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봐도 입을만한 옷이 없다. 옷장을 뒤지고 뒤져서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겨우 찾아내 거울 앞에 섰다. 평소에는 거의 입지 않는 스타일이라 어색하긴 해도 그냥저냥 봐줄 만은 한 것 같다. 귓불에 딱 붙는, 반짝이는 귀걸이도 꺼냈다. 오늘은 한껏 멋을 부리고 싶은 날이다.
남편과 딸은 롤러스케이트장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좋은 남편이자 자상한 아빠인 남편은 딸이랑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요리도 잘한다. 부녀의 하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남편에게 딸을맡기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깜짝 놀라곤 했다. 늑대소녀 친구쯤으로 보이는 헝클어진 머리 모양새에 기가 찼는데 이제는 남편이 머리까지 야무지게 묶을 수 있게 됐으니 사소한 걱정마저 사라졌다. 두 사람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친구들과는 신사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 셋은 나란히 가로수 길을 걸었다. B와 K는 나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20년이 넘도록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모두 엄마가 된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것도 쉽지 않지만, 결혼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던 사이였다. B와 나는 논현동에서 직장을 다녔고, K는 학동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퇴근 후에는 항상 신사역에서 만나 ‘가로수길’까지 걸었다.
가로수길 끄트머리에는 ‘한 잔의 추억’이 있다. 눈길을 사로잡는 휘황찬란한 상점이 즐비해도 우리가 향하는 곳은 한결같다. 땅값 비싸기로 이름난 거리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호프집, ‘한 잔의 추억’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90년대부터 영업을 해왔으니 어림잡아 3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이다. 원래 상호는 ‘한 잔의 추억’인데 세월의 흐름 탓에 간판에서 ‘잔’, ‘의’, ‘억’이 떨어져 나가 ‘한추’만 남은 모습이 정겹다.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면과 팽이버섯을 잔뜩 넣은 ‘한추 떡볶이’와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낸 ‘고추튀김’을 주문했다. 거기에다 생맥주 한 잔이면 예나 지금이나 부러울 것이 없다.
‘한 잔의 추억’은 기분이 눅눅해지는 날이면 꺼내보는 소중한 사진 같은 장소이다. 그곳을 떠올리면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B와 K가 있다.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함께 고민해 주었던 B와 무심해 보이지만 묵직하게 필요한 말만 골라 건네던 K가 있었기에 나의 젊은 날은 행복했다.
인생이 도통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한 잔, 직장 상사가 속을 뒤집어서 한 잔,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해서 한 잔, 남자 친구랑 싸워서 한 잔, 승진한 날에도 한 잔, 이직을 축하하며 한 잔, 새 남자 친구를 자랑하느라 한 잔. 20대의 우리는 이곳에서 기뻐하고 슬퍼했다.
‘한 잔의 추억’은 안주가 맛있기로도 유명하지만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시끄럽기로도 소문난 곳이다. 소음을 싫어하는데 희한하게도 이곳의 소음은 거슬리지 않았다. 큰 소리로 친구들과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며칠 동안 나를 괴롭혔던 문제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도 했고, 내일은 오늘보다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피어나기도 했었다.
감염병으로 인해 3년 만에 이뤄진 만남인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익숙한 장소에서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스물 다섯 언저리로 돌아가 있었다.결혼과 출산, 육아를 하는 동안 관계가 멀어졌다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성글었다촘촘해지기를 자연스럽게 반복하면서 우리 사이는무르익었다. 언제 만나도 반갑고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그런 사이다. 헤어지면서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서 만날지는 알고 있다. ‘한 잔의 추억’에서 이어가게 될 우리들의 다음 이야기가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