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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환 Feb 21. 2024

세상은 예쁘고 예쁜 해파랑길과의 밀회는 덤

커피우유가 없어서 못 일어나


예쁜 해파랑길과의 밀회는 덤이고 세상이 예쁘다 말하는 그의 고백은 경품같은 것이다.


‘커피우유 없어서 못 일어나~~~’라고 남긴 톡을 들여다본다. 아침 08시 47분, 커피우유를 좋아하는 경희가 남긴 톡이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해파랑길 4박 5일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올라온 톡이다. 해파랑길 사흘째, 4코스를 완주하고 그녀와 함께 소주와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을 사러 편의점으로 나갔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으며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다. 4박 5일 동안 약 100km를 걸었으니 모두들 몸이 침대와 붙어 있을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미연은 출근을 했을 것이고, 원철은 전날 춘천으로 올라오며 들른 축산항에서 회와 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하며 소주까지 한 잔 걸쳤으니 경희와 같은 처지였을 것이다. ‘ㅎㅎ 커피우유 사러 가야 겄네~’라고 댓글을 올리며 잠시 사흘 전 걸었던 해파랑길을 떠 올린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진 그는 새벽시장 구경을 나간다. 시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노점상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앞치마를 두르고 좌판을 펼쳐 놓았을 뿐이다. 시장치고는 조금은 썰렁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전문 도매시장이 아니다 보니 새벽부터 문을 열지는 않는 모양이다. 어젯밤 불야성을 방불케 했던 대게 시장 쪽은 아예 가지런히 정돈된 채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대게집 벽에 걸린 시계가 05시 45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에겐 어차피 아침 산책의 목적도 있었으니,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산책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침의 조용한 시장 풍경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아침이 시작된 듯했다.


그렇게 시장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다. 호텔 옆 ‘섬진강재첩국’에 불이 켜지길래, 마침 잘됐다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늘 걸을 4코스는 공식거리 19km에 소요시간 7시간으로 공지되어 있는 다소 긴 코스이다.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아침이 늦어지면 모든 것이 다 늦어지기 때문이다. 압력솥에서 칙~칙~거리며 밥 짓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 장사를 준비하느라 주방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아주머니에게 아침식사를 예약하고 호텔방으로 돌아온다.


시원한 국물 맛이 그야말로 아침식사로 딱이지 싶은 재첩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그들은 잠시 라운지에 머물며 모닝커피를 즐긴다. 여행자들에게 꽤나 유익하고 편리한 호텔 케니 기장의 편의시설이다. 보온병에 걸으며 마실 커피도 준비한다. 그렇게 행장을 꾸리고 07시 20분 해파랑길 4코스 시작점인 임랑해변을 향하여 출발한다.


부산 기장군 임랑해변은 인근 월내마을과 함께 예전엔 임을랑포라 불리던 곳이다. 임을랑, 적을 방어하기 위한 주된 성책이 있는 포浦, 갯가를 이르는 말이다. 임을랑을 한자로 표기하면 임책任柵 또는 성책城柵이라 하였다. 임랑은 임을랑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과거 방어를 위한 성책이 있던 갯가, 바닷가 마을을 의미한다. 땅 이름에 관심이 많은 그는 마을 지명에 관한 설명을 천천히 읽어본다. 임랑해변에서 진하해변까지 19.1km, 소요시간은 9시간으로 해파랑길 수첩에 기재된 7시간과는 2시간 차이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간절곶이 있는 구간이라는 설명과 해송숲과 아름다운 나사해변을 소개하는 안내판의 설명을 살펴보며 오늘 걸을 해파랑길 4코스를 숙지하고 길을 떠난다.   


철이 이른 5월, 바닷가 마을은 그저 파도만 일렁일 뿐이다. 바다와 모래, 그리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은 덤이나 다름없다. 임랑해변은 다른 바다와 달리 해수면과 바닷길이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보통 방파제가 있고 해수면 보다 높은 것이 일반적인 해안가길의 모습인데, 임랑해변을 끼고 이어지는 길은 모래사장과 바로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높낮이의 차가 크게 없는 길이다. 그런 높낮이가 없는 길은 그대로 사람 사는 마을로 이어진다. 해일이나 높은 파도가 치면 꼼짝없이 사람이 사는 마을까지 파도가 들이칠 것만 같은데도 불구하고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것 같은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바다가 그저 나란히 이어지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바다모습이다.    


