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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Aug 21. 2022

[어딘글방] 친절한 사람들 _ 보래

자기객관화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작가와 등장인물의 거리두기에 대해 종종 이야기한다.  글 속의 등장인물이 ‘나’여도 그건 리얼한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재구성된 나’임을 상기하자고. 그런데 보래의 글 ‘친절한 사람들’을 합평하면서 어쩐지 나는 자기객관화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 자기객관화란 작가 자신과 작가의 경험을 글 속으로 온전히 밀어넣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글 속의 ‘나’는 또하나의 내가 된다. 글 속의 등장인물로서 ‘나’는 다른 등장인물들과 싸우고 갈등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는다.  세계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작가가 세계를 드러낼 때 독자는 그 세계를 함께 조망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과 소통하고 공감한다. ‘친절한 사람들’ 속 지은을 어찌 응원하고 지지하지 않을 수 있는가.  존중하지만 연민하지 않을 때  이해하고 조율할 수 있다.  이번 글의 가장 큰 미덕은 자기객관화에서 나오는 여유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 문장은 얼마나 근사한가. 사피엔스의 가장 큰 미덕이 유머라고 나는 생각한다. 보래는 유머를 다룰 줄 아는 작가다.





친절한 사람들


보래



네가 출근하다 차에 치여 뒤져버렸으면 좋겠어. 잠에서 깨 휴대전화 메시지 함을 연 지은은, 어젯밤 그녀의 아버지가 보냈던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시원에서 나온 지은이 길을 건넌다. 어디선가 나타난 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그녀에게 돌진한다. 부딪힌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붕, 하고 저 멀리 바닥으로 떨어진다. 쾅.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이 난다. 거기까지 상상하고 나면, 뼈 사이사이에서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녀를 잠식해버리는 것 같았다.


지은은 그녀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마침 이틀 뒤면 크리스마스였고, 지은이 회사에서 여태 쓰지 못한 여름휴가가 일주일이나 남아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한 달 뒤, 그러니까 새해 첫 달 월급에 고스란히 포함될 것이었다. 고시원을 나갈 때 월세방 보증금에 보태려 했던 돈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머뭇거리던 지은이 휴대전화로 항공권을 검색했다. 그리고 당장 오늘 안에 출발할 수 있는 비행편 중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비행권을 끊었다. 다섯 시간 뒤 출발하는 터키행 항공권이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대기석에 앉아 비행기 탑승 알림을 기다리던 지은은 어디선가 읽었던 문구를 떠올렸다. 아니, 그건 완벽하게 틀린 말이다. 어딘가로부터 도망친 사람이라면, 당도할 곳이 낙원이길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지옥에서 조금만이라도 멀어지길 바랄 뿐. 그거면 충분하다. 지은은 단 며칠간만이라도 제 또래의 평범한 사람처럼 웃고 떠들고 싶었다. 밝게 빛난다는 청춘을 티 없이 즐길 수 있길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국에서 다시 버텨볼 힘이 생길 것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지은의 인스타그램 앱엔 하루 사이에 서른 개가 넘는 게시글이 새로 올라와 있었다. 누군가는 친구들과 호텔에서 파티 중이었고, 누군가는 파인 다이닝 식당에서 가족과 송년회 중이었다. 지은도 방금 찍은 활주로 사진을 업데이트했다. 순식간에 하트 모양의 좋아요가 일곱 개나 눌렸다. 드넓은 하늘. 저 멀리 지평선까지 시원하게 뻗어나간 회색 아스팔트 위를 가볍게 달려 가뿐하게 이륙하는 비행기. 그녀도 삼십 분만 지나면 비행기 위에 올라 다른 세계로 갈 터였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한 건 새벽 다섯 시였다. 열세 시간이 넘는 비행의 피곤함이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 곳곳에 묻어있었다. 그들은 분주하게 캐리어를 찾아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항을 가득 채운 뭐라 형언하기 힘든 낯선 향신료 냄새가 지은의 코안으로 훅, 들어왔다. 지은은 코로 숨 쉬는 것을 멈추고 입으로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몸 안을 낯선 땅의 공기로 가득 채우겠다는 듯이. 은근히 들떠있는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우두커니 캐리어를 들고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 곁을 지나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지은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해브 어 나이스 트립. 지은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이스틱 클락 거리는 한산했다. TV에서나 봤던 시원시원하면서 투박하게 높은 유럽풍의 고딕 양식 건물들이 지은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 특징 없는 잿빛 빌딩이나 붉은색 벽돌 건물만 봐왔던 지은이었다. 지은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건물의 층마다 사람 키보다 더 높은 아치형의 큰 창문과 테라스가 달려 있었다. 지은은 오만 원짜리 옵션이었던 고시원 창문을 떠올리며, 저런 게 옵션이면 고시원에서 얼마를 더 받으려나 값을 매기다 웃음이 났다. 새벽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낯설게 느껴졌던,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특유의 냄새도 견딜만하게 느껴졌다. 형광 작업복 차림의 청소부가 커다란 빗자루로 거리를 쓰느라 분주했다. 빗질 소리마저 근사하게 느껴졌다. 지은이 살던 곳과 완벽하게 다른,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땅. 지은은 가슴이 벅차기까지 했다.


