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의 『저주토끼』를 읽고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는 2022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로 지목된 작품으로, 신경숙과 황석영 작가의 책을 번역했던 안톤 허가 번역을 맡았다. 부커상 심사에서 <저주토끼>는 “마술적 사실주의, 호러와 SF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장르를 초월한 단편집”이라고 평가받았다.
지금부터 내가 『저주토끼』를 어떻게 읽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저주토끼』를 읽기 전에
1-1. 누구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소설집 『저주토끼』는 마치 누군가가 들려주는 비극적인 옛이야기와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작품의 서술 방식과 관련한다. 『저주토끼』 작품들에서 정보라 작가는 인물 간 대화나 수사적 표현보다는 내용 요약적 서술과 스토리 전달에 집중하고 있다. 이때 <저주토끼>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실도 아니고 신성하지도 않은, 슬픈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다. 실제로 단편 「저주토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나’가 전달해주는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쯤에서 사장이 뒷목을 잡고 쓰러져 그 길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개일 것이다.(28)
1-2. 인물 구조
소설집 『저주토끼』에 등장하는 인물들(혹은 로봇, 동물 등)에서는 공통적인 구조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신, 인간, 인간의 피조물로 이어지는 위계질서이다. 이는 보호자와 피보호자, 부모와 자식 등의 구도로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저주토끼」, 「머리」, 「덫」, 「즐거운 나의 집」,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재회」에서는 부모에서 자식, 손자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위계적 관계가 중요한 서사적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저주토끼」의 토끼, 「머리」의 배설물, 「안녕, 내 사랑」에서의 로봇 등 인간의 피조물과 인간 간의 관계, 「흉터」에서는 주인공과 그를 통제하려는 보호자의 관계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들 관계에서는 일종의 일방적 권위가 엿보이며 이러한 지배욕은 사건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1-3. 들어가기에 앞서
소설집 『저주토끼』는 총 10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 작품들은 어떠한 공통적인 분위기, 사고체계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 구조 등의 공통성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저주토끼』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을 몇 가지 문장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시간은 흐르면서 모든 것은 변화하며, 고정된 상태나 단절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은 늙어가고 세상은 마치 ‘모래 언덕(284쪽.)’처럼 시시때때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인간이 만들어낸 의미들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뒤를 봐주던 힘 있는 사람들이 그 힘과 지위를 잃었다.(27)
2. 위계와 전복, 그리고 그 중심에 놓인 인간이 아닌 것들
정보라의 소설에서 인간은 결국 몰락하고 위계는 전복된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토끼는 끊임없는 갉아먹기를 통해 결국 하나의 거대한 회사 조직을 무너뜨린다. 또한 인간의 배설물과 휴지조각 등으로 만들어진 ‘머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자라나 결국에는 ‘어엿한 성체를 이룬 존재(55쪽.)’가 되어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과정은 여성이 늙어 볼품없는 알몸이 되는 과정과 같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안녕, 내 사랑」, 「흉터」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행사하던 권위는 무너지고, 결국 그들은 몰락한다.
이때 기존의 위계 질서를 무너뜨리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 것들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하다. 「저주토끼」에서의 토끼, 「머리」의 머리. 「안녕, 내 사랑」의 로봇 등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피조물로서 자신을 탄생시킨 이들을 몰락의 길로 내몬다. 물론 「저주토끼」에서 본래 복수의 대상은 할아버지가 아닌 사장 가족이었지만, 결국 토끼는 불문율을 어긴 할아버지 또한 ‘죽어도 죽지 못한 채(34쪽.)’ 떠도는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이처럼 『저주토끼』 속 인간이 아닌 이들의 존재와 행위는 우리에게 일상에서 벗어난 감각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탄생한 존재들이며, 그리하여 복수가 시작되는 공간은 어디인가?
그 아이와 태어난 경로는 다르지만, 저 역시 어머니의 피조물입니다.(44)
3. 어둠 속 공간과 자궁의 이미지
『저주토끼』에서의 복수는 어두컴컴한, 밀폐되어 있다고 착각하나 사실은 외부의 밝은 곳과 연결되어 있는 그러한 공간에서 시작된다. 이는 「저주토끼」에 등장하는 지하실, 「머리」의 변기 속, 「안녕, 내 사랑」의 옷장 안, 「흉터」의 동굴 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갉아 먹힌 종이 부스러기와 토끼 똥(18쪽.)’이, 배설물과 ‘버린 것들(39쪽.)’이, ‘망가진 기계(129쪽.)’가 있고 대체로 인간은 이곳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피조물의 위치에 놓인 것들의 반격은 바로 이러한 잊힌 공간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유사한 속성을 가진 이 공간들은 어떠한 공통된 의미를 공유한다. 특히 이렇게 어둡고 닫혀 있는(동시에 밝은 공간과 연결되어 있는)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 혹은 존재가 생겨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결국 이 공간은 무언가가 탄생하는 장소, 곧 ‘자궁’의 이미지로 볼 수 있다. ‘검은 구멍(49쪽.)’이 난 변기 속 피조물이 ‘머리’라고 불리는 것 또한 아이를 낳을 때 머리부터 나온다는 점과 연관성이 있다. 또한 동굴에서 탯줄과도 같은 사슬에 묶여 있다가 ‘어느 날 동굴 밖의 세상에 내던져(175쪽.)’진 것 또한 태어남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곳 자궁에서 탄생한 피조물들이 인간에게 반격을 가하는 것이며, 그렇게 인간은 소설집 『저주토끼』 속 성장한 자식에게 외면당하는 부모와 같이 ‘역시 어머니의 피조물(44)’인 그들에 의해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저 장부나 정리하고 커피나 타다가 결혼하면 퇴직할 여직원일 뿐 토끼 전문가도 동물 전문가도 아니었으므로 그 의견은 무시되었다.(20)