임랑해변을 벗어난 그들은 월내마을로 들어선다. 임랑마을과 바로 인접해 있는, 과거 임을랑포라 하였던 바로 그 마을이다. 해안에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자리 잡고 있어 월내항 월내수변공원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월내교를 건너고 봉태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당도한다. 마을주민이 만들어 세워놓은 팻말이지 싶은데, ‘요쪽길로 쭉 올라가세요, 즐거운 하루되세요!’라고 쓴 팻말이 너무나도 따듯하게 느껴진다. 09시 27분이니 한 시간 남짓 걸었다. 잠시라도 앉아 쉬어 갈 수 있는 의자라도 한 두 개 설치하면 딱 좋은 그런 장소다. 그곳에서 선 채로 목을 축이며 잠시 쉬고 봉태산으로 오른다.


싱그러운 5월의 옷으로 갈아입은 숲은 여기저기 이름 모를 들꽃이 수줍은 듯 피어나고, 푸르른 녹음이 짙어지고 있었다. 높고 깊지도 않은 봉태산, 그럼에도 산은 산이었고 숲은 숲이었다. 한창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봉태산 숲길이었다. 그들은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예쁘지 않은 숲길은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역시 세상은 예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봉태산 숲길은 그들까지 싱그러운 녹음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세상은 예쁘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예쁜 곳이 너무나도 많은 세상이다. 너무나도 많은 예쁜 세상에 비해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그가 봉태산 숲길을 걸으며 녹음한 말이다. 그의 지난 삶의 궤적과 경험에서 어렵게 깨닫고 귀하게 얻은 소중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세상은 예쁘다’는 말을 하였으니, 지극히 선명하고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그도 예전에 잘 몰랐던 사실이다. 세상은 예쁘고, 예쁜 곳이 너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은 셈이다. 아니,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몰랐던 것보단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어느 날 눈 뜨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세상이 예쁘게 보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세상이 참 이쁘구나!’라고 느끼게 된 일은 8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고 나서다. 아침 일찍 시작된 수술은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끝났고, 그 후 회복실에서 두 시간이 지나갔다.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은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칠흑 같은 시간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이 나와 정밀 검사를 받고 시작한 수술이었다. 혼자서는 침대에서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온몸을 두들겨 맞아 멍든 것처럼 뻐근하고 아팠다. 2~3일은 밤이 낮인지 낮이 밤이지 모를 정도로 혼미하게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다 우연히, 창 밖으로 내다본 하늘이 너무나 눈부시게 예뻤다. 그날 병실에서 내다본 하늘은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본 하늘 중 가장 예쁜 하늘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은 처음 본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 후 통원치료를 하며 후속치료와 가벼운 운동을 이어가는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문득 ‘그래, 세상은 늘 예뻤구나!’라는 말을 하며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늘 예뻤던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구나!’, ‘이런 예쁜 세상을…, 그동안…, 왜?’ 라며 혼잣말을 이어가며.


맞아요, 세상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모든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즐길 수는 없는 법이죠. 때로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부족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심과 애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살아가기에 바쁘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예쁜 세상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예쁜 세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라디오에서 들리는 예쁜 성우의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걷던 그날, 천근 같은 몸이었지만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우선 건강부터 되찾아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날 눈부시게 예쁜 하늘이 말해준 사실은 그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즘 암환자는 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어 뭐 특별한 것은 아니라 느껴질 수 있는데,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면 생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일이지 싶다. 대장암 수술을 받고 나서야 무한하지 않은 시간을, 소중한 삶의 시간이 무한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생의 마지막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며 비로소 예쁜 세상이 보인 것이다.


