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 여행도 가 보고, 뮤지컬 등의 공연을 보러도 다녔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 자유롭고 편안했다. 하지만 당당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편, 이 즐거움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날도 있었다.
얼마 전이라고 하기엔 좀 오래된 6월 초에 이태원블루스퀘어에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관람했다. 뮤지컬 덕후들이 많이 추천하는 작품이라서 꼭 보고 싶었으나 여러모로 여유가 없어서 볼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티켓이 오픈되었을 때 조기 예매 할인 혜택에 솔깃해져 티켓을 두 장 샀다.
요즘 거의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고 혼자 다니던 내가 "뮤지컬 보러 갈래?"라고 물었을 때, 언니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어"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본 회차에는 그간 수많은 드라마와 공연을 통해 연기력이 입증된 배우 유준상이 빅터 프랑켄슈타인 역을, 그의 친구에서 괴물이 되는 앙리 뒤프레 역은 '팬텀 싱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가창력을 인정받은 배우 고은성이 연기했다.
유준상 배우는 내가 지금껏 본 뮤지컬 공연 중에 가장 나이 많은(1969년생) 주연 배우여서 혹시나 고음이 많은 노래를 부를 때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는 무대에서 여유 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6월 8일 낮공연, 캐스팅 보드
나는 뮤지컬을 볼 때 전체적인 스토리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다. 지금까지 봤던 뮤지컬 중에 볼거리가 많고 음악도 좋았지만, 스토리가 조금 유치하거나 올드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 노래도 좋았지만 보고 난 뒤 여운이 남는 스토리가 가장 좋았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줄거리>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이후, 죽은 생명을 되살리는 실험에 집착한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사형당한 친구 앙리를 되살리는 데 성공하지만, 앙리는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본능만이 남은 괴물 같은 상태로 깨어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로워하다 괴물을 다시 죽이려 하고, 도망간 괴물은 사람들에게 쫓기고 이용당한다. 마침내 인간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만 남은 진짜 괴물이 돼버린 그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찾아가 처절한 복수를 한다. 그 복수는 박사가 사랑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괴물도 죽으며 결국 박사 홀로 남게 두는 것.
인간에게 최고의 복수는 죽음이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낀 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혼자가 된다면, 그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걸 가장 아쉬워할 것 같다.
공연장 로비 포토존,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실험실 모습
공연이 끝나고, 언니가 예약한 공연장 근처 맛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태원은 멋지고 독특한 스타일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우리 동네와는 다른 자유로운 분위기, 예전 같았으면 가슴이 뛰었을 텐데. 이제는 그런 곳에 가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퇴근 중이니 마트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마트 가는데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나왔어?"
평소와 달리 화장을 하고 재킷을 챙겨 입은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오늘 언니와 뮤지컬을 보러 간다는 말을 남편에게 하지 않았다. 남편은 주말에도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느라 바쁜 데다가 사업에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겨 정신이 없다. 그런 남편을 두고 뮤지컬을 보러 가는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언니랑 뮤지컬 보고 왔어."
"그래? 남편은 요새 되는 일이 없어 괴로운데 마누라는 골프 치러 다니고, 뮤지컬 보러 다니고 팔자 좋네."
"내가 잘못한 건가?"
남편이 농담조로 말해서 나도 웃으며 말했다.
"아니지. 잘한 거지. 나는 괴롭지만 자기는 즐거워야 균형이 맞는 거지. 둘 다 괴로우면 안 되지."
나라도 즐겁게 지내라는 남편의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보러 다니던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굳이 먼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평소 남편 생각대로) 뮤지컬 티켓 살 돈 있으면 가족들과 소고기나 사 먹고 싶어졌다. 뮤지컬이 아무리 큰 감동을 준다 해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 행복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앗, 울 언니가 이 글을 본다면 조금 슬플지도 모르겠다. 내 덕분에 문화생활을 즐긴다며 좋아하는 언니와 함께 일 년에 한두 번은 보러 가는 걸로 해야지.
*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본 건 6월 8일, 그러니까 약 3개월 전인데요. 글이 잘 풀리지 않아서 발행을 못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꺼내 읽어보니 고칠 부분을 알겠더라고요.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