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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하제 Jul 26. 2023

내가 중요해 일이 중요해?

연애와 가치관과 양보

나에겐 만난 지 반년이 되어가는 남자친구가 있다. 사실 이 말을 쓰면서 얼마나 만났나 생각해 봤는데 처음 만난 날부터 생각을 해도 4월이니 4개월이 채 안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만난 것 같나 생각해 보니 그만큼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공유하고, 심도 있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 것 같다. 


난대 없이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응당 그에 대한 불만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좋은 일이나 좋은 점은 친구나 가족에게 떠벌려 자랑하고 싶고 그럴 수 있지만, 이런 어두운 얘기는 일기장 구석에 나와 이자만 알 수 있도록 몰래 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친구가 마음에 든 것은 그의 가치관이 나와 잘 맞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며 '정신바짝 차려야겠다' 생각을 했단 말을 듣고, 나는 그에게 반했다. 나는 그 나이에 부모님께 투정 부리며 심한 사춘기를 겪고 있었을 때인데, 고등학생이 채 안된 나이에 혼자 잘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다짐을 했다니 너무 대견하고, 바르고 굳은 그의 심성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는 문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문신으로 새기고 싶은 글귀를 물어보니, '항상 노력하자, 매사에 부지런히 갈고닦자. 계속해서 정진하자' 대략 이런 세 개의 문구를 이야기했다. 한때는 문신이 쿨 해 보여해보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평생 안 하기로 마음먹은 나 인지라 문신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피부에 새기는 글귀로 그런 문구를 마음에 가지고 있다니! 나 역시 뒤처지는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자 하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나는 이런저런 생각만 하며 직접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는 퇴근 후에 실제로 일을 하러 가고는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직장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직장과 그 외의 플러스알파를 더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이렇게만 써놓고 보면 천생연분을 만나 자랑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그런 그에게 조금은 섭섭하고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있었다. 이번 한 주 그는 유난히 바빴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 모임이 있고, 청첩장을 받아야 하고, 어딘가 행사에 초청되어 가야 했다. 평소와 다르게 이번 한 주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놀러만 다니곤 했다. 그럼에도 그런 일들이 본인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누가 보면 그저 놀러 다니는 것처럼 보일만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내일 목요일에는 그가 일하는 여의도로 내가 출장 갈 일이 생겼다. 원래는 나도 여의도에서 아는 언니랑 만나서 오랜만에 술 한잔 할 생각이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일정이 파투가 나버렸다. 그러자 마자 나는 기쁜 마음에 카톡을 했다. '자기야 나 내일 약속 취소 됐는데 오랜만에 여의도에서 데이트할까요?'돌아오는 답은 '아 취소됐구나, 근데 이번주 너무 놀아서 내일은 일하러 가봐야 할거 같은데 어쩌지' 적당히 감정적인 동조를 해주며 아쉬움도 드러내며 안 되는 이유도 얘기하고 자신의 일정을 나에게 전달했다. 평소와 같으면 완벽하고 담백한 데이트 신청의 거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원주 그는 서울에 있는 장거리 커플인지라 평일 저녁 데이트는 굉장히 특별한 일정이다. 내가 무리해서 서울에 가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 없는 일이다. 처음엔 '그래 어쩐지 이번주에 열심히 놀더라, 일도 좀 해야지, 이게 내가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퇴근하고 집으로 어슬렁 거리며 들어오는 길에 문득 '아니 근데 이번주 신나게 놀아놓고, 그 목요일 저녁 세 시간 일 더 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나?, 내가 그가 하는 일보다 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며 화가 났다.



물론 아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나를 아끼고 많이 생각한다. 이른 아침 원주로 가기 위한 셔틀버스를 탈 일이 있으면 아침잠을 포기하고 나를 셔틀 정거장까지 바래다 주기까지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속상하고 섭섭하다. 이런 내 감정을 숨기고 싶지도 않지만, 그가 내 어수룩한 감정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싫다. 입장 바꿔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그가 싫어하거나, 본인 만나자고 하면서 못하게 하면 적잖이 귀찮고 스트레스받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참을 쓰고 나니 감정이 좀 추슬러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시간이 좀 흐르고, 서로 기분이 좋을 때, 사실은... 하면서 오늘밤의 감정을 꺼내어 고백해야겠다. 


그래도 그렇지, 솔직히 좀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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