세상을 여행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경험이다. 그런데 늘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라 믿는 막연하고 무모한 믿음 때문에 놓치기 일쑤 인 일이기도 하다. 때로는 일상에 치여 힘들어하는 자신을 마주할 때 배낭을 메고 산으로 오르는 일, 일상에서 벗어나 낯설지만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는 일, 전혀 다른 문화와 관습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일, 그것이 여행이고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그 여행의 끝엔 언제나 예쁜 세상을 발견하는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 여행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 인간의 창의력이 담긴 예술적인 건축물과 미적 감성이 충만한 작품을 감상하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과거에도 있었던 자신과 같은 사람의 모습이 투영되는 이야기를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행은 다양한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중 단연 으뜸은 여행 중 발견한 그 경이로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고, 지극히도 눈부시게 예쁜 세상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당신을 닮은 예쁜 세상, 예쁜 세상을 닮은 당신을 찾아보는 시간, 그것이 여행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제부터라도 예쁜 세상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과거와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너무나도 예쁜 곳이 많은 세상을 바라본다. 그가 바라본 예쁜 세상은 그에게 늘 많은 영감을 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준다. 더불어 그의 삶을 감사와 겸손으로 채운다. 뒤늦게나마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그는 예쁜 세상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했던 소중한 순간을 사진과 글로 남기며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유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 일은 그가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 일을 하며 마치 예쁜 연인들의 속삭임과도 같은, 예쁜 세상과의 밀회는 덤이고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예쁘다 말하는 그의 고백은 경품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무궁무진한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정말로 감격스러워 벅찬 가슴을 부여잡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언젠가 백령도 두무진에서 보았던 황해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 과거 유럽인들이 땅의 서쪽 끝이라 여겼던 로까곶에서 맞은 이른 아침,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해파랑길을 걸으며 보았던 해안가에 쌓여 있는 동글동글한 몽돌, 눈 덮인 태백산에서 맞이한 일출과 운해, 그리고 눈부시게 파란 하늘, 이태리 발도르차 평원에서 마주한 경이롭고 예쁜 세상, 찌루찌루의 파랑새도 알고 안데르센도 아는 우리의 꿈과 마음속에 언제나 있던 천사들이 사는 나라 같았던 미하스 마을,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 한 조각 쪽배를 띄우고 싶었던 함백산, 거침없이 내달리는 능선과 어우러진 놀라운 절경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설악산 서북능선, 달이 영봉 위로 휘영청 떠오를 때까지 머물고 싶었던 월악산, 그리고 너무나도 포근하게 느껴졌던 공작산 단풍, 방목하는 소들이 도로를 점령한 라오스의 목가적인 풍경, 수 미터 되어 보이는 눈이 쌓여 꽤 오래전에 읽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国이 떠오르는 센다이로 들어가는 산간도로와 이나와시로 호수, 신비스럽고 오묘한 신의 조화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카파도키아, 수많은 인파로 가득한 역동적인 달랏의 야시장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참으로 예쁜 곳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그는 세상을 여행하며 늘 예쁜 세상과의 밀회를 덤으로 얻고 세상이 예쁘다는 고백을 한다.


소라 빛깔 점퍼를 입은 경희가 살짝 경사진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그녀 앞으로 원철이 그리고 미연은 경희 뒤를 따라 산으로 오른다. 갈지(之) 자를 그리며 산마루에 올라 울산 울주군 서생면 ‘송원농원’ 쪽으로 내려온다. 조선시대 아이봉수대 (阿爾烽燧臺)가 있는 기장군 장안읍과 울주군 서생면 경계에 걸쳐 있는 봉태산이다.

 

아이봉수대는 현존하는 봉수대 중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봉수대이다. 봉수대에서 해안 쪽을 바라보면 고리원자력발전소가 보인다. 봉수烽燧란 밤에 횃불을 올려 알리는 연봉(燃烽)과 낮에는 연기를 피워 알리는 번수(燔燧)를 합친 말이다.    


