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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Oct 26. 2024

몰라도 괜찮을 일들

회사에 있으면서 딸아이(초4)한테 전화를 했다.

"뭐 해?"

"티브이 봐."

"그렇구나. 엄마는 너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낮고 늘어지는 게 누워서 내는 소리처럼 들렸었다.


집에 들어갔더니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집에 CCTV 달았어? 나 사실 아까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엄마한테는 그냥 티브이 본다고 했거든. 엄마가 나 보고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어."

"엄마는 다 알아. 보이지 않아도 느낌으로 다 알지."


저녁때 쓰레기를 버리고 마트에 가서 맥주를 샀다. 딸아이가 잠든 후에 혼자 티브이를 보며 (오랜만에) 한잔 마실 작정이었는데,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뭐 해?"

"티브이 봐."

"술 마시지 마."

"뭐야? 나 몰래 CCTV 달았어? 맥주 사 온 거 어떻게 알았어?"

"난 다 알아. 자기가 뭘 할지 다 안다고."


생각해 보니 내가 마트에서 남편 카드를 썼다. 늦은 저녁 시간에 카드 사용 문자를 받은 남편의 눈에는 내가 뭘 샀을지 뻔히 보였을 거다.


오래 함께한 사람끼리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사소한 흔적, 표정, 목소리 같은 작은 퍼즐 조각 하나만 있어도 전체 그림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밤 열두 시,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고3 아들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밝다.

'요 녀석, 독서실에서 오는 게 아니구나!'


몰라도 괜찮을 일들이 자꾸 보인다.



*요 며칠 신해철 님의 노래를 듣고 있다. 내일이 벌써 10주기니.

https://youtu.be/HRlwPwqC-Y0?si=o1Djlr6c2UkdeP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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