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한국 문학을 찾으러 나서기까지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by 하츠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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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국어에서 문학 문제들이란 출제자들이 문학 작품을 토막 내어 쓸 만한 부분을 골라 그 앞뒤에 최소한의 맥락만 대충 붙여준 뒤 시험지의 사각 공간에 쑤셔넣고 하나의 지문으로 삼아 제조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날마다 달라지는 나의 기분과 내가 공부를 위해 선택한 문제지 또는 시험지에 따라 수준 높은 전문 요리사가 유서 깊은 엄격한 레시피에 따라 만든 아름다운 어떤 고기 부위의 요리 같기도 했고 모험 삼아 들어간 동네 식당에서 받은 그럭저럭 맛없는 음식 같기도 했고 미(美)와 예(禮)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천박한 변태가 사람(아니면 그냥 동물)의 사지를 절단한 뒤 그 절단면들에 크기에 전혀 맞지 않는 싸구려 피규어의 하찮은 팔다리를 대충 쑤셔 박고 통째로 수조에 던져넣고 거기에 포르말린을 부어 만들어진 더럽고 유감스럽고 비극적이고 처참한 박제 같기도 했다.

작년 2월쯤 나는 정자동의 독서실에서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고, 수능 국어 영역의 문학에 대한 문제들에 대한 강의에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은 문제의 선지에서 나올 일이 거의 없고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답일 일은 없을 것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마라'라고 하였는데, 짧은 인생의 절반 동안 그것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고 나머지 절반 동안은 그것이 단순히 인터넷의 뻘글과 같은 인간의 추상적 배설물들의 구조와 형식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정의라고 착각했던 나는 그때 비로소 의식의 흐름 기법이 기묘한 문학적 기법의 일종이고 또 일종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당시에도 나는 그것이 어째서 출제자들의 조리실(또는 처참한 박제로 가득한 변태의 지하실)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없는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그때까지 의식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직접 조우해본 적은 없었던지라 그 짐작은 의식의 흐름 작품의 조각이 수조에 처박히는 표상이 생성되는 데까지는 어림잡아 닿았으나 수조에 처박힌 조각에 대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표상이 생성되는 데까지는 닿지 못했다.

한 해 동안 수많은 식당들과 수많은 천박한 변태들의 토막 박제 전시회들과 소수의 맛집들을 방문하면서 생긴 한국 문학에 대한 흥미는 수능이 끝난 뒤다른 수많은 매력적인 책들에 대한 생각으로 포화된 나의 뇌내 독서 코너에서 끊임없이 밀려나 뇌내 절벽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버려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무의식 중에 분해되어버렸다. 한국 문학도 의식의 흐름도 사이좋게 사라져버렸는데, 사실 의식의 흐름은 애초에 일찍부터 잊힌 상태였기 때문에(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걸 의식적으로 기억할 이유는 없었고, 당연히 그 어떤 시험지에서도 지문으로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우할 일도 전혀 없었다) ‘사라짐’이라는 변화를 겪은 건 한국 문학뿐이었다.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의 부활은 문학에 대한 관심의 부활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문학에 대한 관심의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글에서 다루고 싶고, 대신 그냥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의 부활이 앞서 부활한 문학에 대한 관심 위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내가 세계의 훌륭한 문학들의 한글 번역본과 영어 번역본의 가격과 크기와 무게와 재질과 표지 디자인과 주문 후 배송에 걸리는 시간과 지하철에서 그것을 꺼냈을 때 불특정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와 카페에서 그것을 꺼냈을 때 불특정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등 따위를 하나씩 비교하면서였다.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된 번역서가 가격과 배송에 걸리는 시간 정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면에서 한글 번역서보다 우월해 보였으며 위에서 나열하지 않은 비교 속성 중 영어 번역서가 한글 번역서보다 우월한 점은 영어가 서양 언어들의 원본의 어감을 동양 언어인 한글보다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긍정적인 추측을 제공한다는 점과 내가 영어에 익숙해지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었고 우월하지 못한 점은 내가 영문을 읽는 데 걸리는 속도가 어쩔 수 없이 한글로 된 글을 읽는 속도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는데,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취미뿐만 아니라 일생에 있어서 무엇을 할 것이든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유익하다는 점 때문에 나는 곧 같잖으나 완전히 떼어버릴 수는 없는 인간 사고의 근본적인 부분 어딘가에 뿌리를 박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증스러운 효율론을 독서라는 취미에 필연적으로 갖다 붙이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이 생각해봤을 한글 번역본에 대한 회의론을 뇌내 한쪽 구석 잡동사니 서랍에서 꺼내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한글 번역본에 대한 회의론은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영어가 모국어인 인간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시간적 이득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현재의 우습고 비극적인 열등감과 패배감과 노력 끝에 훌륭한 바이링구얼이 되어 느낄 수도 있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 우월감 사이 무언가를 상상하며 그 인간들보다 내가 더 잘 즐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비굴하고 소극적으로 생각해보니 그것은 애초에 한국어로 탄생하여 번역된다면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로밖에 번역될 수 없는 한국어 작품들이었다.

