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너와 나>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영화다. 아무리 이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려 한들, 관객들 이 티켓을 예매할 때는 그 정보가 입력된 상태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전국민적 집 단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과 관련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반적인 영화 한 편을 보는 것과 같은 수준의 결정이라 할 수 없다. 거기에는 훨씬 큰 결심이 필요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를 보던 참전 용사들에게 PTSD가 유발되었던 것처럼 극장에서 트라우마가 재경험 될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봉 당시 <너와 나>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들어서는 모 험을 감수했다. 대체 어찌하여 관객들은 개연적 고통을 감내하고 극장을 향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관객들의 이런 모습이 다소 피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피학성의 근원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다른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른다. 피학성은 본질적으로 회복 지향적인 속성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 고통을 반복한다고 느껴지는 행동들도 사실 대부분의 경우 과거의 경험을 교정적 경험으로 대체하려는 소망의 시도이다.
그렇다면 이 교정적 경험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트라우마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기호들에 의해서 촉발된다. 개인에게 트라우마가 발생하면 그 이유를 찾기 위한 사유가 시작되며 작은 정도의 트라우마는 진실을 찾음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트라우마는 그 상처가 너무 깊어 진실의 유무와 별개로 회복되지 않는다. 이런 과도한 트라우마에 접촉하여 회복을 촉진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줬던 것과 유사한 기호들의 무리를 통해 이를 표상적 수준에서 재배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신, 퇴행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안전하면서도 새롭게.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에 최적의 매체가 하나 있는데, 움직이는 영상 이미지라는 연속적 기호들을 상영하는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회복적 경험에 대한 인간 본연의 갈망과 영화가 이를 성취해 줄 것이라는 그들의 암묵적 믿음 아니었을까?
<너와 나>는 영화라는 방법론을 활용하여 어떻게 이 담대한 목표를 성취하고 있을까? <너와 나>는 영화 예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트라우마에 접근한다. 영화는 표면 서사와 잠재 서사라는 이중의 구조로 관객과 상호작용을 시도한다. 세미가 잃어버린 꿈을 기억해 내는 것, 하은이의 노트에 적혀있던 훔바바가 누군지 알아내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실종된 진식이를 구조하는 것들은 관객들에게 구조화된 표면 서사로 흡수된다. 반면, 영화는 동시에 밝은 광량과 뿌연 색채 및 흐릿한 형태로 표현되는 미장센, 거울과 진식이를 포함한 각종 상징들을 숏에 일관되게 삽입함으로써 영상 이미지들을 일종의 투사 가능한 캔버스로 만든다. 이런 모호한 화면과 다의적 상징들은 스크린이 세미와 하은이의 표면 서사를 상영할 때, 관객들은 영화의 기호들을 단서 삼아 머릿속에 저마다 자신들의 이야기인 잠재 서사를 재생하도록 만든다. 즉, 관객들이 피동적으로 영화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발적으로 자신만의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너와 나>의 기획은 근본적으로 드라마와 사이코 드라마의 이중 상영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들이 이미지를 투사적 캔버스 삼아 자신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재생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영화는 안전하게 진실에 접근하여 교정적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너와 나>는 여러 거리 두기 수단을 활용하여 마치 진자운동을 하듯 트라우마에 접근한다. 진자가 왼쪽 끝 에서 오른쪽 끝으로 양측 이동을 하다 그 간격이 짧아지며 중심에 도달하는 것처럼, 영화는 즉각적으로 트라우마 관련 단서들을 제시하지 않고 그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훑어 들어가는 방식을 취한다.
가령, 영화는 이것이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단서를 끊임없이 관객에게 던진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꿈과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것과 세미가 프레임에 등장할 때 수차례 거울에 비치도록 유도하여 관객이 거울 속 반전된 세미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보여지는 이 영상이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점을 강조하여 관객이 영화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하도록 만든다. 이는 관객들이 압도되지 않고 이미지들을 따라 점차 서사의 심부로 들어가도록 돕는다.
더불어 영화는 외상 유발적 장면을 비출 때, 이미지와 불일치하는 음성이나 컷 어웨이 숏, 인서트 숏을 선행시킨다. 세미가 죽고 나서 하은이가 슬픔에 잠겨 비통해하는 이미지들이 스 크린에 등장할 때는 이와 불일치하는 진식이 어머니의 음성을 중첩하여 이미지들을 세미의 꿈으로 중화시키고, 안산역 시퀀스에서는 노래방, 안산역 주변의 정경들, 학생들, 코미디 요소로 기능하는 똘이 아범까지 비춰 극의 긴장도를 완전히 낮춘 후에야 안심한 듯 안산역의 역명판 을 카메라에 담는다. 편집을 통해 지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인물이 화면에 반복 등장하며 숏을 지연시키기도 한다. 세미의 고백 시퀀스에서 하은이와 헤어지기 전 세미는 조문객들 사이로 멀어졌다가 몇 번이고 되돌아오며 프레임 안과 밖을 오간다. 이런 불일치와 지연은 서스펜스를 유발하기보다는 관객들이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카메라가 기다려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안전장치들과 함께, 관객들은 움직이는 진자가 점차 중심을 향하듯 진실에 다가간다. 세미가 꾼 꿈이 하은이, 선생님, 친구들, 엄마, 아빠, 자신이 죽게 되는 내용이라는 것. 그들이 죽고 난 후 하은이는 홀로 남아 슬픔을 견디게 된다는 것. 하지만, 영화는 이런 가혹한 운명만을 제시하지 않고 이야기를 재각본, 즉 다시 쓰도록 요청한다. 죽음의 운명을 가진 세미는 피해자가 아니라 극 중에서 하은이, 진식이,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꿈을 구조하게 된다는 것, 세미는 꿈속에서 하은이가 되어 그녀를 상실한 우리들의 슬픔을 함께 경험하고 안아준다는 것, 사랑받는 걸 넘어 사랑을 고백하는 주체로 선다는 것. 이를 단서 삼아 관객들은 마음 속에 재생되던 기억을 각기 다른 회복적 이야기로 재저작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애도를 설명할 때 애도의 완결을 자신의 외부로 투사했던 리비도를 회수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회수라는 말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켜 애도의 끝이 사랑했던 이를 포기하고 떠나보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대상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사라진 대상을 나의 내적 세계에 이야기의 형태로 불러와 그 대상에 게 끝없는 사랑을 퍼붓는 것이, 리비도 회수의 참뜻이다. 그렇게 회수된 리비도가 자리한 마음 안에서 사랑했던 이들은 새롭게 탄생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엔딩 숏에서 사랑한다는 음성이 수없이 반복된 후 세미가 웃으며 눈을 떴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