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길 Apr 24. 2024

애처로운 봄꽃

작년의 봄은 올해와 같이 복잡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올해의 봄 이야기는 좀 복잡한 것 같다. 새싹들이 조금 눈을 뜨고 기지개를 해볼라치면 염치없는 칼바람과 비가 새싹이 생각하는 범주를 훨씬 벗어나 정신을 못 차리게 겨울을 덮어 씌워 아가들을 놀라게 했다. 어디 변덕스런 봄이라 한두 번 정도는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는 일주일, 아니 며칠을 못 지내고 꼭 같은 일들이 일어나 아가들의 기지개를 멈추게 하곤 했다. 나도 지켜보기 미안할 정도로 아가들의 봄은 멀고, 걸음걸이 또한 박자 맞추기가 어려워졌다. 튜울립이 정신을 가다듬고 자연에 대항하여 조금 꽃잎을 내밀어 보려고 할 때 여지없이 동장군이 몰아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곤 했다. 덩굴장미도 새 눈을 띄우고 태양을 맞으려 할 때,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동장군이 얼음을 갖다 부었다. 작약도, 모란도, 목련도, 나름대로의 노력으로 자연의 바람에 다가서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너무 애처로워 쳐다보기가 무안할 정도였다.     


 어쨌든 울 엄마가 목련의 봉오리에서 피어나고 그동안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이야기 좀 하려하면 심술궂은 바람이 엄마의 치맛자락을 훑어 떨어뜨리곤 했다. 이것은 목련의 아픔에 앞서, 엄마의 환생을 억누르는 것 같다. 살아생전에도 뜻대로 한번 해보지 못하셨는데 올해 몇 년 만에 찾아온 나의 창가의 목련, 엄마를 으스러지게 만들었다.


애처롭다는 말은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쓰면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을런지 몰라도 무언가 쳐다보는 눈의 주관에 따라서 각자의 생각보다 그 상황이 녹녹하지 못 할 때 쓸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아이의 상황이 다른 아이의 상황과 아주 다를 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상황에서 이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아주 예쁘게, 너무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을 보아도 애처롭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조용하고 안개 낀 호수에 수선화 한 송이가 고고하게 피어 있는데 꽃잎의 이빨이 빠지고 축 늘어져 있을 때는 쳐다보는 눈의 마음에 고귀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마음에 가득차지 않는, 슬픈 느낌으로 다가올 때는, 예쁘고 아름답다기보다는 약간은 애처롭다는 말이 그 꽃을 잘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꽃 자신도 이 세상에서 스스로는 가장 고귀하고, 자신을 따로 없는 꽃이라 생각하고 있으련만, 시간이 흐르고, 비가 오고, 안개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을 보면, '아! 세월이 이렇게 만드는구나'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요즈음의 봄꽃은 참으로 애처로운 것 같다. 싹이 틀 즈음에 날이 차가워지더니 얼굴을 좀 내비칠라하면 갑자기 추워져서 세포분열을 제어시켜 성장을 머뭇거리게 한다. 그래도 낮의 해 바라기로 살아 싹이 자라고, 꽃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하면 때마침 온도가 낮아지고, 비가오고, 어쩌다 조금이라도 얼굴을 내밀면 강한 비바람이 달려들어 고개를 꺾고, 삶을 축 늘어지게 한다.     


벌써 올 봄에 몇 번째인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비가오고 마음이 떨어지고, 심지어는 어렵게 피어낸 꽃에 벌 한 마리 다가오지 않는다. 그 많은 벌들이 해외여행이라도 갔는지, 수정이 되지 않아 씨앗을 맺지 못했다. 꽃들은 위기가 도래했을 때 꽃을 피워 자손을 만드는데 매개 곤충들이 없어져 자손을 만들지 못하니 그 또한 얼마나 애처로운가. 아마도 기후변화 탓에 매개 곤충도 할 일을 못하여 더욱 애처로울 수밖에 없다. 꿀벌도 자신의 일을 해야 삶을 이어 갈 수 있을 텐데, 요즈음은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    

 

 꽃을 보는 나의 관점에서도 너무 애처롭다. 모종을 심어두면 빗살이 너무 강하여 잎에 벌레 먹은 듯 온 잎에 구멍이 생기고, 찬바람은 이것조차도 보고 있질 못하고 휩쓸어 작은 몸을 난도질하여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심술을 넘어선, 생존을 손에 쥐고 흔드는 것이 현대판 정치와도 같다.     


