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생각난 그녀
언제까지나 서른 살, 막내 고모
눈을 떴다. 블라인드 너머 창밖으로 어스름 푸른 새벽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동안 그 푸르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곱 살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푸른 새벽이 검은 밤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집안의 공기는 젖은 이불처럼 묵직했다. 내복바람의 나에게 엄마는 오늘 유치원에 가지 않는다고 말해주셨다. 그날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이다. 아무리 일곱 살이라지만 이 기억뿐이라니... 해도 해도 너무했다. 그날 새벽, 함께 살던 막내 고모는 세상을 뜨셨다.
이제 갓 삼십 대가 된, 동그랗고 하얀 얼굴형을 꼭 닮은 큼직한 동그란 안경을 쓰던 막내 고모. 내가 고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출판사에 다니셨다는 것, 서울에 함께 살던 가족들이 부산, 대전으로 뿔뿔이 이사 가자 혼자 서울에 남아 자취 생활을 하셨다는 것, 그리고 위암. 아빠는 고모가 아팠던 게 서울에 혼자 두고 와서 제대로 식사를 챙기지 않아 그런 거라며 내내 마음 아파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되어 자취를 시작할 때 당부 또 당부하셨던 것이 이 이야기였다.
아픈 고모는 대전 우리 집에서 지냈다. 할머니도 계셨으니 이때 우리 식구는 여섯 명으로 가장 많은 때였다. 짙은 색의 교자상에 흰 죽, 그리고 작은 간장 종지가 떠오른다. 고모는 단출한 그 식사조차도 겨우겨우 넘기셨겠지. 고모와 같이 살았지만 살갑게 함께 논 기억은 없다. 고모는 너무 하얬고, 온화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다섯 살 때 다 같이 제주도로 떠난 여행이 고모를 위한 여행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고모는, 젊은 그 나이에 얼마나 오래 아팠던 것일까.
할머니도, 다른 고모들과 아빠도 유독 막내 고모만큼은 이름의 끝 자만 불렀다. "복아", "복이는" 이렇게 말이다. 막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었을까. 오 남매 중 셋째였던 아빠에게 네 명의 형제들은 그 의미들이 다 달랐던 것 같다. 그중 막내 고모는 아빠가 가장 좋아하던 형제라고 말씀하셨다. 어릴 적 나와 동생이 자매의 난을 한참 벌일 때면 이 이야기를 꺼내셨던 것 같다. 왜 막내 고모를 가장 좋아하셨을까? 먼 훗날 읽은 아빠의 글에서 그 이유를 조금은 발견한 것 같다. 어려웠던 유년 시절, 새벽 아르바이트를 가는 오빠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나오며 염려하던 그 작은 동생이 바로 막내 고모였으리라.
아빠의 오 남매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뜬 건 큰 아버지셨다. 아버지라는 말이 마치 커다란 양복처럼 느껴지듯, 푸릇푸릇한 군인의 얼굴이 내가 본 마지막 사진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 막내 고모,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추도 예배를 지내고, 다른 고모들은 서울 현충원의 큰아버지 묘소를 다녀오시기도 하며 우리는 먼저 떠난 가족들을 함께 기억한다.
하지만 막내 고모 이야기는 누구도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자주 잊고 산다. 고모가 돌아가시고 몇 해 동안 집에 연하장이 왔다. 우리 가족의 안부를 향한 시와 같은 글이었고, 춘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모의 친구라고 했다. 친구를 보낸 슬픔을 지고 그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렇게 그 친구분은 답장 없는 편지를 매해 보내오셨고, 나는 그때마다 '맞아, 고모가 있었지.' 떠올렸다. 하지만 희미해진 연하장처럼 모든 것이 점차 멀어졌다.
너무 늦기 전에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정말 아무 날도 아닌 오늘 새벽이었다. 그 푸른 어스름이 일곱 살의 그날을 불러일으켰고, 지금 남은 형제들에게 자리한 막내 고모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고모들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막내 동생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프기 전의 고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성격이었고, 무엇을 좋아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고모가 떠올랐을까. 어째서 이 이야기를 쓰고 싶어 졌을까. 얼마 전 읽은 한강 작가님의 <흰> 때문일까. 태어나자마자 떠난 언니를 생각하며 쓴 이야기가 내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이유가 있겠지. 혹 이유는 없더라도 의미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