어머니, 우리 도망가요.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어요. 아버지의 손찌검 한 번이 세 번, 열 번이 되는 걸 견디다 못한 지은이 어머니에게 무릎 꿇고 빈 적이 있었다. 얘, 네 아빠가 사람들 상대하느라 힘들어서 그래. 그래도 그 사람 덕에 이렇게 먹고살지 않니. 난 자신 없어. 어머니가 말했다. 지은은 그때 알았다. 겉으로는 너무나 멀쩡해 보이지만 속이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져 버린 가정의 다음은 없다는 것을. 너무 많이 맞아 도망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여자는 희망도 품지 못한다는 것을.


어디론가 도망가는 꿈을 꾸게 된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늦은 밤, 방문 밖에서 들리던 둔탁한 마찰음과 신음, 욕지거리 따위가 잦아들고 나면 지은은 마치 깨끗한 성수로 머릿속을 정화라도 한다는 듯이 아무 여행 에세이 책이나 펼쳐 그녀에게 영감을 주는 단어들에 동그라미를 쳤다. 운명, 환대, 우연, 기회, 청춘. 아무도 그녀를 모르는 곳에 떨어져 완전히 새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머무는 곳이 달라진다면, 쓰는 언어가 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몸속에 녹아있는 이 어두움과 절망, 슬픔, 고통도 다 사라져버릴 것이다, 완벽하게. 언젠가는 나도 그런 것을 가질 날이 올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지은은 그렇게 그녀 자신을 다독여왔었다.


여기는 정말 다른 세계다. 이곳 터키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어차피 이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지은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보기로 했다. 밝고, 상냥하며,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구김살 하나 없이 낯선 사람에게도 먼저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며칠 동안 그녀에게 찾아올 우연한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스물여덟 살 청춘을 당연하게 누려온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어머니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행여나 아버지에게 연락이 올까 봐 휴대전화 로밍도 꺼두고, 와이파이만 연결해서 지도 앱과 검색엔진만 가능하게 만들어두었다.


지은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이층침대 여섯 개가 놓인 공동 침실을 배정받았다. 이미 그녀 말고도 두 명의 여자가 더 머물고 있었다. 럭키 걸이네. 원래대로라면 연말이라 꽉 찼을 거야. 관리자가 지은에게 방을 안내해주었다. 공동 침실이라고는 해도, 그녀가 원래 고시원에서 머물던 방보다 열 배는 더 넓은 크기였다. 노란색 페인트칠이 칠해진 벽에는 Forever Young, 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고, 그 옆으로 이미 다녀간 여행객들의 엽서가 잔뜩 붙어있었다. 지은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가장 안쪽 이층침대 아래 칸에 지은은 대자로 벌러덩 누웠다. 항공권을 끊을 때부터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으로 인해 쌓여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처음 타본 비행기, 낯선 타국의 냄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생경한 외모의 사람들. 지난 스물네 시간이 오십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짐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오전 열 시 이십 분. 조식은 열한 시까지라고 스태프가 일러준 게 떠올랐다. 맞은편 침대에는 백인 여자 둘이 곤히 자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속옷만 입고서, 번진 마스카라와 엉킨 머리칼이 틴 에이지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 같았다. 어제 광란의 파티를 즐기셨군요. 지은은 그녀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지하에 있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따뜻한 조명이 테이블마다 켜져 있고, 라디오에선 재즈 선율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여기저기서 독일어, 프랑스어 등 지은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적당히 소란스럽게 들렸다. 부엌 한편에는 음식이 뷔페식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향신료 냄새와는 또 다른, 낯선 이에게서 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이질적인 냄새들이 음식과 뒤섞였다. 찐득해 보이는 떡 모양의 네모난 케이크는 인기가 많은지, 이미 접시가 절반 이상 비어있었다. 지은은 아쉽지만 먹지 않기로 했다. 괜히 낯선 음식을 잘못 먹고 탈이 나선 곤란했다.


바게트 몇 조각, 그리고 적당히 식은 블랙커피가 그녀의 선택이었다. 화려한 조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배가 부를 때까지 양껏 먹을 수 있으며, 좁은 싱글 침대 위에서 아빠 다릴 하고선 옆 방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숨죽인 채로 입에 음식을 욱여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녀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다. 왠지 이번 여행은 뭐든 잘 풀릴 것 같아. 지은은 바게트 조각을 입에 넣고 천천히, 오래오래 씹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눠주는 관광 안내 책자엔 이스탄불 필수 코스로 아야소피아 성당, 갈라타 타워, 고등어 케밥이 적혀있었다. 지은은 어디서부터 둘러보면 좋을지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어 순서를 매기다 그만두었다. 그녀가 읽어왔던 여행 에세이에는 준비된 계획 없이 이뤄지는 것이 많았고, 지은 역시 그런 우연을 바랬기 때문이다. 예기치 않은 만남과 그로 인해 만들어질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들을, 지은 역시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산책에 필요한 옷가지를 챙기러 방으로 돌아간 지은은, 잠에서 덜 깬 여자 둘과 마주쳤다. 그녀들은 우정 여행 겸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러 프랑스에서 왔다고 했다. 굳이 남의 나라까지 와서 파티라니, 유럽 애들은 스케일이 남다르네. 지은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은이 꿈꾸지 못한 것 중 많은 부분은 타고나야만 가능했다. 예를 들자면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태어날지 같은 것. 어떤 부모에게 태어날지는 천운에 가까운 것으로, 결코 그녀가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이었다.


