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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 Jul 29. 2022

8. 슬기로운 여름 나기(2)

여덟 번째 휘게 이야기 - 산책 편


같은 장소를 시차를 두고 여러 번 방문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더구나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한 장소가 변화하는 모습을 이미 다 경험해보았다면 다가오는 계절에 이 장소가 어떤 옷을 입을지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경험과 추억이 더해진 상상은 보다 풍성한 그림을 그려낸다.


찌는 듯한 더위와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기에는 역시 실내 에어컨 바람 아래만 한 게 없지만

여름을 더욱 싱그럽게 느껴보기 위해서는 역시 자연 속으로 풍덩 들어가는 과감함이 필요하다.

흘렸던 땀만큼 땀을 씻어내는 샤워의 물줄기는 더욱 시원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슬기로운 여름 나기 두 번째 방법은 더운 여름날의 싱그러운 산책길을 소개하며 시작해보려 한다.







누구나 애착의 장소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 부부에겐 이 장소가 그랬다.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고 싶지만 집 안에만 있고 싶진 않을 때, 과식한 다음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싱그러운 계절을 느끼고 싶을 때. 우리는 이곳을 방문한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간이지만, 우리의 3년 이상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괜히 비밀스러운 공간이 된 것 만 같은 이 공간은 화포천 생태습지이다.  


정말 친한 친구에게 너무 소중한 나의 비밀을 알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이 장소를 가족들에게 소개하던 날은 우리 부부 모두 러브하우스의 첫 공개날처럼 들뜬 기분을 가졌던 걸로 기억한다.




더운 걸 알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습지를 깊숙이 걸어 들어갈수록 초록의 싱그러움과 여름 하늘의 맑음이 더없이 진해지기 때문이다. 여름이라는 계절에 애증의 마음이 생기는 이유도 더위는 너무 싫지만, 계절 중 가장 싱그러운 초록과 파랑의 조화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화포천 습지에 담겨있는 물은 기꺼이 하늘의 거울이 되어 그날그날 하늘의 표정을 비춰주는데 이 습지는 하늘의 맑은 표정도 궂은 표정도 모두 예술처럼 담아내는 능력이 있다.






습지는 탁하고 어두운 만큼 밝은 구름의 색을 그대로 담아내어 구름이 마치 물속을 떠 다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여름의 더위는 날씨도 변덕스럽게 하는데, 한 시간 정도 화포천을 걷다 보면 여름의 변덕스러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려고 가져온 큰 우산이, 예상치 못한 큰 비를 막아주게 되었을 때의 그날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추억을 선물한다. 눈앞에 쏟아지던 스콜과 같은 굵고 짧은 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가르며 내리는 비의 속도와 소리에 집중하게 한다. 여름의 산책 중 갑자기 만난 시원한 비는 그야말로 단비가 되어 더위를 잊게 한다.





걷다가 만나게 되는 이런 잔잔한 풍경들은 일주일 중 잠시 쉬며 편안히 이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꿀 같은 휴일에 또 한 번 감사함을 느끼게도 해준다. 여름은 좋은 계절이라 비슷한 길을 걷는 것 같아도 오른쪽엔 매꽃이 왼쪽엔 금계국이 그리고 저 멀리 바람에 흔들려 날리우는 조팝까지도 우리의 눈과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여름에 맞서 걸어 나오지 않았다면 감히 마주할 수 없었을 여름만의 풍경들이다.





더위에 지쳐 으아아 단말마를 외치며 올려다본 하늘은 하물며 이렇게나 파아라니

이 한 장의 사진이 여름을 슬기롭게 나기 위한 수만 가지 방법을 설명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힘을 보여준다.





또 한 번 변덕을 부리려는 여름 날씨에 구름이 잔뜩 머리 아래로 낮게 깔리면 조금만 뛰어올라도 하늘에 손끝이 닿을 것만 같아 아이처럼 신이 난다.





비가 많이 내린 뒤에 방문하면 이런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종점을 목전에 두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우스우면서도 황당하여 남편이랑 문득 눈을 마주치고 이 자리에서 한 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설마 하는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설마를 만나 뻥 터져버렸을 때 왜인지 웃음이 난달까. 우리보다 몇 보 앞서 가시던 노부부가 돌아오며 먼발치에서 우리에게 오지 말라며 고개를 저으실 때 이미 예측했지만, 왜 우리는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을까.


수고스럽게 범람한 광경까지 확실하게 확인한 후 돌아서는 우리 모습에 스스로 웃음이 나 여름의 매미소리만큼 우렁차게 웃었다.





자연의 깊숙한 곳까지 여름의 햇살이 스며들어 나무도, 풀들도, 흙마저도 제 색깔을 내니 여름의 산책길은 눈이 이처럼 저절로 황홀해진다. 여름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배경으로 튼튼하고 예쁜 나무들은 가끔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쭉 뻗은 길들은 하나같이 어서 걸어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조금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보고 또 깊게 내쉬어보면서 여름의 향기를 가득 넣어 돌아오고 싶은 산책길.

일부러라도 초록의 길에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의식적으로 이렇게 숨을 쉬어보면 뇌까지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밑동은 짧고 가지는 넓게 뻗어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 아래 산책으로 노곤해진 몸을 뉘어 땀을 식히면 여름의 산책은 마무리가 된다. 만보 걷기를 성공해서 축하한다는 알림은 덤으로 기분을 좋게 해 준다.


사람의 소리는 음소거되어 사라지고 자연의 소리로 가득 메워진 여름의 산책길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면 극적인 행운은 아니더라도 일상에 조금씩 마주하는 행복의 순간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예기치 않은 비가 와 당황하기도 하지만 땀이 식어 홀가분해지기도 하고, 범람한 물을 만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일도 있지만 돌아오며 모르던 지름길을 발견하고 다행 감을 느끼기도 한다. 맑은 하늘과 평화로운 새소리는 더위만큼 강렬하게 우리를 지치 게하는 사회생활 속 인간관계에 대해 잠시 잊게 한다.


모두들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 나만의 이런 공간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더운 여름 잠시 오롯이 여름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여름의 향기를 맡으며 걸어보는 것.

이번 주말은 잠시 그렇게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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