매화에게 새벽이 다가와 봉오리를 깨우고 몇 날 따스하여 곱게 필까 생각했으나, 찬비가 찾아와 봉오리를 닫게 해버리더니 이윽고, 봄을 전하러 일어섰을 때는 해마다 찾아들어 반가운 눈짓으로 사랑을 나타내던 바람꾼들은 보이지 않았다. 각자의 일로 서로 도와 봄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프게도 매화는 그렇게 떨어져 갔다. 양귀비가 피고, 디기탈리스가 피고, 루피너스의 아름다운 아가씨 자태에도 총각들은 어디에 가 숨었는지 얼굴 한번 보이지 않는다.  

    

올해도 과일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은 너무도 확실하게 잡혀온다. 어제 농협 매장에 우리 마나님이 그토록 좋아하시는 참외를 몇 개 사러 갔더니 현실을 모르는 내가 어리석은지, 세상이 사람을 놀리는 것인지 허무한 구름만이 다가섰다. 조그마한-계란의 2-3배 정도의 크기, 절대로 4개의 크기는 아니었는데 4개짜리 한 봉지에 15,000원 하였고, 배는 비슷한 크기 한 개에 4,500원, 사과는 4,000원을 이마에 붙이고 있었다. 어느 것 할 것 없이 개당 4000원 이상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이제는 과일, 채소만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모순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 많은 과일밭이 사람의 손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과일이나 채소의 맛을 기대하는 가격에 사기는 어려워져 가고 있다. 매개 곤충도 대량생산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너무도 명백해 진다. 

앞으로는 더욱더 비닐하우스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정해진 공간에서만 매개곤충이 일을 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밥은 먹지 않아도 과일, 채소는 먹어야 한다는데 뻔히 보이는 미래에 대해서도 해결책을 내지 못하는 사람의 머리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이렇게 나의 정원에는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식물들이 나를 향해 데모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제, 소나무엔 송홧가루가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꽃가루 알러지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만 해야 할 것인지 대지의 여신에 제사라도 지내야 할 것인지 참 알 수가 없다. 나의 정원에는 이제 덩굴장미가 화력을 앞세워 진군하고 있다. 덩굴장미에게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장미는 자기 힘껏 자라서 예쁜 꽃만 피우면 된다. 그 향기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열매를 맺을 필요도 없어 매개 곤충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기에 마음 편하게 태양 빛의 조각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 좋다. 많이 피면 조금씩 꺾어서 이웃에 선물할 수도 있어 기다려지는 마음이다. 



                                                      [굳건히 피어난 모란]


조금 지나면, 방울토마토, 오이고추, 샤이먼 스켓, 굵직한 포도알을 내밀 바이올렛 킹도 힘찬 에너지로 꽃을 피울 것이고, 매개곤충이 필요할 텐데, 모두 나의 손으로 수정 시켜야 할 일이 눈앞에 선하다. 아니면, 벌을 사서 뿌리던가, 벌을 뿌리면 옆집에 피해가 갈 것 같아서  내 스스로 이일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기분 좋게, 작약, 모란이 힘차게 자라, 오늘같이 찬 봄비가 내리는 중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있어 참으로 기분이 좋다. 어떻든 봄은 나의 마음을 비집고 차고 들어오고 있다. 봄이라고 하기 에는 늙은 봄이 되고 있는 과정에서라도 마지막 힘을 내고 있는 봄꽃들에 화이팅을 외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오셨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