보일러 수리기사였던 지은의 아버지는 이달의 친절 직원으로 상을 일곱 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달랐다. 매일 밤 술을 마셨고, 무언가를 깨부쉈으며, 가족 중 누군가를 때려야만 성이 풀렸다. 어느 날은 식탁 위에 놓여있던 김치 담은 그릇이 깨졌고, 어느 날은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진 피가 방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졌으며, 어느 날은 아버지를 말리던 지은의 맨투맨 팔이 흉하게 찢어졌다.


지은이 대학 졸업 후 3년 동안 고배를 마시다, 작년에 처음으로 A 기업 계약직에 합격했을 때였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말했을 때, 소주를 세 병이나 마신 그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이 멍청한 년이.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회사에 계약직으로 취직시키려고 내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돈 대준 줄 알아?


노발대발하는 지은의 아버지를 어머니가 말렸다. 아버지 언성이 더욱 높아졌고, 마침내 소주잔을 쥐고 있던 아버지의 둔탁한 손이 어머니에게 향했다. 지은의 몸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덮었다. 징그럽도록 익숙한 알코올 냄새. 지은의 등 위로 뜨거운 무언가 흘러내렸다. 바닥에 피 묻은 유리 조각들이 뒹굴었다. 그러니까 네 년들이 나대지 말았어야지. 지은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수 없어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지은은 그대로 집을 나와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니 지은의 숨통이 좀 트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아버지는 고시원에 사는 지은에게 밤마다 전화를 걸었다.


내가 들인 돈이 얼만데, 다 내놓고 가 이 년아.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를 들먹였다. 네 엄마가 자식새끼를 이렇게 가르쳐서, 개 같은 년이. 아버지 목소리 뒤로 어머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은은 전화번호를 바꿀 생각도 해봤지만, 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아버지의 전화는 가정폭력의 증거가 될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은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버지 전화를 모두 녹음했고, 문자도 삭제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문자는 지은이 현실을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친구들과 만나 저녁을 먹고, 모 연예인 커플의 성대한 결혼식 이야기 같은 시시껄렁한 가십을 들먹이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속없이 웃은 뒤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지은은 집에 있는 어머니에게 문득 미안해졌고, 아버지가 보낸 문자들을 들여다봤다. 그러면 잠깐이나마 훈훈했던 가슴이 서늘해졌다.


왜 하필 지금, 지은은 부모님이 떠올랐을까. 그녀들이 너무나도 티 없이 밝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마스카라가 번져 팬더가 되었으며 얼굴이 팅팅 부어도 가려지지 않는, 지은에겐 없는 어떤 밝은 기운이 너무 부러워서. 어쩌면 나도. 만약에 내가. 유럽에서,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지은이 먼저 나가보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파티 올래? 별일 없으면 우리랑 같이 놀아.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 초대. 어느 거리를 걷다 마침 열리고 있던 축제에 참여하고, 현지인 가족의 초대로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들. 그녀가 원했던 낯선 사람들이 보낸 초대장이 그녀에게도 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최대한 현지인처럼 굴어야지. 지은은 관광객 특유의 호들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행 에세이 속 주인공처럼 자연스럽게, 조금은 심드렁하다는 듯이 머물다 가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어떤 특별한 경험이 그녀에게 찾아올 것 같았으니까. 지은은 느린 걸음으로 목적지 없이 이스탄불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관광객들과 현지인이 거리 곳곳에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동양인보다는 서양인들이 많았는데, 지은은 그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 터키라는 곳에서만큼은 한국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나 자신으로 지내다 가기에 방해될 것 같았으므로 어쩌다가 한국말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아예 자리를 피했다.


이스탄불 사람들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지은과 눈이 마주치면 먼저 눈인사를 하거나 능청스럽게 니하오, 하고 말을 걸었다. 지은은 외국인들 눈에 아시안이 다 똑같이 보인다는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그게 인종차별이라고 했지만, 지은조차도 터키 사람들이 다 비슷하게 보였으므로 상관없었다. 그런 건 여행의 낭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인종차별이라고 화내는 대신 지은은 아임 낫 차이니즈, 하고 장난스럽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인사를 건넨 사람은 곤니찌와, 로 말을 바꿨다. 그녀가 더 곤란한 표정으로 노노, 아임 코리안, 이라고 말하면, 터키 사람도 따라서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인사하는 것 자체가 지은에겐 생경한 일이었다.


그녀가 사는 고시원, 그러니까 한 층에 한 평짜리 방 서른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곳에서는 옆에서 사람이 다가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굴었으니까. 낯선 땅에서 낯선 이에게서 받는 친절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한참을 걷던 지은이 처음으로 들른 장소는 우습게도 스타벅스였다. 한국의 스타벅스 내부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터키 스타벅스를 검색해보았다. 대형 프랜차이즈답게 전 세계 어느 지점을 가도 비슷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커피의 맛이나 냄새, 컵에 이름을 써주는 것까지 같다고 쓰여있었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낯선 타인들 사이에서 낯설지 않게 머무를 수 있는 곳. 지은은 오히려 그런 분위기에 안도했다.


어디선가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지은이 고개를 돌리니, 회색 점퍼를 입은 오십 대 아저씨가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지은이 그를 보고 작게 미소를 짓자,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 니하오.

