어, 언제든 스카이다이빙을 할 수 있다면 알려줘”
“이틀 후면 가능할 것 같아. 예약해줄까?”
“응 부탁해”
계획에 없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추가 숙박을 마치고 마지막 날 드디어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갔다. 무섭게 흔들리는 경비행기 안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받아왔던 스트레스는 없어지고 아드레날린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Are you ready?(준비됐어?) 3 2 1! Vamos!(가자)’
이내 경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나는 몇 천 피트 상공에 내던져졌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들과 거센 바람, 터질 것 같은 내 심장이 자연스럽게 ‘잘했구나’를 느끼고 있었다. 빠른 낙하는 순식간에 끝이 나고 곧 낙하산이 펼쳐졌다.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며 아르헨티나의 푸른 하늘과 뻥 뚫린 초원을 보며 나도 이제 엉킨 스텝 또한 사랑할 수 있음을 짐작했다.
‘그래 계획은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어, 그리고 틀어진 계획도 나만의 탱고야'
“실수를 해서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 라오
(If you make a mistake, if you get all tangled up, you just tango on)”
-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가 도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