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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준 Jun 28. 2022

실패는 축복이다

마잘토브, 실패를 축복으로 여기는 유대인

마잘토브, 유대인은 실패를 축복으로 여긴다

 히브리어로 ‘마잘토브’는 ‘축하한다’라는 뜻이다.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은 자녀가 실수나 실패를 했을 때 ‘마잘토브’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유대인 부모는 자녀가 실수를 하면 단적인 상황만을 보고 아이를 훈계하지 않는다. 유대인 부모가 아이의 실수나 실패를 경험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 아이들은 대개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란다. 유대인들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대인의 놀라운 창업문화는 바로 실패를 수용하는 문화에 기인한다.


 앞서 언급했듯 유대인 부모는 자녀가 실수나 실패를 했을 때 “마잘토브!”라고 말한다. 유대인 부모가 자녀의 실수나 실패를 ‘마잘토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실수나 실패를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녀들의 성공은 단 한 번의 입시라는 결과물에 달려 있다 보니, “실수하면 안 돼”라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실수로 정답을 한 칸씩 밀려 쓴다면 인생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부모와 아이를 짓누른다. 그러나 유대인 부모는 아이의 실수나 실패를 경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호기심 많은 아이가 실수로 부모의 아끼는 도자기를 깼다면, 한국인 부모는 “조심해라.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말아라”고 할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 부모들은 당연히 “마잘토브”라고 말할 것이다. 마잘토브는 단순히 실수를 축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자기를 깬 경험 안에서 ‘도자기는 깨지는 물건’이라는 새로운 지식을 얻은 것을 축하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유대인과 한국인들의 사상은 닮은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의 전화위복 사상은 마잘토브 사상과 비슷하다.


 

 필자는 어릴 적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고뭉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또래보다 조용하고 말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저 길에 핀 꽃을 보며 ‘정말 꽃의 꿀은 달까?’라는 호기심에 조용히 행동으로 옮겨 호기심을 해소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의 새 핸드폰을 호기심에 이리저리 가지고 놀다 고장을 낸 적이 있었다. 아버지께 얼마나 꾸중을 들었는지 현재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이를 키우는 한국의 가정에서는 흔히 있는 풍경이다. 유대 가정이었다면 “마잘토브!”하고 축하를 받았을 터인데 말이다.



 

 실수나 실패가 허용되는 가정에서 자란 유대인 아이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로 자라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한다. 아이에게 실수는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원형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실수나 실패에 대한 부모의 반응에 따라 자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의 잘못만을 꾸중하면 자녀를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는 아이로 만들 수도 있다. 세상에 없던 혁신적인 발명품을 만들어 낸 아이디어는 단 한 번에 일궈낸 것이 없다. 수 백 번, 수 천 번의 실패를 통해서 얻어낸 노력의 결과물이다. 2000번의 실패 끝에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지 않은가? 유대인에게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모험의 시작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각자 개인에게 필요한 재능과 능력을 부여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본인의 재능과 잠재력을 깨워 세상에 일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티쿤 올람의 사상은 유대인 교육의 기본 사상이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실수나 실패에 ‘마잘토브’하는 환경에서 자라나 커서는 훌륭한 인재로 자라나는 것이다. 사람에겐 변화를 싫어하는 습성이 있다.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만을 보려고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만을 고집하며, 자신들의 정해진 취향대로 살고 싶어 한다. 이것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런 인간의 습성이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변화가 강조되는 4차 산업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우울한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많은 청년들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패배의식이 한 몫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입시 문화는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모험의 기회, 세상을 탐험할 기회,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시야와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다. 한국에는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속담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실수와 실패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가 굳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는 말이 있다. 리스크가 크면 돌아오는 수익 또한 크다는 투자 용어다. 하지만 이 용어를 잘못 이해하면 투기를 하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리스크는 고대어민들이 바다로 나갈 때 풍랑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생환하기를 신께 기도한 것에 유래됐다. 고대시대에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그 때 풍랑은 리스크에 해당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모험을 자신을 초월하는 용감한 행동으로 여긴다. 모험 정신은 유대 민족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신이었다. 리스크라는 불확실성에도 끊임없이 도전한 끝에 운명에 저항한 민족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다.


 유대인은 성공에 취해 실패를 망각하면 실패를 다시 맛보게 될 거라고 말한다. 실패의 과정을 통해 리스크를 피하고 살아남는 법을 터득할 때 마침내 성공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를 잊어선 안 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 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느니라.” 잠언 24장 16절의 내용이다. 또 『후츠파』의 저자 인발 아리엘리는 저서에 실패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어른이 된 후 그 대가를 치른다. 한 번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아이는 감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실패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이스라엘에는 ‘다브카’(Davca) 문화가 있다. 다브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다. 청년들은 다브카 문화 아래 과감히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책임은 이스라엘의 사회가 진다. 정신적인 지지뿐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창업을 독려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창업에 실패한 창업자가 창업에 재도전할 경우, 정부는 첫 번째 지원해줬던 비용의 20%나 더 많이 지원해준다.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유대인들은 실패에 관용적이었다. 18세기 유럽의 유대 공동체에는 ‘헤브라이인 무이자 대부협회’가 있다. 대부협회는 실패한 창업자에게 무려 3번의 무이자대부의 기회를 제공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창업이 당연시 되는 분위기다. 실제로 대졸자의 창업률이 80%에 육박할 정도이니 말이다. 이스라엘에는 요즈마 펀드란 것이 있다. ‘요즈마’란 히브리어로 ‘창의’, ‘시작’을 뜻한다. 요즈마 펀드는 아이디어와 기술은 있지만 자금이 없는 벤처기업들에게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설립됐다. 요즈마 펀드의 결정적인 장점은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도 원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또 실패를 하더라도 훗날 성공할 가능성만 있다면 재투자도 가능하다.


 실패를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문화가 필요하다. 실패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는 실패를 통해 배워가는 과정의 결과물이 곧 성공이라는 말이다.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삼는 것이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로런 게리 교수에 의하면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는 평균 2.8번 만에 성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는 ‘페일콘’(Failcon)과 ‘퍽업나이트’(FuckUp Nights)라는 행사가 있다. 이는 일부 스타트업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모여 실패의 경험을 공유하고 토론을 가지는 모임이다. 서로 실패의 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그것을 교훈 삼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와 이스라엘의 창업 신화는 ‘마잘토브’ 문화가 만들어낸 실패자들의 모험의 산물이다. 실패 그 자체로는 절대 축하할 일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패를 겪기까지의 과정 속에는 분명 성공의 실마리가 숨겨져 있다. 유대인들은 아이의 실패를 “마잘토브!”라며 축복한다. 이것은 단순히 실패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패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배웠다는 것에 축복을 하는 것이다. 또 실패를 하다보면 어떻게 했을 때 실패하는지 보인다. 실패를 할수록 미래에 실패를 할 확률이 줄어든다. 실패는 곧 성공의 밑거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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