자국의 것들에 대한 의식적인 무시 또는 의식적인 경멸 또는 무의식적인 반감 때문에 읽을 종이뭉치를 종이뭉치 가게 또는 종이뭉치 판매 웹사이트에서 찾거나 고를 때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한국 작가의 것들은 배제하고 아예 선택지에 두지조차 않아왔던 나는 수능에서 만난 한국 근대 문학의 토막들을 통해 일차적인 부정적 편견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었지만 근대가 아닌 현대의 한국 문학들의 것까지 떨쳐내지는 못했고 인터넷에서 보아온 현대 한국 문학이라는 모호한 범위에 붙은 수많은 부정적 딱지들과 내가 중학생 때 도서관에서 훑어보았던 불쾌한 (그것을 책이라고 취급해준다면) 몇 권 또는 (그것을 책이라고 취급해주지 않는다면) 몇 개의 덩어리의 현대 한국 불쏘시개들의 기억이 내가 나의 돈을 투자하여 현대 한국 문학이라는 그 질이 불확실한 세계에 입문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 선택인지에 대해 의심을 갖도록 하였다.


그것의 전문이 사실 나무위키에 단정하고 조신하게 실려 있음을 전혀 몰랐던 채 ‘달려라 메로스’를 읽으려고 구매했던 다자이 오사무 선집을 다 읽지도 않은 채 책장에 처박아두고(그 책에 가장 처음으로 실려 있던 ‘후지산 백경’을 다 읽고 내가 다자이 오사무의 스타일과 전혀 맞지 않음을 느꼈고, 돈이 좀 아깝긴 했지만 재미없는 책을 굳이 붙잡고 굳이 고통받으며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같은 날 구매한 “금각사"를 새벽마다 조금씩 읽으며 탐미주의라는 것이 이러한 것인가 하고 금각의 소멸가능성에 대한 주인공의 환희를 우물거리며 맛보고 있을 때가 6월 초였다. 그때는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문학에 대한 관심이 석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고 나는 문학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기에 서울국제도서전에 몹시 가보고 싶었고, 실제로 가보고자 했지만, 결국 가지 못했다. 일정도 따로 없고 시험공부도 딱히 제대로 하지 않았던 내가 왜 가지 못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지 못했기에 도서전이 끝난 날에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마치 내가 도서전에 갔다면 책을 사는 데 썼을 돈을 도서전에 가지 못했으니 대신 이렇게 써도 된다는 것처럼 언제나 그렇듯 교보문고에 들어가 장바구니 목록 중에서 무슨 책을 살지 고민하다가 평소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교보문고 이벤트를 하나 발견했다.

