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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 Dec 25. 2023

날씨를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비가 내리다니! 이번 크리스마스는 쨍하게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에서 보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걸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일단은 바다라도 보러 가자는 심산으로 부랴부랴 늦은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준비했습니다.


이곳은 크리스마스에 여는 가게가 손에 꼽기 때문에 막상 가도 맥주 한 잔 할 곳이 마땅치 않겠다는 생각으로 오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아무 곳도 열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런 날 딱 한 곳만 열려있어도 문전성시를 이룰 것을 알고 계신 한 카페의 사장님 덕분에 맛있는 라테 한 잔과 따듯하게 구워진 버섯 퀴시 한 개를 주문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어가 들립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집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나온 한국인이 저 말고 또 있었나 봐요. 아무도 저를 모르는 낯선 곳에서 이방인이 된 기분을 잔뜩 느끼면서 보내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동질감이 느껴지는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고 생각하면서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전화를 하며 목청이 높아진다거나, 아무도 못 알아볼 줄 알고 커다란 폰트로 글을 쓰는 것이 꽤 부끄러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카페를 들어오기 전 모래사장 근처를 걷고 왔더니 입 안과 온 얼굴에 모래가 가득합니다. 이 나라 해변의 모래는 전부 곱디고와서 조금만 세찬 바람이 불어도 모래바람이 휘날립니다. 입안에 씹히는 모래와 함께 퀴시 한 개를 다 먹어치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첫 끼네요. 바닷가의 정취를 한 껏 느끼다가 시간이 되면 텅텅 비어있을 시티로 나가볼 계획입니다. 또 누군가는 문전성시를 이룰 것을 기대하며 열어둔 가게 하나쯤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우울이 덮쳐 당장이라도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만 할 것 같았는데 바다를 보고 비를 맞고 모래를 맞으면서 기분이 나아질 줄은 몰랐어요. 날씨와 마찬가지로 제 마음을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여길 오면 대단히 뭔가 달라질 줄 알았나. 기대했던 제 마음이 초라해지면서 부끄러워지기까지 했습니다. 고작 디카페인 카페라테 한 잔에도 달라질 가벼운 우울이라는 것을 왜 우울에 잠겨서는 알아챌 수가 없는 것일까요.


모든 것의 기회비용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선택한 비바람의 크리스마스 대신 내가 놓치고 온 것들. 이 여행을 선택하면서 내가 놓친 파티들, 화이트 크리스마스. 두 마리 토끼를 선택하는 법을 결코 알려주지 않는 인생. 무엇이 더 낫나 생각해 보면 늘 놓친 것들이 아쉬운 편입니다. 간절히 원해서 한쪽을 선택해도 늘 선택하지 않은 쪽이 더 탐나보이는 이상한 선택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선 것들을 추측하지 않으면서 현재에 존재하기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다시 생각합니다.


창 밖의 비글 한 마리는 오로지 제 주인이 들고 있는 젤라토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라 빨간 산타모자를 썼는지, 이 카페가 유일하게 이 거리의 문 연 가게라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지요. 사실 제가 이렇게 유심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지도 눈치채지 못했을 걸요. 오로지 눈앞의 젤라토를 한 입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저 비글처럼 저도 제 다음 한 끼를 무엇을 먹어야 할지에만 신경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역시 한국인은 이렇게 으슬으슬한 날엔 따끈한 국물을 먹어줘야 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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