봉태산을 내려와 서생면으로 들어선다. 산을 넘는데 30분이 소요되었다.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간다. 길은 온곡교를 건너 온곡천이 흐르는 우측으로 이어진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도로로 이어지는 길은 이미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원철이 입을 다부지게 다물고 양손을 치켜들며 V자를 그려 보여주지만, 지쳐 보이는 것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더위는 시작도 하지 않은 5월 중순임에도 온몸이 뜨거워진 셈이다. 낮은 산이지만 산도 오르내렸고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를 잔뜩 먹고 나니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한 순간인데, 눈을 씻고 봐도 주변에 편의점은 고사하고 조그만 구멍가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30여분을 더 걸어가다 도저히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하지 않으면 걷는 것이 힘들어질 것 같아 무조건 눈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마침 주인아주머니가 마당에 나와 정원을 가꾸는 중이었다. 마당을 소박하고 예쁘게 가꾸는 재주가 있어 보이는, 아늑하게 느껴지는 정원이 있는 식당이었다. 상호가 ‘제味대로’인데, 이걸 ‘제미대로’ 보단 ‘제맛대로’ 읽어야 맞지 싶은 식당이었다.


‘아주머니!, 맥주 좀 한 잔 마시고 갈게요.’

그는 주인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행여 거절하지 못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마당에 놓인 테이블로 걸어 들어간다. 미연, 원철, 경희는 그가 느닷없이 왜 식당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리둥절, 그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선다. 어리둥절 하기는 주인아주머니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덩치가 산만한 그가 큰 소리로 그렇게 눙을 치고 들어갔으니 왜 아니 그랬겠는가. 그러나, 그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나름대로 판단을 하고 식당으로 들어선 것이다. 일단 마당에 테이블이 있으니 덜 부담스럽고, 마당이 정갈하니 주인의 인심이 박절할 것 같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갈증이 너무나 심해지고 있는 터라 맥주 한 잔이 간절한데, 지도를 열어보니 이 식당을 지나치면 앞으로 두어 시간은 가게 구경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박감이 재치를 발휘하게 만든 셈이었다.


역시 판단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얼음까지 원하는 길손한테 맥주와 더불어 얼음 한 사발을 후하게 담아 내주시며, 더운데 편히 쉬었다 가라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암튼 그렇게 얼음 띄운 맥주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마신 셈이다. 경희가 맥주잔을 들어 원철의 얼굴에 가져다 댄다.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컵이 볼에 닿자,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주먹을 꼭 쥔 원철의 양손이 환한 웃음으로 가득해진 얼굴로 올라간다. 너무 시원해 짜릿짜릿하게 자지러지는 그만의 느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시원하단 표현을 온몸으로 하는 미연의 양 손도 위로 올라가고 그렇게 그들의 잔은 한가운데로 모이고 ‘해파랑길’을 구호로 외치며 더위와 갈증을 몰아낸다. 간식 삼아 준비해 간 참외는 왜 그리도 맛있었던지. 미연, 원철, 경희는 지금도 가끔 그날 마셨던 ‘얼음맥주’를 이야기한다. 당연히 이 식당은 그들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해파랑길' 식당이 되었다.


그날 시간이 일러 점심식사를 한 식당은 아니지만, ‘제맛대로’의 상차림은 꽃밥을 주메뉴로 하는 식당으로 고리원전 근처에선 꽤나 입 소문난 집밥 맛집이었다. 밥상정식, 꼿밥상, 꽃비빔밥, 불고기 덮밥과 나물 비빔밥을 손님상에 내는 인심 후한 식당이었다. 주소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용연길 32, 제맛대로이다. 해파랑길을 걷는 여행자들이라면 들러 볼만한 식당이라 여겨진다. 물론, 그들이 그날 마셨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는 메뉴에 없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해파랑길은 이 식당 뒤로 난 우측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다. 이 골목길은 식당 건물과 밭 사이로 난 살짝 경사진 좁은 길이어서 비가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는 모양이다. 인심이 후한 아주머니는 이 골목에 사비를 들여 야자매트를 깔았다 한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해파랑길은 더 이상 걷는 사람들만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길을 걷는 여행자들에겐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시원한 얼음맥주로 목을 축인 그들은 아주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을 얹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깔끔하게 야자매트로 단장된 길을 따라 다시 떠난다. 해파랑길은 대숲을 따라 이어지는 한적한 농촌 마을 길로 이어진다. 한창 죽순이 올라오는 생명이 움트는 약동의 계절이다. 살짝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는 앞서간 원철, 미연, 경희와 다른 해파랑길 여행자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언덕 너머의 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만이 가득한, 마치 길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세상처럼 보였다. 만일 도화지에 이 풍경을 그린다면, 한 폭의 수채화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 멀리서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니 마치 하늘로 향하는 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마을 길을 빠져나온 그들의 여정은 고리원전을 오른쪽 언덕 위에 두고 신리길로 접어든다. 울주군 서생면 신리마을과 신리항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잠시 후 마을 입구에 큰 소나무가 그들의 시선을 끄는 신리마을 어귀에 당도한다. 신리마을은 신고리 5,6호기 사업에 따른 마을사람들의 이주 정착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마을이다.


