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어른. 얼떨결에 어른이 된 '나'에 대하여
쉽사리 무언가 결정을 내리지도, 명쾌하게 말하지도, 정하지도 못하는 내 모습들이 지겨웠고 공부하고 있는 전공이 내 길인지도 모르겠더라. 내 주변은 바삐 제 삶을 굴리고 있는 반면 나는 늘 그 자리에서 머물기를 좋아했다. 누군가는 그런 한결같음을 선망하겠지만 난 그렇지 못해서.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싶어 휴학 신청을 했다.
휴학을 다짐하고 신청 버튼만 누르지 않은 채 경주로 여행을 갔다. 우연찮게 만난 사람들은 다들 본인의 일에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사진을 찍으려 줄을 서있는데 뒤에서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아마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내년에 드디어 담임을 맡는다, 걱정이다, 철수가 뭐 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들. 메마른 감정 사이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술을 먹으러 갔다. 사장님이 나와 같은 계열 전공이셨다. 알바생은 휴학 중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하러 가기 위한 준비 중이었다. 본인의 길을 갈고닦는 사람들의 언행은 반짝거렸다. 얼마 안 되는 주량이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친구와 전화로 허심탄회한 이야기만 줄줄 읊어댔지만 그 1박 2일의 경주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사회에서 말하는 '어른'의 모습은 매일이 흘러도 내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휴학을 하며 흔한 '취준'을 가볍게 시작했다. 혼자 도전해 보려고 지역을 가리지 않고 두 발로 다녔다. 여전히 어른이 되는 방법은 모르겠고,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나의 적성이었다. 적어도 어떤 일로 돈을 벌어야 할지 알았다. 여전히 매일이 서툴지만 그나마 내 삶의 한가닥을 찾았던 반년이었다. 확신이 들었을 때 조기 복학을 신청했다.
대학생이라는 그늘도 사라진 지금, 한 학기 휴학의 여파로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졸업 한 달 전, 얼떨결에 취업도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만난 마음들에 발 바쁘게 감사하다는 말만 전했다. 사회는 정신없이 나를 몰아세웠고 나는 놓치는 일들이 많았다. 매번 자진 야근을 해야만 했다. 같이 일하는 선배들은 그런 나를 집에 보내기 바빴다. 퇴근을 하고 나면 다들 집안일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입사-자취방 이사-졸업-의 루트를 타고 있는 내게 하루들이 낯설었다. 입사 한 달 중 일주일은 가슴을 치며 출근했다. 나는 아직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벌써 어른이 된 걸까.
사유서감 사고를 쳤다. 내가 맡은 사업을 제때 준비하지 못했다. 돌아서면 놓친 일들이 보인다. 죄송하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 사회가 전부 나를 두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은 기분에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인복은 있는 건지, 신입 때 사고 치는 거라며 어르고 달래는 선배들이 있었다. 놓친 일이 있을까 옆에서 놓치지 않도록 더블 체크를 대신 해주셨다. 내가 내 몫을 다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주변에서 대놓고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숨고 싶었다. 분명 그토록 가고 싶어 했으면서. 지금은 회사가 가기 싫다. 내 무능력을 증명하러 가는 것만 같다. 내 또래가 없는 탓인지 내 사회성이 없는 탓인지. 나는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그저 수습 기간이 되면 잘릴까 노심초사만 하고, 사고를 치고, 고개를 숙이고, 그만하고 싶고, 죽고 싶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해결하지 못할 것만 같은 일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친 꼴이다. 좋아하는 일을 쉽사리 좋아하지 못하고, 잘 웃었을 일에 웃지 못했다. 이상하지.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마음 한 켠의 근육이 내려앉아있는 게 느껴진다. 근육이 없다 못해 무너졌구나. 녹아내렸구나. 내 마음의 근육이 지금 이것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구나. 겁을 먹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종종 꼴이 우습게 느껴진다. 그러면 반사적으로 툭 튀어오는 또 다른 나. 죽고 싶다.
몸의 근육이든 마음의 근육이든, 둘 다 없는 나는 그야말로 바다 저 깊은 심해에서 살아가야 할 연체동물 같은 상태다. 하지만 난 육지 동물이고. 물속으로 들어가면 익사할 상이니까. 근육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 갈 길이 멀고 먼 내 척추에 얼마나 튼튼한 근육이 들어설 수 있을지. 또 겁부터 난다. 하기 싫다. 사라지고 싶고. 죽고 싶지. 하지만 공허함을 근육으로 채우는 게 얼마나 반짝거릴 과정인지 아니까. 도전해보려고 한다.
폐를 열어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모든 과정에 겁이 나지만, 근육이 생긴 나는 또 얼마나 반짝거릴까. 어떻게 또 다른 결이 있을까. 궁금하다. 오늘도 힘을 내서. 또. 내일도. 모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