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도로 위의 나그네
대부분의 영업직 모집 공고를 보면 [운전 가능자, 자차 보유자]가 조건인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사무실 내 보다는 거래처들을 방문하는 외근이 많기 때문이리라.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 난 장롱 면허에 자차도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업무용 경차와 차량 보험을 지원해 주었다. 초반 3개월가량은 여기저기 참 많이 긁고 다녔는데, 사회초년생에 초보 운전인 나를 다들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고, 덕분에 지금은 어디 가도 부족하지 않을 운전 실력을 갖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회사 차량은 노란색 경차에 회사 표시가 대문짝만 하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 맨 앞에 정차할 때는 길을 건너는 아이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고는 했다.)
신입 사원 시절에는 거래처를 방문해서 이야기할 주요 이슈 사항들과 현재 회사의 주요 정책들 등을 상기하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는 경로를 따라가느라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점차 업무와 운전에 적응해 가면서, 서울 시내를 활보하는 시간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도한 솔루션은 역시 운전자의 친구 라디오였다. 주요 인기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과 주파수는 통달했고,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나중에는 DJ의 멘트에 혼자 대답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은 A씨는...(중략)" / "아이고, 저런...안타까워라!"
"오늘은 기온이 매우 낮습니다. 외투를 꼭 챙기세요." / "저는 내복 입었어여~~~"
"청취자 여러분 즐거우시죠?" / "네에!!"
두 번째 솔루션은 먹거리였다. 외근을 다니다 보면 필연적으로 점심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혼밥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기인지라 삼각김밥, 햄버거 세트 등을 구비해뒀다가 이동 시간에 먹으며 다녔다. 하지만 정장 차림에 흘리기 일쑤였고, 불규칙한 식사 시간과 영양소의 불균형으로 인해 살이 찌기 시작하는 부작용을 겪게 되었다.
위 두 가지 방법에 질릴 무렵,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자기개발이었다. 일산에서 강남까지 매일 한 시간 반 이상을 출퇴근하시는 C회사 K팀장님은 그 시간에 독서를(!) 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물론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에 따라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영어 라디오를 듣기 시도했다. 약 한 달간 꾹 참고 꾸준히 시도한 결과, 졸음이 너무너무 쏟아진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바로 포기했다.
10년 차가 된 지금은 위 모든 것을 하지 않는다. 다만 주위를 둘러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스케줄이 급하지 않다면 고속화도로보다는 인도를 낀 일반 도로 위주로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의 복장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하늘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자율주행 차량이 늘고 있어서 나도 언젠간 모 팀장님처럼 독서를 시도할 날이 올 수 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현재의 방법에 만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