그건 도서전에서 얻을 수 있었던 한정판 책자 “반걸음"을 주는 이벤트였는데, 이벤트 대상 도서 목록에서 두 권 이상 구매하면 그 책자를 1500원에 껴서 구매할 수 있었다. 독서 갤러리에서 도서전 방문 후기를 여럿 봤기에 그 목록에 있는 책들이 이번 도서전에 있었던 책들임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내가 도서전에 갔다면 관심을 갖고 샀을 법한 책들을 고르기로 생각하고 조금 좋아진 기분으로 그 목록을 쭉 보았으나 슬프게도 내가 정말로 관심을 가졌을 것 같은 책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애초에 이 이벤트를 보지도 않았겠지만 이 이벤트를 어쩌다가 발견했고 목록만 한 번 슥 봤다는 가정 하에서, 평소라면) 이쯤에서 털고 일어났겠지만 그날은 왠지 그 책자가 도서전의 상징 비스무리한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인지 그래서는 아닌지 그 책자가 몹시 가지고 싶었고, ‘새로운 경험’이라는 — 왠지 무언가가 하기 싫다고 호소하는 아이를 달래야 하는 짜증나는 어른이 쓸 것 같은 느낌의 — 만능 명목이 있다면 그닥 관심이 가지 않는 책도 거침없이 사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바보 같은 기분이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관심 등급’ B 미만의 상품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소거법으로 설명만 봐도 불쏘시개일 것 같은 것들과 정말 재미없을 것 같은 것들을 걸러내고, 남은 것들 중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것 둘을 골라 겨우 결제 버튼을 눌렀는데, 그렇게 고른 둘은 콜슨 화이트헤드라는 사람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와 이경희라는 사람의 “모래도시 속 인형들"이었다. 전자는 번역되어 들어온 외국 문학이라는 데서 제공받은 일차적 신뢰감과 도서 설명에서 느낀 이차적 안심을 바탕으로 정한 놈이었고, 후자는 거의 순수히 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중 소거법으로 정해진 놈이었다. 물론 도서 설명에서 관심 등급 감점 요인이 딱히 없던 것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주문한 다음날 도착한 택배를 개봉해 (책자를 포함한) 책 세 권 중 하나라도 내가 바로 읽기 시작하는 일은 없었다. 지대한 관심을 갖고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구한 “반걸음"마저도 결국 기숙사 책상의 책더미 속에 묻혀버렸고, 종강 후 집에 온 지금까지도 “반걸음"과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아직 단 한 페이지조차 읽히지 않은 채 책장에 잠들어 있다. 결국 “모래도시 속 인형들"은 다 읽긴 했지만, 이때는 아니었고, 이때는 다른 둘과 함께 책더미에 묻혀 있었다. 어떠한 경위로든 나의 소유가 된 관심 등급 B 미만의 책들에게 일어나는 필연적인 일이고, 그렇기에 나는 평소에는 관심 등급 B 미만의 책을 절대 구매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순간적인 충동으로 어쩔 수 없이 구매해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고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예외가 있지는 않았다.

‘내가 제대로 읽은 첫 한국 문학’이라는 위대하고 하찮은 타이틀을 획득한 것은 “모래도시 속 인형들"이 아니라 사흘 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와 함께 구입한 “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이걸 구입한 이유는 첫 번째로는 가격이 5500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수상한 작품들이라면 어느 정도 검증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기 때문이고, 세 번째로는 사실 한국의 심사위원들에 대한 신뢰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국내에서 수상한 작품들이라고 검증되어 있을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냥 수상 기준이 몹시 의심되어 그 수상작들을 직접 읽어보고 독붕이들의 평가장에 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었으면 사지 않았겠지만 장르가 SF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사실 SF 소설은 읽어본 적도 없고 감상한 SF는 영화밖에 없지만) 최소한의 친밀감을 느꼈다는 것이 네 번째 이유였다. 검증된 명작만 읽으려고 하다가 검증되지 않은 소설을 구매해보고 자신이 읽은 것을 비평(특히 부정적으로 비판)해보기로 결심한 것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추구의 일부였는데,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던 것이, 비평은 이미 여러 만화들을 대상으로 행한 적이 있고 계속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어느 정도 새로운 경험이기는 했던 것이, 어중간한 소설들은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본 적이 아직 없기 때문이었다.

