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서평 포스팅(2) - ≪013 빛≫
이번에 가장 눈에 밟힌 책은 출판사 파도의 엮음시집 ≪013 빛≫이다. 해당 시집은 출판사 파도의 장기 프로젝트 <말투>의 열세 번째 결과물이다. 등단하지 않아도, 글쓰기가 단순히 취미라도 누구나 매분기마다 제시되는 주제에 잘 맞는 시를 투고하면 책으로 엮인 결과물을 받아볼 수 있다. 리얼 아마추어의 서툰 진심이 담긴 시집이라니 기대되고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끝까지 읽어보니 전혀 서툴지 않았다는 사실!
물거품에 투영된 상징과 은유는 석양과 함께 표백됐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을 산책하던 내게 허공은 한없이 무생물에 가까운 생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바다와 땅의 경계선은 학습된 가치관이었으므로 회색지대는 나의 헛된 입장이었으므로 나는 찰박거리는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가리 中
한동안 이 시집을 품에 품고 다녔다. 윤보성 님의 <왜가리>를 보고는 곧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떠올랐다. 상징, 은유, 여기다, 경계선, 헛되다 모두 좋아하는 표현.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식어가고 있지
이상을 꿈꿨더니 다가온 헛된 망상에 모든 걸 잃은 탓에
현실에 스스로를 포획한 어둠만 남았다
안녕 나의 죽어가는 자아, 페르소나
고요한 밤과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적막
종이 한 장과 빼곡한 검은 글자들
입체감 하나 없는 납작한 나의 표정과
같은 얼굴로 누워있는 나
Lucifer 中
너는 양자역학을 사랑한다 (중략) 빛이 뭐야? 너에게 묻는다 반사를 통해서만 서로를 볼 수 있다면 너무 춥다 (중략) 스노 글로브 일순간 뒤집히는 세계 속에서도 펭귄 가족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어 눈이 쏟아져도 사랑을 놓지 않는 포옹의 빛 블라인드 걷고 환한 대낮 창문에 올려두고 봐 사월에도 팔월에도 따뜻한 커피 마시면서 봐 빛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그냥
사랑하는 펭귄 中
천서봉 시인을 가장 사랑하는 걸 보면, 나는 아무래도 이과적 감성이 한 스쿱 담긴 표현을 감각 있다 여기는 것 같다. 이번 주제가 '빛'이어서 그런지, 가시광선이라든지 태양이라든지 과학적 근거를 들이미는 시들이 눈에 띄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중 <사랑하는 펭귄>이 가장 균형을 잘 맞추었다고 생각한다.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가장 맹랑할 표출이 바로 자연과학이다. 독자 중에는 과학자도 공학자도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음. 개인적으로 예민한 부분이긴 하다. 영상물 또한 내겐 마찬가지인데, 과학자들이 진지하게 떠드는 장면이 있는 공상과학 장르라고도 하는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SF) 예를 들면 <마션>이나 <그래비티>도 뭔가 오글거려서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랄까.
평소에는 불 꺼진 방 안의 적막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 주제에 햇살을 받으면 어슴푸레하게 갈색이 드러나는 게 좋아서, 꼭 그것이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상자 속 초콜릿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너를 볼 때면 부러 먹지 않았음에도 입 안이 달아지는 기본이었다.
Dear my adorable 中
그래, 시에서 사랑을 빼놓을 수는 없지. 그럼 반칙이지.
네 몸이 토르소로 변해버린 밤에 이 도시는 빛을 잃었지 네 기다란 팔을 참 좋아했는데 누워 있는 서늘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갈비뼈를 만진다 내 목덜미를 쓰담는 대신 슬픈 눈, 팔을 되찾자 찾으면 어떡할 건데? 나도 모르지 어쩌면 빛이 돌아올지도 몰라, 자기야 과거에 살지 않기로 했잖아.
빛과 토르소 中
한 시인의 시집에는 나름대로의 흐름과 맥락과 말투가 있는데 그것에 익숙하다 보니 다수의 한 편씩을 엮은 구성이 어색하게 느껴진 건 사실이다. 문학 분야는 아니지만, 실제 필드에서 활동 중인 편집자로서 두 가지 정도의 아쉬움. 56편의 적지 않은 시가 실려있기 때문에 꼭지만 잘 잡아도 읽기 좀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아무리 시여도 본용언과 보조용언 띄어쓰기 원칙 정도는 새워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요새 자주 쓰이는 '유행하는' 표현을 살피는 것만 해도 의미 있는 독서였다.
이럴 때 스멀스멀 편집 욕구가 기어 나오는데, 돈 되지 않아도 여기저기 참견하면서 재밌는 거 하고 싶다. 글을 잘 쓰는 것과는 별개로 편집도 기술이기 때문에 표현력, 서술 능력이 부족해도 편집 기술은 좋을 수 있다. 편집 기술을 쌓다 보면 물론 표현력, 서술 능력이 따라오긴 한다. 하지만 이는 명확히 작가에게 있어야 할 위신이다. 그렇다고 편집자가 매끄럽게 매만지기만 하는 건 절대 아니고 원리원칙을 배우고 갈고닦아 작가의 글을 다듬는다. 재밌는 걸 원하는 글쟁이의 신선하고도 새로운 글을 매만져보고 싶달까. 그렇다. 아무튼 새로운 빛깔이었던 한 권이었다.
"해당 도서는 독립출판물 온라인 서점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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