- 하이. 아임 낫 차이니즈, 코리안.

- 오 코리안, 웰컴 웰컴. 아워 브라더 컨츄리, 위 아 프렌즈.


형제의 나라라더니, 정말 이곳 사람들은 아무한테나 거리낌이 없구나. 그 남자는 명함을 건네주며, 자신이 기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동양사람을 너무나 좋아한다며, 괜찮으면 함께 사진을 찍어줄 순 없는지 물었다. 평소였다면 지은은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은은 조금 들뜬 마음으로, 흔쾌히 그와 사진을 찍었다. 그는 지은에게 인스타그램을 하느냐고 물었다. 왜? 이 사람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가? 외국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로 지낸다고 하던데. 지은은 그와 연이 닿아서, 몇 년 뒤에도 다시 터키에 방문해 그와 차를 마시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걸 상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인스타그램 계정을 알려주었다. 꼭 연락해, 내가 곧 약속이 있어서.


저녁 일곱 시, 그녀는 룸메이트 둘과 약속했던 바에서 만났다. 그녀들은 이미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지은이 그녀들을 향해 안녕, 하고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들은 통성명부터 다시 했다. 백인 여자 둘은 미첼과 수잔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물한 살의 대학생이었다. 파리 7대학 경영학과에 다니는 그들은 영어와 불어,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지은이 감탄하자, 다들 3개 국어는 기본으로 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지은은 이렇게 쉽게 여러 나라를 오갈 수 있는 환경에 사는 그들이 부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젊음을 끝없이 낭비해도 되는 것처럼 지낼 수 있는 특유의 천진함이 부러웠다.


지은은 자신이 몇 살이고,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 따위를 말해주었다. 오랫동안 취업을 준비했다던가, 이제 겨우 취직해서 일하게 되었다는, 그게 중소기업이고 계약직이었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못했다. 아는 단어 몇 개를 조악하게 조합한 문장으론 어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학을 졸업하고, 그들도 아는 글로벌 기업에 취직한 사람이 됐다.


대화는 한 두 마디 이상 진전되는 법이 없었다. 지은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책에서처럼, 앞으로의 인생 계획이나 찐한 첫사랑 같은, 속 깊은 이야기를 그녀들이 해주지도 않았고, 분위기가 훈훈하게 흘러가지도 않았다. 미첼과 수잔은 지은에게 대체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지루해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들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자, 지은은 초조해졌다.


낯선 사람들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다고 쓰여 있었더라? 지금까지 읽어온 여행 에세이를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반가움, 설렘, 훈훈함 등의 어떤 정서만이 기억날 뿐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저 숙소에 가겠다고 중간에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은은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짓고 그녀들의 말에 자주 웃었다. 너무 노력한 나머지 입 주변에서 경련이 일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빠른 속도로 그들만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지은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마치 그 대화에 여전히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고,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으려 애쓰는 것뿐이었다.


연신 빠르게 들이켠 맥주 탓에 취기가 올라 지은의 얼굴이 벌게졌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이 영어와 불어와 터키어로 만들어내는 소음들과 섞여 요란하게 들렸다. 미첼과 수잔이 앉은 쪽의 창 너머로 갈라타 타워가 보였다. 화려한 조명 탓에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빛났다. 지은은 미첼, 수잔과 함께 인증사진을 찍었고 곧바로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오늘 만난 파리에서 온 따뜻한 동생들, 이라는 글과 함께.


다음 날, 지은이 일어나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다시 스타벅스였다. 어제 잔뜩 긴장한 채로 파티에 있던 탓인지, 여기저기 피곤했다. 테이블에 앉은 지은은 휴대전화를 열어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았다. 지은이 어제 올린 파티 사진엔 좋아요가 칠십 개였다. 오, 친구들을 글로벌하게 사귀네. 역시 한국에서 인싸는 터키에서도 남달라! 지은의 친구들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후후, 내가 좀 하지. 지은이 댓글을 달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지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Hello, Miss.


그녀보다 조금 작은 체구에 깡마른,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이 그는 지은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얼굴에도 살이 없는 탓인지, 그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옆으로 주름 여러 개가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지은이 입 모양으로 하이, 라고 말했다. 그는 지은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이란 말을 몇 번을 하는 건지, 내 출신 국가가 이렇게 중요해지다니.


- 형제의 나라에서 왔구나. 그럼 우리도 친구지. 


지은이 웃었다. 그 말 할 줄 알았어. 


- 뭐하던 중이었어?


지은이 나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은보다 일곱 살이 많은 그는, 이스탄불에 좋은 관광 코스를 많이 알고 있다며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 갈라타 타워에 가자. 뷰가 정말 끝내주거든.


현지인이 직접 관광지를 안내해준다니 이게 웬 행운이야. 지은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오지랖 넓고 상냥한 터키 사람이니까. 거봐,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까. 여행 에세이에서나 본, 우연한 행운이 비로소 지은에게 시작된 것 같았다. 지은은 게스트하우스 게시판에 붙어있던 갈라타 타워 설명을 떠올렸다. 이스탄불은 특이하게도 보스포루스 해협을 중심으로 유럽 지역과 아시아 지역이 나뉘어 있는데, 타워 꼭대기에 오르면 이스탄불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했었다. 그녀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검은 재킷의 남자는 그녀를 이끌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검은 재킷의 남자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나란히 지은과 길을 걷다가, 지은이 호기심 보이는 게 나타나면, 지은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걸음을 멈췄다. 가령, 작은 골목 상점에 진열되어 있던 커다란 눈 모양의 장신구나 터키시 딜라이트 같은 것들을 볼 때 그랬다. 그는 눈이 똥그래진 지은에게 어떻게든 설명해주려고 노력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갈라타 타워 매표소 앞에서, 지은은 검은 재킷의 남자와 헤어졌다. 그가 지은만 들어가라는 표시를 해 보여서였다. 고마웠어, 잘 가. 지은이 수줍게 웃었다.