그 작품집의 두 편의 단편에서 익숙한 구린내를, 두 편의 단편에서 예상 못한 아름다운 향기를, 나머지 두 편의 단편에서 저렴한 패스트푸드의 냄새를 느낀 후 나는 현대 한국 문학이 내가 생각하는 세기말 쓰레기장의 풍경과 달리 나쁘지 않은 것들이 꽤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수많은 한국 작가들 중에서 내가 계속 좋아할 수 있고 계속해서 내는 신간들을 바로바로 구입해서 즐길 수 있는 동시대의 작가가 있을 것 같았다. 이전에 내가 알고 내가 읽으려고 했던 검증된 명작들은 대부분 이미 시간에 휩쓸려 사라져 이제는 그림과 사진과 활자와 말로만 그 존재를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는 껍데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사람들의 것이었는데, 그들이 남긴 작품을 주워 읽을 때 대부분의 시간에는 즐거움을 느꼈지만 아주 가끔, 아주 가끔 묘비에 새겨진 글을 읽는 것 같았고,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이미 죽고 떠난 이가 남긴 시체를 뒤늦게 발견하여 뒤늦게 부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나의 모국어가 한국어라는 점이 가진 강점을 어떻게든 살려보기 위해서였는데, 그렇다면 내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은 어떠한가? 이미 떠난 이들의 시대를 떠돌며 이미 떠난 이들의 발길만 따라다니다 정작 나의 시대를 놓쳐버린다면, 나의 시대였던 때에 나왔던, 그리고 더 이상 나의 시대가 아닌 때에 명작으로 정해진 작품들을 나의 시대라고 하기에는 늦어버린 때에 뒤늦게 보며 뒤늦게 후회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는 관점의 차이가 확실히 있지만, 일단 나는 동시대에 실시간으로 나오는 작품들을 실시간으로 구하여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것이 자신의 시대를 즐기는 고전적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SF 작품집을 다 읽은 뒤 나는 동시대 한국 작품에 대한 탐구심이 무럭무럭 자라났고, 사놓기만 했던 “모래도시 속 인형들"을 다 읽었고, 거기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느낀 뒤, 앞으로 정말로 동시대 한국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을 항해하며 나의 섬을 발견해내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왜 굳이 좋아하는 작가를 찾아야 한다고 느꼈는지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글에서 다루고 싶다…)


국내 출판사 중에서 ‘힙한' 디자인을 대표한다고 내가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워크룸프레스의 ‘힙한’ 디자인의 책들에 관심을 가진 지는 사실 2년 정도가 지났지만, 그들의 출판물을 사고자 출판물 목록을 보면 당장 살 수 있는 것이 없어 슬프게도 그동안 아무것도 살 수가 없었다. 관심 등급이 A 미만이었던 책들에 대해 말하자면, 읽지도 않을 책을 표지만 보고 살 수는 없었고, 있다고 해도 외관 감상용 또는 책장 장식용의 종이 조형물을 사는 데 쓸 돈으로는 더 큰 효용을 얻는 방법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관심 등급이 A 이상이었던 책들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워크룸프레스에서 낸 수많은 예술 관련 책들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나는 예술에 대해 거의 무지했기 때문에 그것들에 접근하고 싶다면 먼저 서양미술사부터 시작해서 동시대 미술에 대한 수많은 배경지식을 먼저 두루 갖추고 와야 할 것 같다는 혼자만의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 관심을 가진 때로부터 2년 정도 동안 다양한 것을 접하고 경험하고자 하고 실제로 경험하고 그러한 것들을 통해 동시대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을 얻어 온 나는 드디어 워크룸프레스에서 직접 살 것을, 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을 (아직 구입한 건 아니었고 그냥 관념적으로) 가질 수 있었다.

현대 한국 문학은 전혀 읽지 않았지만 묵은지 또는 겉절이로 불리는 한국 문학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독서 갤러리에서 드문드문 본 바가 있어 나는 몇 명의 겉절이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중에는 ‘정영문'이라는 이름과 “어떤 작위의 세계'라는 작품명도 있었는데, 물론 그러한 이름을 가진 작가와 작품이 있다는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어떤 작가인지, 그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동시대 한국 문학의 해안에 조각배를 이제 막 띄운 나는 어디부터 가볼지 고민하며 독갤을 둘러보았고, 거기서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보이는 작가명을 여럿 추려보았고, 거기서 나름의 생각을 몇 번 한 끝에 내 첫 목적지는 정영문 또는 정지돈이 될 것이 되었다. 정확히는, “어떤 작위의 세계”,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스크롤!”, “내가 싸우듯이" 중 하나가 될 것이 되었다. 넷이 어떻게 추려졌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작위의 세계”는 독갤에서 정영문의 대표작이자 현대 한국 문학의 아이콘들 중 하나인 것으로 보였고, “…스크롤!”은 정지돈의 최신작이자 최신 독갤 떡밥 중 하나의 주인공였고, “내가 싸우듯이"는 여러 독붕이들이 그 정지돈의 대표작이라고 하였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는 그 정영문의 작품이자 워크룸프레스였다.

