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및 에세이
프로이트의 고전적 정신분석 중 ‘타나토스’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환자들이 자기 파괴적 행동을 반복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 창안되었는데, 인간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죽음에 대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순환 논증이라는 함정에 빠져있다. 자기 파괴의 원인을 자기 파괴 본능(죽음의 충동)으로 돌리는 이 해법은 근원적 원인에 대한 탐색을 배제시키고 중요한 질문을 그저 충동이라는 본능적 지점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를 포함한 다양한 이유로 요즘엔 타나토스의 자리를 공격성이라는 단어가 대신하게 되었고 현대심리학에서 타나토스는 일종의 미신적인 것, 다시 말해 신화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타나토스, 죽음을 향하는 보편적 인간성이라는 개념이 위치할 곳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환상의 빛>에서 그에 대한 답을 간명하면서도 길게 내놓고 있다.
극 중 주인공인 유미코는 어릴 적 할머니를 떠나보냈다. 집을 나가는 할머니를 붙잡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그녀는 실종된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과 죄책감을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 있을 때는 창을 내다보며 돌아올 사람을 기다린다. 아마도 이런 강박적 행동은 혹시라도 모를 죽음에 대한 불안 앞에서 그녀가 가장 적극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일 것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사라진 후 유미코가 허망하게 길가를 바라보는 쇼트에서 그녀의 시선에 이쿠오가 들어오고, 다음 쇼트부터 그들의 결혼 생활 시퀀스가 시작되는데, 이는 유미코의 상처와 불안이 안정된 관계 속에서 치유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 느낌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이쿠오가 퇴근길에 열차에 치여 급작스럽게 사망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이다. 열차에 의해 훼손된 시신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자살의 원인을 알 수도 없는 유미코에게 남은 건 몇 초간의 잔인한 클로즈업으로 확인되는 이쿠오의 자전거 열쇠고리뿐이다. 당장 어린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유미코는 아랫집 아주머니의 주선으로 타미오와 재혼하여 어촌 마을로 거처를 옮긴다. 안정된 시골 생활로 마음이 평안해지던 찰나, 이번에는 물질을 나간 미치코가 밤늦게까지 마을로 돌아오지 않는다. 물질을 나가는 그녀를 제때 말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유미코는 미치코를 기다리는 동안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 죽을 수 있다는 이 가능성은 다시 한번 덮어놨던 유미코의 불안을 자극한다. 대부분 쇼트에서 작은 틈새만 있으면 파고드는 빛살처럼, 묻어두었던 죽음의 불안은 계속해서 그녀를 쫓아온다.
이후 유미코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집을 떠나 도망치려는 듯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정류장씬에서 그녀는 도착하는 버스에 올라타지 않고 멍하니 버스들을 지나쳐 보내기만 한다. 아마도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이윽고 그녀의 눈에 한 장례 행렬이 들어오는데 그녀는 마치 뭔가에 홀린 듯이 그 행렬을 따라간다. 하지만, 남의 애도를 따라간다고 해서 그녀의 애도가 시작되는 건 아니다. 그녀에게는 애도의 선결 조건인 ‘죽음의 이유’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당 시퀀스 마지막 쇼트에서 유미코는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제서야 뒤따라온 타미오에게 어찌해야 할 바 모르는 마음을 울부짖듯 토해내고 타미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답한다.
예전에 아버지가 배를 탈 때, 바다 위에 홀로 있으면 아름다운 빛이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그러니까, 이건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물론, 이런 말이 이쿠오의 죽음의 원인을 명확히 규명해 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누구나 빛에 홀린 듯이 죽음을 탐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은 공백이었던 죽음의 원인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원인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사람을 안도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러니까, 타나토스라는 말로 표현되는 죽음의 충동이란 설명이 비록 환원주의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한들 불가해한 세계에 대면해야 하는 취약한 인간에게 때때로 유용한 진통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상실의 고통을 담아내는 카메라가 영화 내내 아이러니하게도 빛과 어둠의 대비, 진한 채도의 사물들 사이로 스미는 빛을 통해 심미적 미장센을 구축하는 것 또한 상실에는 그에 응당한 진통제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영화의 엔딩 쇼트에서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창가에는 불안한 눈으로 누군가를 찾는 유미코가 아니라, 환하게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빛,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리는 커튼만이 그녀를 대신하고 있다. 더 이상 창을 내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