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읽은 대목이다. 순간 궁금했다. 그냥 마음이 행복한 게 아니라 몸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행복한 기분이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문장을 읽으며 그 기분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이 생겼다.
그리고 불과 하루가 지난 오늘, 그 기분을 만났다. 어쩌면 그저 기분 좋음으로 끝날 수 있는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제 저 문장을 만나 쉬이 놓아주지 않았고, 오늘 나의 필체로 그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과 갖는 친화적인 시간을 즐기지만,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곳에서 좋아하는 일을 사부작사부작하면서 스스로를 충전하는 법을 배웠다. 베트남 한 달 살기를 계획하며 마음껏 꾸려갈 이 시간을 무척이나 고대했다. 이곳에서 만난 엄마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이와 산책을 다니는 것도 즐겁지만 혼자 놀기 시간 역시 내게 무척 중요한 약속이다.
마침 오늘은 요가와 영어 수업이 없는 날이다.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의 긴 시간을 원하는 대로 그려볼 수 있는 제법 큰 캔버스가 쥐어진 날이다. 이렇게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얼 하고 싶으냐고. 운동화, 해변길, 책, 카페... 이런 것들이 떠올랐다. 생각난 모든 것들을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해변을 찾아갔고 무작정 걸었다. 운동화의 쿠션을 느끼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잎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날이 흐려 걷기 좋았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파도 소리가 풍성했다. 목적지도 정해놓은 시간도 없이 걷고 싶은 만큼 걷기로 마음먹으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아름다운 해변길과 나의 자유 의지만 존재했다. 눈치, 배려, 거리, 시간 이런 것들을 치워놓은 채 그저 걷는 나만 존재하는 이 시간을 얼마 만에 가져보는지!
그러다 앉고 싶어지는 벤치를 만나 주저 없이 자리를 잡았다. 파도의 물살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흐릿하게 지나쳐 보냈다. 오늘따라 파도가 두루마리처럼 말려들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숱하게 바다를 보았는데 오늘 같은 파도의 질감은 처음 느껴보듯 신기했다. 담아놓으면 한 잔의 물인 바다가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모습이 경이로웠다. 지금이다 싶었다. 배낭에 담아 온 하루키를 꺼냈다. 소설이 아닌, 그가 사랑하는 달리기에 대한 생각을 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는 이번 여행에 동행했다. 걷고 싶어서, 달려보고 싶어서.
해변 길 벤치에 앉아 등 뒤로는 도로의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고 앞으로는 거센 파도 소리가 우렁찼다. 그리고 그 사이 하루키가 있었다. 그는 하와이의 아보카도 나무 그늘 아래 있었고, 나는 베트남의 야자수 그늘 아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곤 대학생 때 무심코 읽고 흘린 <상실의 시대>가 전부이다. 그저 유명해서 읽었고 그 뒤론 잊었다. 그러던 내가 삼십 대의 후반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달리기를 사랑하는 소설가 하루키를 만나게 되었다. 바다를 앞에 두고 책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대가 시작되었다.
책에 빠져 있다가도 이따금 오토바이소리와 파도 소리에 평온이 흔들릴 때, 나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걸었다. 달리는 하루키를 궁금해하며 이전과는 다른 내가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독서를 이어갈 딱 적당한 카페를 발견했다. 베트남 특유의 짙고 달달한 '카페 쓰어다'를 마시며 이번에는 아늑하고 조용한 실내에서 다시 책을 들었다. 밖에서 읽을 때는 자연의 소리와 바람이 좋았다면, 안에서는 보다 깊이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좋았다. 운영하던 재즈바를 접은 뒤 쓰고 달리는 사람으로 변모하는 그의 과정이 참 건강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이따금씩 카페를 둘러보았고, 핸드폰으로 지인과 다정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 순간 내게 어제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온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서 발 끝까지 행복하다."는 이 문장과 함께. 나를 둘러싼 그리고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행복했다. 내 몸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낮은 곳까지 이어지는 구체적인 행복감을 걷고 읽는 여행자가 된 지금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걷고 싶은 때 걷고 읽고 싶은 때 읽는 자유에서 온 주체적인 행복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다정함이 되는 연결에서 온 행복이었다. 그리고 문장으로 읽고 내 삶에 빗대어 실감하는 알아차림의 행복이었다.
이런 시간을 더 자주 가져봐야겠다. 내 몸의 어디가 행복해지는지 그 느낌을 발굴해 봐야겠다. 이름을 불러주어 의미가 되는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행복감에도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줘야겠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 끝까지 행복한 그 기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