워크룸프레스가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읽을 책을 고를 때 어떤 책의 내용이 꽤 마음에 들 것으로 추정됨에도 표지의 디자인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면 구매의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로 책의 물성을 중요시하는 속물이고, 나에게 있어서 독서는 표면상으로는 단순히 취미일 뿐이기 때문에 내가 도서에 대해서 속물이라는 사실이 별로 부끄럽지는 않다. 물성도 출판물의 속성이자 훌륭한 감상 대상, 비평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끔찍한 표지를 디자인한 사람들은 디자인의 대상이 책이라는 이유로 표지도 책의 엄연한 일부라는 점을 망각한 대중에게 부당한 면죄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재의 안타까운 실태이니 이제 진실을 깨달은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돌을 던져야 한다.

아무튼 썩어빠진 속물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를 골랐다. 사실, 워크룸프레스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더 큰 이유는 제목이었다. 한국 작가가 쓴 사무라이에 대한 소설이라니 어떤 모습일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고, 거기에다가 일반 사무라이도 아니고 무려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무라이라니 어떤 모습일지 더더욱 상상이 되지 않았고, 거기에다가 일반 사무라이도 아니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한두 명의 사무라이도 아니고 무려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라니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무라이의 수가 너무 많아 대체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일곱 명이나 되는 사무라이가 수재(水災)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한 번에 강물에 떠내려갈 수 있는지 정말로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실 제목만으로는 7인의 사무라이들이 한 번에 떠내려가는지, 각자 따로 떠내려가는지, 통나무처럼 힘없이 떠내려가는지, 생사의 경계에 놓여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는지(어쩌면 일곱 중 몇 명은 이미 싸늘해져 있고 몇 명은 곧 싸늘해질지도 몰랐다)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대체 무슨 내용일지 전혀 추측할 수 없음은 다르지 않았다. 아마 내가 책을 사기 전에 도서 정보를 읽거나 정영문이라는 작가에 대해 정말 조금이라도 알아봤다면 이 정도로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겠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나는 흔치 않게도 범람하는 추측의 혼란 속에서 설렘을 느꼈다. 조각배를 띄우고 이제 막 첫 섬에 도착한 뉴비 항해사에게 이 설렘은 정말 소중했다.

내 첫 워크룸프레스 출판물은 지난주 토요일, 즉 6월 18일에 도착했다. 아직 기말 기간의 중간이었고, 그날 나는 다음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있을 두 시험을 준비해야 했으나, 그날 오후 1시에 기상하여 여름의 밝은 햇빛과 나른한 인사를 나눈 내가 그렇게 성실하게 공부할 리는 안타깝게도 당연히 없었고, 자는 동안 왔던 택배 도착 문자를 발견해서 기숙사 건물의 택배보관실에서 사랑스러운 교보문고 상자를 찾아 방에 가져와 개봉하자 내 눈 앞에 나타난 내 첫 워크룸프레스 출판물이자 여정의 첫 섬인 책에 홀려 심적인 불가항력에 의해 그 책을 그날 펼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이 글이 의식의 흐름—수능 국어 문학 문제의 선지에서 나올 일이 거의 없고 나온다 하더라도 답일 일은 없을 것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그것—으로 쓰인 글임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기에, 정영문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았고 도서 정보도 읽어보지 않았기에, 정말 기이하게 느껴지는 조우였다. 처음 산 동시대 한국 문학이 의식의 흐름인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그건 별 상관 없었지만 이 방식이라면 어디서든 7인의 사무라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7인의 사무라이가 강물에 떠내려가기까지의 기발한 개연성을 기대했던 나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의식의 흐름과의 조우는 정말 기이했고 의식의 흐름 자체도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의 눈에는 몹시 기이해 보여서 정영문의 의식이 어떻게 7인의 사무라이까지 도달하는지 기이한 마음으로 쭉 읽어보기로 했다.