신리항으로 이어지던 길은 신리마을회관을 지나 항만 좌안의 방파제를 지나자 해변으로 내려간다. 신리항 뒤로 이면도로가 있음에도 해변 가까이 붙어 이어지는, 모래사장도 아니고 크고 작은 바위와 돌이 수북한 해안가 길이었다. 이 길이 맞을까 싶어 지도를 열어 확인해 보니 올바르게 들어온 길이었다. 길을 따라 걷는 여행이니 해파랑길 붉은 리본을 따라 걷는다. 바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서니 바닷가 언덕 위에 웅크린 조그만 집들 사이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패널과 블록, 컨테이너를 조합하여 허술하게 지은 집이다. 컨테이너 집 앞 평상에서 몸을 움직이며 뭔가 일을 하고 계신 70이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아주머니는 사람이 그리웠던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사진을 한 장 찍겠다고 하니, 사진은 찍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던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넉넉함이 있었다. 그렇게 길도 아닌듯한 좁고 어수선한 길을 따라온 덕에 잠시지만 아주머니와의 만남이 있었고, 넉넉한 대화를 나누며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온정을 주고받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 길을 닮아서인지 마음이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사람들이다.


하얀 등대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조금 전 지나온 길을 바라본다.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테트라포드(Tetrapod, 4개의 뿔 모양으로 만든 콘크리트 구조물)와 바로 이어지는 갯가의 크고 작은 바위사이로 바닷물이 넘실댄다. 그곳에 길이라 할 수 있는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해파랑길 중 가장 바다와 가까운 길이지 싶다. 빈 집이 많은 점과, 녹슨 ‘출입금지’ 팻말, 이곳 뒤 이면도로변에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의 새로 지은 집이 다섯 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해일 위험 때문에 이주하고 이제 몇 가구 남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길은 계속해서 바닷물이 넘실대는 갯가로 이어졌다.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들 만이 전부인, 멀리 수평선 위로 보이는 작은 배들이 가까스로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구분해 주는 갯가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이었다.


미연이 바위로 올라 포즈를 취한다. 민소매 차림의 미연이 바라보는 하늘만큼이나 푸른 그녀의 존재가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다. 앞서가던 원철과 경희는 물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갯가에 서서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있었다. 뒤로 보이는 번듯한 새로 지은 카페 건물은 조금 전 지나온 허술한 집들과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조적이었다.


하늘은 왜 그리도 파랬던지,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잔잔한 수면으로 내려앉은 너무나 예쁜 해파랑길이었다. 신암항 방파제로 둥글게 이어지는 예쁜 해안선이 보이는 바위에서 오른팔을 번쩍 치켜들며 밝게 웃는 경희의 모습은 그렇게 파란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가뭇가뭇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아주 작은 바위섬 주변으로 물거품이 흩어진다. 그들이 올라선 바위 언덕으로 파란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너무나도 예쁜 하늘이었다. 무지개 빛깔로 칠해 놓은 신암항 방파제 위에 유치원 꼬마들처럼 앉아 있는 그들은 그렇게 예쁜 하늘과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신암항이 있는 신암마을은 반농반어촌 마을인데, 인근 고리원전과 관련 있는 에너지 산업단지도 조성된 마을이다. 그들이 본 신암항 근처의 어촌마을은 평온했고 포근함마저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그들은 마침 신암항 좌안 방파제 끝에 보이는 팔각정을 점심식사 장소로 정하고 해안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바닷물이 들어와 중간중간 길이 끊어져 마을길(당물길)을 따라 신선바위를 거쳐 팔각정에 자리를 잡았다.


