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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드 Apr 13. 2024

우리는 4월에 만났지

대학 중간고사 기간의 로맨스

대학교 3학년 중간고사 기간, 생열이라 불리던 생명공학부 열람실에서 전공책을 쌓아놓고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햇살 따뜻한 시간이었고 사람은 적었다. 6인용 테이블이 10개쯤 놓여있었고,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중간중간 책으로 맡아놓은 자리만 있을 뿐 앉아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그리고 옆에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

"여기 자리 있어?"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의 선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역시나 선한 미소로 물었다. 순간 얼어붙은 나는 태연한 척 고개를 저었다. 그가 왔다! 그것은 내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를 처음 본 건 그로부터 일 년 전 봄이었다. 그때도 시험기간 생열이었고, 선배의 친구였던 그가 내게 일명 '족보'를 돌려주는 손길이 전부였다. 그게 그에 대한 첫 인식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와 나는 같은 테이블의 건너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옆자리 사람들과 과자를 나눠먹으며 오간 눈인사가 전부였다. 어느 날은 열람실 밖에서 걸으며 통화를 하는 그가 보였다. 엷은 미소가 궁금했지만 핸드폰을 든 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보고는 시작하지 않은 마음에 낙담부터 했다.


계절이 여럿 지나고 2학년 마지막 학기가 끝났다. 그러는 동안 그를 궁금해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가끔 끄적인 게 전부였다. 마지막 기말고사까지 끝나 텅 빈 생열을 나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잠시 들렀다. 오후의 햇살만이 빈 책상 위에 내려앉은 열람실 안에서 저 멀리 낯익은 텀블러가 보였다. 아직 공부하는 흔적이 남아있는 자리, 노트 위에는 어른의 글씨체가 가지런히 쓰여 있었다. '그의 글씨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도 생열에 오고 있는 걸까? 무슨 공부하고 있지?' 하는 물음표들도 따라왔지만 물을 곳은 없었다.

궁금증과 어떤 마음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끌어안은 채 생명공학부 건물을 나섰다. 건물 모퉁이의 작은 오솔길은 12월 답게 나무의 채도가 한 층 낮아져 있었다. 조용하고 앙상했지만 햇살이 느껴지는 오후였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그 타이밍에 그가 나타났다. 털모자를 쓰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그는 내가 미처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온화하게 인사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인사로 스쳐 지나간 그야말로 나만 아는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열람실의 텀블러가 그의 것이 맞았구나, 단정한 그 글씨가 그의 것이 맞았구나.' 나의 추측을 확인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아, 어쩌면 내 마음을 더 어지러이 확인하게 된 순간일지도.


그렇게 궁금과 애탐을 어정쩡하게 오가던 계절들이 지나가고 3학년 4월의 중간고사 기간에 그가 내 옆자리로 온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정말이지 영화 같은 일이었다. 그가 옆자리에 앉은 뒤로는 이상하게 공부가 더 잘 되었다. 일단 열람실에 열심히 붙어 있었고, 그간의 어지러웠던 마음이 어딘가로 수렴한 듯 편해졌다.

그의 눈앞에서는 태연한 척 공부했지만 한 가지 필사적으로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아침에 열람실 자리 지키기! 생명공학부 학생들만 쓰던 그 열람실은 도서관과 달리 시험기간 내내 자리를 맡아둘 수 있었다. 책과 물건을 쌓아놓고 내 자리로 만들어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앉을 수 없는 지정석이 되었다. 단, 한 가지 규칙은 매일 아침 8시에 그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것.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은 자리가 리셋되는 시간으로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자리는 새 사람이 치우고 앉을 수 있었다.

시험기간 나의 기도는 단 한 가지, 아니 두 가지였다. 내 자리를 지키는 것, 그 역시 그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와 중간고사 기간 내내 짝꿍으로 앉아있고 싶어서 아침마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일지언정 필사적으로 열람실로 달려갔다. 그것이 내가 한, 소극적인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이었다.


4월의 시험기간은 때론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벚꽃도 피고 내 생일도 있는데 현실은 밤낮을 가리지 않은 공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해 4월은 달랐다. 그토록 신나는 중간고사 기간은 처음이었다. 아침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열람실 옆자리에서 그를 만났고, 과자를 나눠먹거나 시험범위 이야기를 하며 작은 수다도 오갔다. 공부하다 눈을 살짝 왼쪽으로 돌려 긴 손가락으로 노트에 어른 글씨를 유유히 써내는 그 움직임을 보는 게 좋았다. 그와의 연결은 어느새 열람실 바깥을 넘어섰다. 내가 열람실에 지각을 할라 치면 그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잠꾸러기 아가씨를 깨우듯 다정하게 쓴 그의 메시지에 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와 옆자리에 앉은 뒤로는 언제 그를 볼 수 있을까 애타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내가 궁금해하던 사람이 알 수록 평온한 사람이어서 좋았다. 요란하거나 얕지 않은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손가락의 반지가 어머니의 반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내게 슬픔과 안도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어느덧 시험기간은 끝이 나고 나는 그게 몹시도 아쉬웠다. 그도 그랬던 걸까? 주말에 뭐 하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밀당의 여지도 없이 아무 계획이 없다고 했다. 화창한 토요일,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봄나들이를 떠났다. 그것이 첫 데이트였다.




그렇게 열여덟 번째 봄을 그와 함께 하고 있다. 4월에 대한 글을 쓴다면 이 꼭지를 꼭 써보고 싶었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담으면 한 권의 책은 거뜬히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글을 쓰다 감상에 취해있던 새벽, 이른 출근 준비를 하던 그에게 다가가 손가락 끝을 살며시 잡으며 이 글의 제목을 말했다.

"우리는 4월에 만났지."

방금 전까지 글 속의 풋풋한 20대 청년은, 큰 키의 슬림한 그러나 눈만큼은 서글서글하던 그는 순간 이동을 한 듯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예전보다 둥글고 확실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채우며. 돌아오는 그의 대답이 재미있었다.

"우리가 4월에 만났... 나? 뭐지...? 선유도 갔나??"

마치 중요한 기념일을 추궁당하는 듯한 전형적인 남편의 모습으로 동공이 춤추고 있었다. 깊게 웃으며 쩔쩔매는 모습이 좋았다. 한결같으면서도 마음 푹 놓게 편해진 우리 사이가 새삼 좋았다.


4월이다. 그때의 우리를 오버랩시키며 이 봄을 더 느긋하게 즐겨봐야겠다. 그의 기억력도 테스트해 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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