아파트 10층 정도면 이 정도 높이일까. 갈라타 타워 위에 오르니 도시 전망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설명에 씌어있던 대로 유럽지역과 아시아 지역을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 위로 유유히 지나가는 배들이 보였다. 이마 위를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저 멀리서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새. 떠나오길 잘했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그저 눈앞의 탁 트인 풍경을 즐기는 것. 가슴 안에 복잡하게 얽혀있던 감정이 바람에 날려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봤으면 좋아했겠다. 분명히 그랬을 거야. 지은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지은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몇 장 찍고 인스타그램에 곧바로 올렸다. 이스탄불의 뷰 맛집, 이라는 문구와 함께. 마침 근처 이슬람 사원에서 종이 울렸다. 아주 느린 속도로 웅장하게. 탑 아래 거리를 걷고 있던 사람 중 일부가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들이 모시는 신을 향해 절을 하는 거라고, 옆의 영국인 가이드가 자신의 일행들에게 설명해주는 소리가 들렸다.


어, 왜 안 가고 날 기다리고 있지? 탑 위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지은이 일 층으로 내려왔을 때, 매표소 입구 앞에 여전히 검은 재킷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건물 벽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그녀 쪽으로 다가온 그가 물었다. 이제 뭐 할래? 지은은 왜 자신을 기다렸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기 싫었다. 지은이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였다.


- 글쎄, 아직 다음 일정이 없긴 한데.

- 고등어 케밥은 먹어봤니? 근처에 유명한 데가 있어. 


좋아, 지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쁘다는 듯이 두 손을 쭉 하고 하늘을 향해 만세 자세를 취했다. 이쪽으로 가시죠, 미스.


이스탄불의 명물이라는 고등어 케밥이었다. 현지인이 소개하는 맛집으로 먹으러 가고 있다는 사실에 지은은 마음이 들떴다. 어느새 주위가 어둑해져, 거리의 가로등에도 불빛이 들어왔다. 지은의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 관광객은 많이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현지인이 가는 식당은 시내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검은 재킷의 남자가 아까보다 지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느껴졌다.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지은과 검은 재킷의 남자를 흘끔거렸다. 혼자서 거리를 거닐 때 지은에게 인사를 건넸던 사람들의 표정과는 무언가 달랐다.


그때쯤이었다. 검은 재킷의 남자가 지은의 손가락 사이 안으로 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집어넣었다. 마치 연인 사이인 것처럼. 지금 이게 뭐지. 당황한 지은이 깍지를 빼냈다. 그러자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이건 좀 불편해? 그렇다면.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아예 지은을 감싸 안듯이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어,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지은이 다시 그의 손을 내렸다. 검은 재킷의 남자가 와이낫, 하는 표정으로 다시 손을 올리려 했다. 그냥 가자. 나 안 갈래. 그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듯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뭐야, 지금까지 잘 놀아놓고선.


지은의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건 그녀가 상상했던 범위 내에서는 전혀 없었다. 지은이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지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 다시 생각해봐,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고 하는데.


미안, 나 속이 별로 안 좋아. 그와 걷던 반대편으로 지은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가 등 뒤에서 그녀를 계속 부르며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Miss, Miss!


한참을 걸어 숙소로 들어온 지은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가 가락지를 꼈던 손, 그녀를 감싸 안으려고 하던 그의 동작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누워있던 지은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은 재킷의 남자 때문에 여행 전체를 망칠 순 없었다. 그때 아주 기분 더러웠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될 거라고, 그녀 자신에게 신체적인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니니 그걸로 되었다고 불편한 마음을 스스로 달랬다.


다음 날 아침, 미첼과 수잔이 지은에게 다가와 현지 투어를 같이 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지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더는 억지웃음을 짓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급하게 한국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한국 여행사에서 운영한다는 현지 일일 투어를 신청했다.


현지 일일 투어에는 가족 단위거나 커플 등의 관광객이 대부분이었고, 나 홀로 여행객은 지은뿐이었다. 형제 한 팀, 일곱 살 딸이 있는 부부 한 팀, 지은의 어머니 또래의 자매 둘, 그리고 지은까지 여덟 명. 낯선 타지에서 한국인들을 만나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아, 이거였어. 한국 사람들을 모른 척하고 싶었던 어제까지와는 정반대의 감정이었다. 투어 가이드도 한국 사람이어서 좋았다. 가이드의 음성이, 그녀의 주변에서 일행이 내뱉는 한국말들이 편안하게 들렸다.


