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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Jun 11. 2024

몸으로 봐야 하는 것, <존 오브 인터레스트>

영화 비평 및 에세이

눈이 아니라 몸으로 봐야 하는 것.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다루는 비평과 GV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철학이나 사상에 관심이 없을 관객들도 이름은 들어봤을 한나 아렌트(이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의이다.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예루살렘의 재판장에서 심판받는 전범 아이히만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도하며 아렌트가 깨닫게 된 사실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전범의 실제 모습이 성실한 노동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나치 전범의 실상이 선량해 보이는 노동자라는 주장은 당시에 유대인 생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니었다.


논란의 주제였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이후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의 ‘감옥 실험’에 의해 그 과학적 근거까지 인정받게 된다. 짐바르도는 감옥 실험에서 범죄력이 없는 평범한 민간인들을 데리고 역할 실험을 진행한다. 어떤 이들은 죄수의 역할, 어떤 이들은 간수의 역할을 부여받고 감옥 생활을 시작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험 참여자들은 점점 역할에 몰입하게 되어 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점점 거칠고 난폭한 간수의 역할, 죄수 역할의 사람들은 억울하게 억압당하는 죄수의 역할로 변화된다. 이후 참가자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극심하게 호소하여 해당 실험은 중지되었고 이 실험에 내포한 윤리적 문제로 인해 짐바르도 박사는 미국심리학회로부터 제명당하게 된다. 


어쨌든, 이 실험으로 인해 아렌트가 주장했던 평범한 자들이 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나름 입증이 된 듯한데, 그러면 이로써 충분한가? 다시 말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고 나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간편히 읊으며 정신을 스미싱하는 것이 온당한 행위인가? 고작 그것으로 다시 회스 같은 인물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는가? 필자는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가 진정으로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이 세계에서 뿌리째 뽑아내려면 ‘우리 모두는 악이 될 수 있으니까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자.’라는 식의 전혀 와닿지 않는 관습적인 경구를 외는 방식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좀 더 나아가 악이 되는 유형의 인간은 누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작 중 등장하는 아우슈비츠의 소장 회스는 근면한 사람이며 동시에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일말의 아쉬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수용소 바로 옆에 가정을 꾸릴 정도의 냉담함을, 어떻게 하면 한 명의 사람이라도 더 죽일 수 있을지 고민해서 같은 나치 장교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잔혹함을 소유한 인물이다. 영화의 엔딩씬에서 회스가 계단을 내려오다 알 수 없는 구토감을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이는 사르트르의 <구토>에 등장하는 구토감처럼 일종의 수치심을 의미하며 당연히 회스가 실제로 이런 수치심을 느꼈을 리는 없다. 이는 일종의 관객과 감독을 위한 안전장치에 가깝다. 사람이라면 회스에게 모순적인 수치심을 강제 주사하지 않고서는 제정신으로 영화를 제작하기도 감상하기도 어려울 테니까. 관객이나 감독이나 도저히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이 회스의 모습은 전형적인 정신병질적(Psychopathic)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아군이나 유대인이나 상관없이 생명을 죽이는 것에 동요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일종의 놀이로 받아들이고, 라일락 수목 같은 소유물이 손상될 때는 과도하게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의 정서적 경계는 집의 울타리만큼이나 좁고 납작해서 자신의 소유물인 가정을 제외한 공간에서는 전혀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타자의 고통을 감지할 수 없는 이런 회스의 공감 불능은 쇼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우슈비츠의 벽과 가정집 내에서 계속해서 프레임을 가로막는 벽들로 암시된다.          


반면, 회스의 가족 구성원들은 정신병질적 인물들은 아니지만, 그에 기생하기 위해 어느 정도 동조율을 보이는데, 그 정도에 따라 순위를 매겨보자면 회스의 아내인 헤트비히 > 장남 > 차남 > 막내딸 > 헤트비히의 어머니 정도가 될 것이다. 헤트비히는 그 정신병질적 경향이 회스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인물이기에 여러 가지 방어 수단을 사용해서 자신의 정신을 보존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더럽고 윤리적인 죄를 지었으며 독일인들은 깨끗하다는 도덕화 및 평가절하, 유대인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포도나무를 심어서 아우슈비츠 벽을 가리려고 하는 현실의 부인, 감정적 동요나 죄책감이 올라오면 얼른 분노를 통해 이를 무화시키려고 하는 역할 반전 등을 통해 그녀는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내려 부단히도 애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여왕이라면 다스리는 백성이 존재할 텐데, 그녀는 정작 백성의 위치에 있는 ‘유대인’의 존재를 끝없이 부인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런 부인의 시도는 그녀가 절대 여왕 따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할 뿐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편지만을 남기고 도망치듯 떠났을 때, 유대인 하인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너 같은 건 말만 하면 남편을 통해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데, 이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그녀가 큰 소리로 살해 협박을 할 정도의 냉담함을 보유하지는 못했으며 일말의 죄책감을 항상 부인해야만 버틸 수 있는 나약한 인간임을 드러낸다.     


