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학생의 낡은 생각.
쌀쌀한 늦가을, 나는 수능을 치루었다. 치뤘다기 보다는 그냥 봤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집에 돌아와 가채점을 시작했다. 시작은 자신있는 언어영역부터. 그래! 35번까지 모두 맞았다! 느낌이 좋다. 느낌이... 느낌... 아...... 늦가을에 맞는 비는 정말 차가웠다.
용기가 없던 난 결국 재수를 택하지 않았다. 대학원서 마감당일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원서를 넣었다. 그런데 이런 대학들이 있었나...? '바보. 이제 네가 갈 곳이야. '
지도상 위치는 경기도. 그리고 바로 아래 충청도가 보이는 지역. 남들이 흔히 말하는 지방대에 난 입학했다. 태어나서 듣도 보도 못한 광고홍보학과에 말이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뭐하는 곳인 지는 알아야한단 마음으로 다녔다. 나름 대화를 튼 동기들도 생겼다. 동기들 권유에 신입생 환영회에 같이 참석했다. 어느 고깃집, 상 위에는 소주와 맥주, 그리고 점잖게 앉아있는 동기들. 눈치 없는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왼쪽에 2학년 선배들이 보인다. 짙은 화장, 짧은 치마, 쉴틈없이 난무하는 욕들.
'뭐야, 완전 양아치잖아?'
슬픈 예상은 매번 보기좋게 들어맞는다. 모두 술을 엄청 좋아한다. 왠지 이 사람들은 물대신 소주를 마실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첫 학기는 술과 친목으로 보냈다. 덕분에(?) 학사경고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2학기가 시작되었다. 방학 동안 나름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과제도 열심히 제출하고 출석도 열심히 했다. 그래도 아직 광고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반복했다.
' 조금 배워보니까 관심은 가는데 말이지... '
학술제가 시작되었다. 광고학도답게 경쟁PT를 해야한단다. 저번 학기 꼴찌였던 나는 뭣도 모르고 경쟁PT에 지원했다. 그런데 다들 나를 조금씩 기피했다. 역시나 눈치 없는 나는 기분 탓이려니 했다. 우리 조는 1학년 2명, 2학년 2명, 3학년 1명으로 편성되었다. 어?! 나랑 친한 2학년 '형'이 같은 조에 있었다. 마치 금요일 저녁에 아는 사람 만난 기분이랄까.
그런데 PT준비를 하면 할수록 재밌었다. 같이 웃고 떠드는 회의가 재밌었던 게 아니다. 3학년 '선배'가 홀로 하드캐리(?)를 하는 과정 눈길을 끌었다. 1학년 수업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PPT스킬과 기획력을 맘껏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아무 것도 안하던 나는 '선배'의 PPT제작을 구경하느라 학술제 당일날 밤을 샜다. 그 충격을 받은 이후 내가 놀랍도록 달라졌다는 사실은...... 뭐 만화에서도 자주 나오는 레퍼토리다.
그 뒤로 '선배'들이 참 대단해보였다. 같이 전공수업을 들을 때면 '선배'들의 발표는 뭔가 달랐다. 사고력이 나보다 한 발, 아니 세 발은 앞서가는 것 같았다. 나는 매 순간 그들의 실력을 탐했고, 그들과 같은 시각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 정도면 병이었다.
어느날 저녁, 과제를 하다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기숙사 윗층에 사는 '형'을 찾아갔다. 최신형 컴퓨터로 축구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 판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대답은 했다. 내가 만족하는 답을 못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형'이 여기 대학에 온 거야...'
당시에는 이런 잘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경솔하게 판단하는 나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학년 2학기는 정말 좋은 학기였다. 나에게 있어 '선배'와 '형'의 차이를 알려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다.
*형의 특징: 술을 잘 사준다. 덕분에 주량이 는다. 밥도 잘 사준다. 덕분에 살도 찐다. 당구도 같이 친다. 덕분에 점수가 는다.
*선배의 특징: 지식의 살을 찌워준다.
물론! '형'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형'과 친해지고 싶진 않다. 가장 좋은 건 '선배'이자 '형'이다.
대학생활의 길잡이면서 동시에 멘토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난 이런 사람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어딘가에서 열심히 본인의 일을 하고있을 나의 '선배'에게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