꼬마는 먼지투성이 토끼 모양 전등을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다.(23)
4. 복수와 반격의 서사
앞서 살펴본 어둠의 공간, 그러나 ‘가려진 검은 구멍(49쪽.)’으로 외부와 연결된 자궁과도 같은 공간에서 복수의 씨앗은 생겨났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것들에 의해 인간이 몰락한다는 것이 중요해지는 지점은 소설집 『저주토끼』의 전반에 걸쳐 부모(혹은 보호자)가 표현되는 방식에 있다. 그들은 자식을 자기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그들의 젊음을 질투하거나 혹은 그저 방치하는 등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항거는 단편 「머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머리’의 발화로써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마치 인간이 신에게 대항하는 것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이렇게 피조물들은 어느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창조주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쓰레기 취급을 받(140쪽.)’는다고,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삶을 유지(320쪽.)’하고 있다고 말하며 창조주의 위치에 선 자들의 무책임을 비난한다. 이는 마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결국 피조물의 복수로 인해 그토록 무책임하고 무능한 인간은 무너진다. 그 결과로써 의미는 한순간에 무의미로 바뀌고,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연약함은 전면에 드러난다. 결국 토끼, 로봇, ‘머리’ 등 피조물과 자식들은 ‘완전한 내 것(127쪽.)’이 되지 못하고 아래에서 위로의 반격을 행한다.
(「저주토끼」의 경우 복수의 대상에 불문율을 어긴 할아버지가 포함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데, 결국 토끼 또한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불가능했다. 로봇이 인간을 칼로 찌르다니.(141)
5. 찰나에 진행된, 무의미로의 전환
복수의 결과 인간이 몰락함과 동시에 인간이 부여했던 의미는 한순간에 무의미로 변한다. 이때 「저주토끼」에서는 인간이 사회적 약속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들이 그 가치를 상실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차적으로는 ‘주문서와 계약서와 영업실적 보고서와 회계장부와 재무제표(23쪽.)’, ‘금고 안에 있던 현금과 수표, 어음(23쪽.)’ 등 인간(특히 성인)에게 의미 있는 것들은 토끼에 의해 종잇조각이 되어버린다. 나아가 어린아이의 뇌, ‘건강한 성인 남성(29쪽.)’의 몸 등 그토록 소중하고 강인해보이던 것들은 순식간에 부서진다. 즉 토끼가 갉아먹은 것들(돈이나 문서, 아이의 뇌, 건강한 육체)은 모두 우리들 사이에서 가치 있다고 공공연히 여겨지던 것들이었던 것이다.
「머리」에서는 주로 인간의 육체가 가지는 의미에 관한 관념들이 등장한다.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젊은 여성의 매혹적인 몸은 곧 늙은 여자의 알몸으로 변하고 ‘젊은 시절 자신의 윤곽(50쪽.)’을 가진 아이와 ‘자신의 젊은 얼굴(53쪽.)’을 가진 피조물을 보며 그녀는 질투와 덧없음을 느낀다. 이처럼 자신을 이렇게 볼품없게 만든 시간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그러한 무력한 인간을 ‘머리’는 ‘강제로 어둠 속으로 사라(16쪽.)’진 제조기법과 같이 변기에 처넣고 그 스스로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인간은 복수의 결과로 의미 있던 것을 잃거나 육체에 손상을 입기도 하고 복수를 마친 후 생존의 의미를 잃고 사라진 마을과 같이(「흉터」) 복수가 끝난 후의 상태를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이토록 무력하기 때문에 인간은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소설집 『저주토끼』의 인간들은 공통적으로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저주토끼」의 할아버지와 「재회」의 남성 인물은 ‘과거에 갇혀(322쪽.)’ 살아내고 있으며 「안녕, 내 사랑」 속 여성은 과거의 연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 ‘1호’를 놓지 못한다. 「저주토끼」의 사장 또한 자신이 무너지는 현실을 그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27쪽.)’
그 익숙한 낯선 얼굴에서 그녀는 젊은 시절 자신의 윤곽을 그대로 발견하고 놀라움과 대견함과 사랑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50)
6. 몰락함으로써 제기되는 실천
지금까지 『저주토끼』에서 의미 있던 것을 잃고 몰락하면서도 과거를 놓지 못하는 인물들을 보았다. 어쩌면 그러한 스스로의 집착이야말로 그들을 몰락시킨 진짜 원인인지도 모른다. 이때 이들의 몰락은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어떠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렇게 한순간에 의미가 전복되는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이 없다면 이 ‘뒤틀린 세상(34쪽.)’에서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를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다가 그대로 무너져 ‘과거의 유령(322쪽.)’이 되어버릴 것이다.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소설집 『저주토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너는 무엇이냐(38)’는 여자의 질문은 마치 절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도 같으며, 그 아래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실히 몰랐(169쪽.)’다. 모든 것은 변하며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는데, 우리는 어디서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 젊은 두뇌인가, 건강한 육체인가, 내가 가진 기억인가. 『저주토끼』 속 인간들은 몰락하면서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