회스의 자녀들은 비교적 다양한 양상으로 그들의 부모를 동일시한다. 장남은 아버지를 동일시하여 냉담하고 피아를 가리지 않고 타인을 괴롭히는 행동을 보인다. 특히, 영화의 후반 시퀀스에서 장남이 차남을 회스의 가정집 온실에 가두는 장면은 장남과 차남의 성향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장치이다. 반면, 차남은 형처럼 전쟁을 소재로 장난감 놀이를 하고 에너지가 풍부한 모습을 보이지만 죄책감과 고통 감지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다. 그는 소녀가 심어둔 사과로 인해 유대인들이 다툼이 벌어져 처형당하는 장면을 창을 통해 보게 되는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며 커튼을 닫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죄책감을 커튼을 닫아 부인하고 살해당하는 유대인이 잘못했다는 말을 나지막이 읊조리면서 도덕화하려고 하지만 어쨌든 그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 불편감을 느낄 줄 아는 존재다. 물론 이는 성공적으로 방어되지만. 막내딸은 작 중에서 비중은 적지만 유대인들을 위해 사과를 심어두는 소녀가 등장하는 시퀀스와 반복적으로 연결되는데, 이는 적어도 그녀만이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신호로 읽히기도 한다. 그녀는 몽유병이 있어 밤늦게 집 안을 서성이는데 누군가에게 ‘설탕을 나눠주려 한다’라는 말을 나지막이 뱉곤 한다. 그 설탕은 무엇일까. 전쟁 중에 아우슈비츠 소장인 회스의 가정집에서도 구하기 힘든 설탕을 타인에게 나눠주려 한다는 것은 그녀만이 가정 내에서 타자의 고통에 가장 공감적으로 반응하고 있으며, 누군가를 도우려는 연민의 행위 의식까지 나아감을 의미한다. 다만, 그녀는 이런 의지를 의식 상태에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물이 아니기에 이를 비의식 상태인 몽유병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이 시도는 항상 회스에게 발각되어 가정 내 편안한 침대의 자리로 봉인되고 만다.     


막내딸의 연민의 소망은 회스에 의해서 중단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책감과 연민을 행위로 만들어내는 유일한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헤트비히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유대인 지식인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던 인물로 아우슈비츠의 벽을 보며 그녀가 일했던 집의 고용인도 저 수용소에 있을지를 걱정하는 인물이다. 이내 ‘그러게, 이상한 사회주의를 들먹여서’라는 식의 도덕화를 통해 자신의 정서적 고통과 죄책감을 무화시키긴 하지만 그녀가 벽만을 보고도 타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밤 중에 창문 너머로 시신들을 소각하는 강렬한 연기와 수용자들의 비명을 듣게 되는데, 회스의 자녀들과 달리 그녀는 커튼을 다시 덮어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녀는 쇼트가 끝날 때까지 치솟는 불길을 응시한다. 그녀의 얼굴과 몸에 창문과 그 창문에 비치는 불길이 겹칠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녀가 온몸으로 타자의 고통을 직시하고 있음을. 그녀는 다음날 헤트비히에게 편지 한 통만을 남겨두고 처음부터 그 집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다. 편지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헤트비히가 편지를 보자마자 제대로 읽지도 않고 소각시켜 눈앞에서 부인하려고 한 것을 보았을 때, 최소한 현재 회스 부부가 벌이고 있는 참담한 학살을 부정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회스 같은 정신병질자의 탄생을 막아야 한다는 것일까? 나치적인 사유를 하지 않고서 회스 같은 정신병질자의 탄생 자체를 막아버릴 만한 신적인 권한이 아직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 다만 우리는 회스 같은 정신병질자들이 활동하지 못할 사회를 만들 수는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병질자들을 교정할 때는 그들의 공감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핍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합리성에 호소하곤 한다. 그들의 정신병질적 행동이 비합리적인 것이 되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가 말했던 것처럼 타자의 고통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반응하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해야 한다. 즉, 회스 같은 성실한 일꾼의 재출현을 막으려면 사회 구성원들이 최소한 헤트비히의 어머니 이상으로 타자의 고통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영화 예술이다.     


물론 아우슈비츠의 벽과 회스의 가정집 벽들처럼 우리에게는 손쉽게 눈을 가릴만한 방어 수단들이 너무나 많다. 레비나스 역시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타자의 고통이란 그저 물리적 현실을 눈으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왜냐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고통은 그 강도를 견디기 힘들 때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즉, 타자의 고통이 제대로 감지되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막고, 막고,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가스실의 유독가스처럼 새어 나와 우리의 목을 졸라야 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카메라가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을 담지 않고, 그들을 극단적으로 관객으로부터 배제시키며,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는 모호한 고통의 음성을 일종의 가스처럼 흘리는 방식을 사용하는 건 철저히 레비나스의 철학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손, 발, 정신이 온통 뜨거워진 채로 아무리 막아도 막아지지 않는 타자의 고통에 사로잡히며 눈이 아니라 몸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눈으로 아무리 가리고 가려도 몸으로 보게 하는 것.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아마도 그것이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며 영화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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