지은 일행을 이끌고 가이드가 처음으로 간 곳은 현존하는 비잔틴 건축물 중에서는 최고라는 성소피아 성당이었다. 이슬람 사원같이 생긴 건물 내부에는 커다란 돔 안쪽에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자이크가 그려져 있었다. 십 미터가 넘어 보이는 높은 길이의 천장에 황금색으로 칠해진 모자이크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가이드는 미리 준비해둔 클리어 파일을 꺼내 성소피아 성당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참고 사진을 곁들어 보여주면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지은 성당이지만 한 차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고, 다시 박물관이 되었다가 지금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묘한 곳이 되었다고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배경지식 없이 탑에 올라 경치 구경에 몰두했던 지은은 어쩐지 그녀의 여행 방식이 잘못되어서 그런 일을 겪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내일 역시 한국인이 운영하는 또 다른 투어를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이드가 일행에게 둘러볼 시간을 주었다. 지은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있는 모자이크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채 온화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마리아. 아기 예수와 마리아 모두 세상에서 평화 말고는 겪어본 적 없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은과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저런 표정을 짓던 날이 있었을까. 가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나 아기 예수를 낳고 천국에 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은 어머니와 지은은, 원죄가 있던 걸까. 그래서 이토록 사는 게 힘에 부치는 걸까. 우리는 지옥에 가게 될까. 지은은 이주 전 고해성사했던 일을 떠올렸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지은의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던 날이었다. 고시원을 나와 무작정 걸었고, 우연히 성당을 마주쳤다. 지은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어쩐지 고해성사가 하고 싶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분노와 원망과 절망을 내뱉어버리고 후련해지고 싶어. 세례명을 말하라는 신부에게, 어디에선가 들었던 엘리사벳이요, 라고 지은이 답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이었다고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다음부터는 술술 말이 나왔다. 그녀와 그녀 어머니가 가정폭력에 시달려왔던 것, 술에 취해 쓰러져 자는 아버지에게 부엌칼을 쥐고 다가간 적이 있다는 것. 무서운 일을 저지를 자신이 두려워 어머니를 홀로 두고 도망쳤으며, 언제나 죽는 상상을 한다는 것까지 쉴새 없이 말하고 나니 숨이 찼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벽 너머 신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하는 일도 있는 거니까. 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은 자매님을 이해하실 겁니다. 이렇게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용서하셨을 거예요. 내가 보장합니다. 사세요. 미안해 말고 살아가세요, 자매님.

사는 동안에 저렇게 우리가 웃을 날이 올까, 마리아 위로 어머니의 불안한 표정이 겹쳐지자 지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음 예정지는 블루 모스크였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 녹아있는 이슬람 사원으로, 커다란 돔이 빛을 받으면 푸르게 보이기 때문에 블루 모스크, 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돔 위에는 가이드 말처럼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 모양의 황금색 장식이 달려 있었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은 낮에도 빛나는 별과 초승달을 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가이드는 이곳이야말로 이스탄불에서 이슬람 특유의 문화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들도 입장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스카프나 천 따위로 온몸을 가려야 한다며, 여자들에게만 커다란 스카프와 천을 나눠주었다. 지은은 눈만 내놓고 온몸을 히잡으로 가리고 사는 여자들을 떠올리며 스카프로 주섬주섬 몸과 얼굴을 가렸다.


블루 모스크 입구 옆으로 개수대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발을 씻고 있었다. 사원에 입장하기 위한 일종의 무슬림 예식이었다. 과연 블루 모스크 내부로 들어서자 맨발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읽어내려가는 것 같은 소리가 여러 곳에 놓인 스피커에서 낮게 울려 퍼졌는데, 가이드는 그것이 코란이라고 했다. 관광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를 간절하게 비는 사람들. 지은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나라나 믿는 종교가 달라도, 틀림없이 신이 있다면 들어주실지도 모른다. 신이 있다면, 나에게도 평화를 주세요. 빌어먹을 평화가 뭔지 나도 좀 알게 해주세요. 


투어의 점심 코스는 탁심 광장의 케밥 집이었다. 지은은 그녀 또래로 보이는 형제와 테이블에 같이 앉게 되었다. 그들에게 말 거는 일 없이 지은은 그저 묵묵하게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정적이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형제 중 하나가, 자신은 일본에서 국제대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옆에 앉은 동생은 의대생이라고 소개했다. 연말 기념 차 부모님과 가족 여행을 왔다고 했다. 부모님은 터키 전역을 돌기로 했고, 형제 둘은 이스탄불에서만 쉬며 머물기로 했다고. 저는 취업 기념으로 왔어요. 라고 지은이 짧게 대꾸했다.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영영 모르겠지.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셋이서 비행기를 타고, 이국에 떨어져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주 먼, 어쩌면 이번 생에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을.


