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산 가지고 가야지!
이미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 버린 딸아이를 향해 소리 질러 보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비 내리는 아침, 딸아이는 우산 없이 학교를 갔다. 공들여 머리하고 화장하고는 늦었다고 허겁지겁 나가느라, 건물 밖에 나가서야 우산이 없다는 걸 알았을 테지만 다시 올라갈 시간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세먼지가 섞인 비를 맞았을 딸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한숨이 나온다.
- 넌 화장 안 하는 게 더 예뻐
- 화장하면 피부 상한다
- 화장품 계속 사면 용돈 안 줄 거야
- 이제 곧 고3인데 화장할 시간에 공부에 더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니니
아침마다 화장을 하느라 등교시간이 늦어지는 딸아이(고2)가 걱정돼 타이르기도 하고 협박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딸아이의 화장품 종류는 점점 늘고 있고, 등교시간도 그만큼 늦어지고 있었다.
7시에 일어나던 아이를 얼마 전부터 6시 30분에 깨웠다. 아이가 화장을 포기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일찍 깨워줘야겠다 싶어서. 그런데 일찍 깨운 만큼 화장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지 아이는 이전과 비슷한 시간에 나간다. 아슬아슬하게 지각 처리를 면할 정도의 시간에.
-7시 40분이야. 지각하겠다.
-지각 안 해. 왜 자꾸 재촉해?
딱 한 번 말했을 뿐인데 딸아이가 짜증을 낸다.
-엄마가 너 화장 오래 하라고 일찍 깨우는 게 아니잖아. 매일 그렇게 헐레벌떡 가지 말고 좀 여유 있게 나가라고 일찍 깨우는 거라고.
결국 나도 짜증이 났다.
나는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후회를 한다. 그냥 아무 말하지 말걸. 딸아이는 요즘 화장만 열심히 하는 건 아니다. 마음 잡고 공부하겠다면서 방과 후에 곧바로 학원에서 운영하는 관리형 독서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한다. 화장을 한다고 해서 공부를 안 하는 건 아닌데, 나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아이가 공부에만 집중해 주길 바라고 있다.
밤 12시쯤 집에 오던 아이가 기말고사가 가까워오자 새벽 1시가 넘어 독서실에서 퇴실한다. 집에서 걸어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지만 인적이 드문 골목을 혼자 걸어오게 하는 게 너무 불안했다. 나는 1시가 넘으면 옷을 챙겨 입고 독서실에서 오는 퇴실 문자를 기다렸다가 아이한테 전화했다.
-엄마가 나갈 테니까 기다려.
-혼자 갈게. 나오지 마.
-위험해서 안돼. 잠깐만 기다려.
내가 나간다고 하면 아이는 혼자 오겠다고 했다. 막상 나가면 싫어하는 기색은 없어 보이는데 매번 나오지 말라고 하니 눈치가 보였다.
어떤 날은 말없이 나가 30분 정도 기다린 적이 있다. 독서실 앞으로 차가 한 대씩 와 서 있다가 독서실에서 나온 아이를 태우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걸어와서 나오지 말라는 건가? 아이를 픽업하기 위해 차를 사야 하나?
일주일 정도 지나니 더 이상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퇴실 문자를 확인하고 뛰다시피 독서실 앞으로 가니, 아이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배고파
-맥도널드 콜?
독서실 옆에 24시간 영업하는 햄버거집이 있다. 햄버거를 포장해 집을 향해 걸어갔다.
손에 들린 봉지에서 나오는 달콤한 냄새 때문인지 우리 사이에 다정한 대화가 시작됐다.
-엄마, 나 때문에 잠 못 자서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지. 피곤해도 나오는 게 마음 편해.
-나 혼자 가도 괜찮은데.
-엄마가 안 괜찮아. 그런데 걸어가니까 춥지? 엄마 차 한 대 살까?
-어, 차 사. 그전에 나 롱패딩 사줘.
-언제는 롱패딩 싫다고 숏패딩만 사더니.
-이젠 입을래. 너무 추워. 그리고 주말에 머리 자르게 카드 좀 줘.
-어차피 묶고 다닐 거 뭐 하러 미용실을 가니?
-아니, 머리를 해야 공부가 잘 될 거 같단 말이야.
분위기가 좋은 틈을 타서 필요한 걸 챙기려는 딸아이.
-대화 끝.
내 입에서 또 험한 것이 나오기 전에 입을 다물었다.
딸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그동안 아이가 내게 나오지 말라고 했던 건 내가 나오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미안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겨울이 아이한테는 매우 힘든 시기가 될 테지만 나중에 이때를 회상하면서 엄마와 나란히 걸으며 따뜻했다고 떠올려주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차는 안 사는 걸로 하고, 아이가 따뜻하게 입을 만한 어떤 롱패딩이 좋을까... 나는 밤새 롱패딩을 검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