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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 할 마음 꽃에 - 빅토리아 시대플로리오그래피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말 못 할 마음을 꽃에 담다
빅토리아 시대의 비밀스러운 언어, 플로리오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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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오그래피(Floriography)란?


플로리오그래피(Floriography)는 꽃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해 말 대신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하던 ‘꽃의 언어’를 뜻합니다. 특히 직접적인 사랑 고백이나 감정 표현이 금기시되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사람들은 꽃의 종류, 색, 상태, 건네는 방식에까지 의미를 담아 마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꽃말’과 ‘탄생화 문화’의 뿌리가 바로 이 플로리오그래피입니다.

오늘은 쉽게 말하는 ‘사랑해’, 그러나 그때는


오늘날 우리는 “사랑해”라는 세 글자를 메시지 하나, 이모티콘 하나로 아주 쉽게 전합니다. 손끝 몇 번의 움직임이면 마음은 즉시 전달되고, 감정은 곧바로 읽힙니다. 하지만 이토록 간단한 표현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감정은 절제해야 할 것이었고, 사랑은 속삭여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조차 조심해야 했고, 마음은 늘 예의와 체면 뒤에 숨겨져야 했습니다. 그 조용한 억압의 시대, 사람들은 입 대신 꽃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비밀스러운 언어, 우리는 그것을 플로리오그래피, 곧 꽃의 언어, 꽃말이라 부릅니다.


꽃은 ‘선물’이 아니라 ‘암호’였다


이 은밀한 소통의 문화는 동방에서 시작되어 오스만 제국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고, 특히 영국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하게 됩니다.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팽창한 도시, 엄격한 도덕률, 겉과 속이 다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꽃은 가장 안전하고도 우아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꽃다발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암호화된 편지였고, 받는 이는 반드시 꽃말 사전을 펼쳐 그 의미를 해독해야 했습니다.


꽃을 ‘어떻게’ 건네느냐도 뜻이 되었다


그들의 꽃말에는 놀라울 만큼 세밀한 규칙이 붙어 있었습니다. 꽃이 싱싱하면 희망과 지속을 뜻했지만, 시든 꽃은 상실과 거절을 의미했습니다. 오른손으로 건네면 긍정, 왼손으로 건네면 부정이 되었고, 가시가 제거된 장미는 더 이상 상처 주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꽃잎을 한 장 떼어낸 채 건네면 이미 마음이 훼손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장미 한 송이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문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에도 온도가 있었다

사랑의 고백은 가장 화려한 꽃으로 오갔습니다. 붉은 장미는 지금도 여전히 열렬한 사랑의 상징이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연인들은 조금 더 미묘한 감정의 결을 꽃에 담았습니다. 라일락은 아직 서투른 첫사랑을, 해바라기는 “나는 당신만을 바라봅니다”라는 일편단심의 고백을 대신 전했습니다. 말로는 하지 못한 사랑이 꽃으로 조심스럽게 번역되던 시대였습니다.

꽃으로 하는 거절, 꽃으로 하는 이별


가장 흥미로운 점은, 꽃말이 결코 사랑만을 위한 언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백을 받은 뒤 떡갈나무 잎을 건네는 것은 “우리는 친구로 남읍시다”라는 분명한 선 긋기였고, 노란 튤립을 돌려주는 것은 “당신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라는 절망적인 답장이었습니다.


바질은 노골적인 증오를, 백일홍은 변덕과 부재, 곧 “당신은 나에게 더 이상 의미 없습니다”라는 무언의 단절을 뜻했습니다. 말하지 않기에 더 차갑고, 꽃이기에 더 우아한 감정의 단절이었습니다.


200년이 지나도, 꽃은 여전히 말을 건다


200년 전 사람들은 말하지 못한 온갖 감정을 꽃에 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훨씬 자유롭게 마음을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꽃 앞에서만큼은 조심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위로도, 사과도, 고백도, 그리고 이별마저도 꽃에 실어 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의 꽃에 의미를 부여하며 탄생화를 찾아보는 그 작은 의식 속에도, 사실은 빅토리아 사람들이 꽃에 담아 나누었던 공감과 특별함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당신의 하루에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꽃은 무엇인가요.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면, 잠시 꽃 한 송이에 그 감정을 담아 바라보셔도 좋겠습니다. 말없이 건네도, 꽃은 언제나 가장 정확한 언어로 우리 마음을 대신 전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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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보 】

· 플로리오그래피는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한 ‘꽃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비밀 언어’입니다.
· 꽃의 종류뿐 아니라 신선함, 방향, 가시 유무까지 모두 뜻이 되었습니다.
· 사랑뿐 아니라 거절, 증오, 이별까지도 꽃으로 우아하게 전했습니다.
· 오늘날의 탄생화 문화 역시 그 시대의 ‘꽃으로 말하기’에서 이어진 감정의 유산입니다.


https://youtu.be/AmD89oNCmk0?si=m-xbQpjG316GrS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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