가이드가 후식으로 먹어보라며 유명한 젤라토 가게를 알려주었다. 젤라토 가게까지 가면 지은이 찾아보았던 이스탄불 필수 코스는 모두 돌아본 셈이 될 터였다. 가게에 들어가 알록달록 예쁜 색감의 젤라토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즐거워졌다. 한참을 고심해 맛 세 가지를 고른 뒤 계산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아뿔싸, 지갑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이미 젤라토를 퍼서 지은이 돈을 건네주기만을 기다리는 직원도 문제였지만, 지갑에는 공항까지 갈 교통비와 체크카드, 현금이 모두 들어 있었다. 어떻게 하지. 가게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만졌었다. 분명 소매치기를 당한 게 틀림없어. 지은은 가게 점원에게 띠프, 월렛, 스톨른 같은 단어를 써서 지갑을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애썼다. 너희 CCTV를 보여줘, 나는 확인해봐야겠어. 경찰을 불러줘. 그러나 가게 점원은 지은의 서투른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도움을 주기 싫다는 건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가이드가 일러준 비상 번호로 지은이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들은 가이드 역시 난처해하긴 매한가지였는데, 그녀 때문에 남은 오후 투어를 중단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지은이 있는 가게로 무하마드, 라는 현지인을 부르겠다고 했다. 이스탄불에서 사십 년을 살아 말 그대로 토박이인데다 마당발이다, 경찰도 몇몇을 알고 있어 도움 될 거라고 지은을 안심시켰다. 그녀는 이스탄불 남자, 라는 말에 검은 재킷의 남자를 잠깐 떠올렸으나 현지 가이드가 소개해준 사람인데다가 소매치기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불안했던 마음이 금방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 남자 하나가 젤라토 가게 앞으로 왔다. 지은 옆에 서서 초조하게 오후 일정을 조사하던 가이드에게 그가 인사를 건넸다. 가이드는 남자와 터키어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지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나이스 한 사람이에요, 행운을 빌어요.


- 안녕하세요, 나는 무하마드예요. 괜찮아요, 괜찮아.


그가 서투른 한국어로 지은에게 말했다. 그녀는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였다. 그는 가볍게 지은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경찰이 왔다. 경찰과 무하마드, 지은은 함께 젤라토 가게에 들어갔고, 무하마드는 점원에게 언성을 높였다. CCTV, 지은은 알아들을 수 없게 오가는 터키어 중에서 그 말만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주인이 할 수 없다는 투로 한숨을 푹 쉬며 노트북을 계산대 앞으로 가져왔다. 초의 초 단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흑백의 영상. 12시 20분 35초 22, 바로 저 지점이다. 냉동고 앞에서 진열된 젤라토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지은이 보인다. 그녀와 체구가 비슷한 남자 하나가 그녀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선다. 오른쪽 주머니 안으로 손을 쭉, 집어넣고 무언가를 빼낸다. 사라진다. 거기서 정지. 어떻게 난 하나도 모르고 멍청하게 아이스크림이나 고르고 있을 수 있지. 영상을 보는 지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무하마드는 그런 지은을 쳐다보더니, 경찰에게 무언의 제스처를 취했다. 경찰이 USB에 파일을 담아 젤라토 가게를 떠났다. 지은은 경찰 쪽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침울한 지은에게 무하마드는 진정하라고, 이건 여행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어디 다치거나 아픈 게 아니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다. 해결하기 아주 쉬운 문제라고.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걸 마시면 기분이 틀림없이 나아질 거라고 했다. 난 당장 돈이 하나도 없는데요, 지은이 힘없는 소리로 대꾸하자, 무하마드는 하하 웃었다. 내가 살게, Miss. 걱정하지 마.


무하마드가 지은을 데리고 간 곳은 젤라토 가게에서 오 분 정도 떨어진 곳의 조그만 카페였다. 카페의 사장이 무하마드의 오랜 친구라고 했다. 무하마드는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있는 지은에게, 따뜻한 차가 담긴 잔을 건넸다. 마셔,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지은이 한숨을 푹 쉬고, 건넨 잔을 들어 몇 모금 들이켰다. 과연 무하마드 말대로 당황해서 위축됐던 몸이 조금 풀어지는 것도 같았다. 맞은 편에는 무하마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지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의 눈에, 아까는 미처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한 그의 얼굴을 이제야 들어왔다. 그녀보다 족히 서른 살은 더 많을 것 같은 외모. 소처럼 커다란 눈망울에 성냥 몇 개비를 올려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아주 긴 속눈썹을 가진 남자. 몇 년 전 본 하비에르 바르뎀이 살이 십 킬로 정도 더 쪘다면 딱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어제 그를 만났다면, 그녀는 이런 생각을 무하마드에게 농처럼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커다란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 터키에는 소매치기가 아주 많아, 그리고 경찰들은 행동이 아주 느리지. 베리 슬로우.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범인을 잡기는 힘들 것 같다고 그가 말했고, 지은은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 며칠 남은 여행을 이렇게 나쁜 기분으로 완전히 망쳐버릴 거야? 그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야. 훌훌 털어버리고, 너는 남은 날들을 즐겁게 보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돼. 분명 그렇게 하는 편이 너에게 더 도움이 될 거야.


무하마드는 영어와 서툰 한국어를 섞어 지은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지은은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가 건네준 차와 따뜻한 위로들이 속이 타들어 가 비어있는 구멍을 채워주었다. 치즈색 고양이 한 마리가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던 고양이는, 지은의 발치에 벌러덩, 하고 배를 드러내며 누웠다. 지은은 갑자기 들이닥친 존재의 태평함에 웃음이 났다. 그래, 여긴 여행지이니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거지. 여행 에세이에서도 소매치기 에피소드는 단골 소재잖아.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게 좋겠어요. 그렇게 노력해볼게요.


무하마드가 앞으로 어쩔 거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가 지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주저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 남은 날들은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어때?


뭐라고? 잘못 들었나? 지은은 방금 그녀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지은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 방금 뭐라고요?

- 좀 섣부른 것 같지만, 네가 좋아.