짧은 소감: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는 흥미롭지 않은 내용이 담긴다면(대상이 흥미로워야 하고 대상이 흥미롭지 않다면 그 대상을 보거나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로워야 한다) 중간에 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흥미의 흐름이 끊겨버리기 때문에 재미있는 의식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만들고자 한다면(나는 의식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글이 실제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마치 우리가 정어리 통조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듯 또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듯 아는 바가 없다) 소재의 선정과 연결이 몹시 어려울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나는 행주에 새겨진 고양이 펠리세트와 캡슐 들소 테마파크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느꼈으나 빈 스케이트장의 발레리나에 대해서는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후자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는 흥미의 흐름이 끊긴 채 반쯤 의무감만으로 글을 이어 읽어나갔다. 게다가 발레리나가 나올 때는 이미 사무라이들이 출연한 뒤였기 때문에 볼 거 다 봤다는 기분이기도 해서 흥미가 더더욱 부족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 의무감에 최고의 보상을 해주었기에 이 점은 정말로 용서할 수 있다. 마지막 문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데, 그것도 의식의 흐름이었을까.

또한 의미가 있는 부분과 거의 없는 부분의 차이가 저자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가시적이기 때문에 재밌는 의식의 흐름을 만들고자 한다면 무의미한 말들의 연속으로 보이는 글에 실제로 무의미한 말은 전혀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 정말로 의식의 흐름에 들어있을 만한 의식의 것들만이 들어있어야 할 것 같았다. 무의미한 말의 나열은 우리 인간의 실제 의식 속에서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튀어오르고 직후 동시다발적으로 다시 수면 밑으로 잠겨 사라져버리기에 읽는 순서와 시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글로 그것을 그대로 나열해버리면 의식의 ‘흐름’으로 전혀 보이지 않고 몹시 어색하고 재미없을 뿐이었다. 말만 무심해 보이는 ‘의식의 흐름’이지 실제로는 사고(思考)를 글의 형태로 옮기기 위해 굉장히 많은 요소들을 점검하고 고심해야 하는 것 으로 보인다. 날로 먹는 재미는 역시 있을 수 없는 건가.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곱씹어 보면 인상 깊은 7인의 사무라이의 등장에는 의식의 흐름에 있어서 약간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불량 만년필의 촉에 있는 것과 같은 단차가 존재하고 그렇기에 정영문의 진실한 의식의 흐름 속에 정말로 무의미한 싸움을 반복하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가 존재했을지, 사실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는 실제 흐름과는 전혀 무관했지만 자극적이고 이목을 끄는 제목을 위해 별개로 삽입됐을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나 어쨌든 무의미한 싸움을 반복하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한 내용이 담긴 이 글을 집필하기 위해서는 무의미한 싸움을 반복하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해 생각해야 했을 것이며 그 생각 또한 일생의 거대한 의식의 흐름 속에 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7인의 사무라이 또한 의식의 흐름에 있었으며 의식의 흐름에 있었다고 취급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봐도 될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 의식의 흐름은 메타적인 것이고 작품에 담긴 의식의 흐름과는 별개인가? 하지만 나는 정영문이 작품에 담긴 것만을 감상하기를 의도했는지 작품을 쓰는 자신의 의식의 흐름까지 상상해보기를 의도했는지 둘 다 의도했는지 둘 다 의도하지 않았는지 어찌 되든 상관 없었는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냥 대충 적당히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의식의 흐름을 처음 접하는 것이라 굉장히 재밌게 읽었지만 이 책이 정영문의 다른 작품들을 바로 구매하여 읽어보는 행동을 유도하는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글의 맛은 마음에 들었으나, 이러한 맛을 연속해서 먹으면 이 맛의 싱싱한 즐거움이 퇴색될 것 같은 느낌이다. 시간적 간격을 두고 먹는 것이 이런 류의 글들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좋아하는 작가에 정영문이 추가돼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아직 그의 작품은 하나밖에 접해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고, 내 조각배 모험은 이제 막 첫 섬을 둘러본 후일 뿐이고, 아직 읽어볼 책은 정영문의 다른 책을 포함해서 매우 매우 많다. 그리고 조각배 모험을 하는 동안 동시대 한국 문학만 읽을 것은 아니고 비문학 도서와 외국 문학과 묘비의 글도 계속 읽을 것이고, 어쩌면 종교적 불쏘시개와도 조우할 일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모험은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글이 다 완성된 이 시간쯤에는 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영문이 꿈속에서 나의 이러한 모습을 발견한다면 아마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7인의 사무라이 역시도 강물에 떠내려가면서도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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