지은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는가. 소매치기로 인해 정신을 놓아버린 지은을 도와주고, 따뜻한 차를 내주고, 위로를 건넨 사람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는 게 지은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거리는 사이, 무하마드가 슬그머니 지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 노!


지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 양손 모두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지은은 무하마드를 있는 힘을 다해 노려보고, 그대로 카페를 나왔다. 이런 건 그 어떤 에세이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건지, 순수한 환대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 지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약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라면,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것으로 위로받고 꿈꿔왔던 그녀는 도무지 어쩌란 말인가. 며칠간의 일들이 지은의 머릿속을 정신없이 휘저었고, 지은은 혼란스러워졌다.


지은은 무작정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여행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은 관광객, 나른하게 여기저기 엎어져 있는 고양이를 지나쳤고 니하오, 곤니찌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터키 사람들을 차갑게 지나쳐갔다. 아, 정말 지긋지긋한 새끼들.


- 헤이, 미스. 미스?


지은이 한참을 씩씩대며 걷고 있는데, 그녀의 뒤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지 마. 이제 가만있지 않을 거야. 지은은 마음속으로 되뇄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노, 만 외치고 몸을 돌려 나와야 했던 일은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니야. 건드리기만 해. 지은의 걸음걸이가 더 빨라졌다. 그러나 지은을 부르는 소리는 계속해서 따라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누군가 지은의 어깨를 세게 잡아당겼다.


- 뭐야!


지은이 소리를 꽥 지르며 몸을 돌렸다. 당황한 얼굴의 백인 여자가 지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지은의 스카프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지은의 가방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지은이 속도를 내 빠르게 걷자 어느 순간 스카프가 땅에 떨어졌으며, 그녀는 지은에게 돌려주기 위해 계속해서 따라왔다고 했다.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고, 많이 놀랐다면 미안하다고 지은에게 사과했다. 지은이 고개를 푹 떨군 채 백인 여자에게 들릴락 말락 한 크기로 말했다. 미안해, 내가 조금 예민했어.


- 마음을 편히 가져. 여행을 즐겨야지.


숙소로 돌아온 지은은 직원을 찾았고, 한국 계좌에서 송금한 만큼 현지 통화로 바꿔주길 부탁했다. 숙소 계좌를 확인하기 위해 직원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 지은은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열어, 보이스톡을 걸었다.


별일 없죠? 그럼, 없지.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은 괜찮으니 지은에게 굶지 말고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지은의 침묵이 길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어머니가 물었다. 그냥요. 갑자기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여행 왔거든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집 생각은 말고. 네 생각만 하면서 푹 쉬다 와. 지은은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 그럴 수 있는 곳은 없어요.


정말로 그런 곳은 없었다. 어머니를 지우고 아버지를 지우고, 오로지 지은 그녀만을 생각하며 지낼 수 있는 곳. 열세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터키에서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형태로든 지은을 부단히 따라다녔다. 게다가 지난 며칠간 그녀 앞에 당도했던 일들처럼,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과 다른 시간을 보내며 마주했던 어떤 것들은 지은에게 또 다른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인정해야만 했다. 그저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계처럼 보이는 곳에도 고통은 있다.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한 세계 같은 건 없어. 그렇다면 이제 나는. 지은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제대로 마주할 거야. 지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네, 그럴게요. 그렇게 해볼게요.


아타투르크 공항 로비. 지은은 대기 의자에 앉아 잔여석이 나기를 기다렸다. 한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예정보다 사흘 더 앞당기기 위해서였다. 지은 주위에는 이미 항공권을 손에 쥐고 비행편을 기다리는 한국인들이 모여 있었다. 백발의 부부, 티셔츠와 운동화를 맞춰 입은 커플, 그리고 지은과 같은 또래의 여자 무리가 신나게 떠들어댔다. 사진 좀 봐봐, 이거 참 잘 나왔지. 거기 고등어 케밥은 별로더라. 나 블로그에도 올렸잖아. 누가 댓글 달았어. 아, 그 클럽엔 가봤어야 했는데. 터킨 정말 내 스타일이야. 벌써 그리운 것 같은데 어쩌지. 다음에 또 오자. 그들은 저마다 즐거웠던 순간을 되새기고 있었다.


지은이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올려둔 사진 속 지은은 행복해 보였다. 그녀가 원했던 모습처럼, 배낭여행을 온 여느 이십 대 여자처럼 밝고 해맑은 표정이었다. 이틀 전 올랐던 갈라타 타워 전경, 미첼과 수잔 사진은 좋아요, 가 백 개가 넘어갈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터키라고? 너무 부럽다 언니, 정말 좋았겠어.


후배의 메시지를 본 지은은, 담담하게 댓글을 적어 내려갔다. 응, 좋더라. 사람들도 그렇고. 여기까지 적고 나자 가이드가 설명해주었던 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지은은 갈라타 타워의 뷰가 끝내줬다고 썼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섞인 사원이 걸어 다닐 만한 거리에 모두 있다고, 고등어 케밥과 젤라토가 참 맛있었다고도 썼다. 그러나 그녀가 만난 친절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발행일. 2022.07.23 | 글감. 그럴 리가 없다



보래 (소원)

취미는 임시보호, 특기는 입양. 지금은 심장병과 신부전을 앓는 우리 집 고양이 두 마리를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남은 생을 뚝 떼어 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같은 날 눈감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4년 째 유애나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치며 고양이를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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