여행 중 한 번 정도는 사 먹지 말고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던 터라 잡은 특별한 점심장소인 셈이었다. 원철이 능숙한 솜씨로 버너에 불을 켜고 물을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 경희가 싸 온 갓김치와 함께 준비해 온 김밥을 먹으며 소풍 나온 어린아이들처럼 마냥 즐거워하는 그들이었다. 새벽밥을 먹고 아침 일찍 호텔에서 출발했던 그들이었기에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식사를 하며, 맥주를 따라 ‘해파랑길’ 구호를 외치는 그들에겐 예쁜 하늘과 바다와 함께 먹는 점심이 그 어떤 점심보다 맛있는 점심이었다. 이날 그들의 즐거움은 아주 짧지만 6초짜리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 여정은 나사해변을 거쳐 간절곶으로 이어진다. 나사해변을 따라 데크길이 만들어져 누구나 쉬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우리나라처럼 해안가나 강가의 제방을 활용하여 걷는 길과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알기엔 덴마크나 네덜란드 정도이지 싶다. 데크길을 따라 사뿐사뿐 해안가를 걷는 것은 그 자체가 싱그러운 일이었다.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그들에게는 어쩌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평온함과 여유가 가득한 순간이었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작은 풍경이 더없이 예뻐 보이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가볍게 모래 위로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감싸면 따스함이 느껴지는 나사해변 길이었다. 마치 소리 없이 순환하는 대기 속으로 들어간 듯 그들은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점점 푸른 바다와 하나가 되고 파란 하늘을 닮아가는 그들이었다.


그렇게 6시간 30분 남짓 걸어 2시 45분, 간절곶에 당도한다. ‘간절욱조조반도(艮絶旭肇早半島)’, ‘간절곶에 해가 떠야 한반도에 새벽이 온다’는 뜻이다. 이 기록은 ‘울산읍지’의 기록이기도 한데, 커다란 간절곶 표지석에도 새겨져 있다. 말 그대로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떠오르는 간절곶을 잘 표현한 기록이다. 육지가 바다로 돌출한 곶, 간절곶은 울산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해돋이 명소이다. 편지를 써서 넣으면 언제 올지 모르지만 빨간 ‘간절곶소망우체통’도 상징처럼 바닷가 언덕에 우뚝 서있다. 소망우체통 앞에서 환하게 웃는 그들에겐 해파랑길 걷기 여행에 대한 더 큰 기대와 희망이 섞여 있었다. 소망우체통에 그들의 기대와 희망을 담은 편지를 넣으면, 푸른 바다를 넘어 다른 곳 누군가에게 전해줄 것만 같았다.


잠시 머물렀던 간절곶을 떠나 대송등대 잔디광장을 지나 진하해변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별들처럼 크로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밭에 앉아 있는 경희와 미연이 파란 하늘과 너무 닮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런 그녀들을 보고 있는 그도 덩달아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흔히 행복 바이러스라 부르기도 하는, 그 순간 그녀들이 품고 있던 행복한 기운은 그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는 ‘행복 바이러스’인 셈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소망이 있기 마련이다. 간절곶을 조금 벗어난 간절곶 하트등대 앞 광장에서 꽹과리 소리와 북장단에 맞춘 흥겨움이 가득한 어민들과 여행자들이 어우러진다. 붉은색 깃발이 펄럭이고 어민들이 줄지어 그물을 들고 꽹과리 소리와 북장단에 맞추어 어깨춤을 추며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낯선 여행자인 그가 축제에 동참하자 어민 중 한 명이 그를 잡아끌어 무리 속으로 들어간다. 축제는 더욱 흥겨워지는 듯했다. 해마다 크고 작은 축제가 벌어지는 어촌마을에서 볼 수 있는 축제는 어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는 기원이나 다름없다. 늘 위험한 바다와 싸우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안전한 바다가 가장 큰 소망일 것이다. 간절곶엔 봄나들이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이 행복 바이러스가 이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안고 다시 길을 떠난다.


솔개공원에서 바라본 진하해변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바다였다. 어쩜 저리도 맑고 투명한 넉넉하고 예쁜 바다인지, 여유로운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고 떠나는 파도는 그저 잔잔하기만 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진하해변을 바라보며 그들은 한참 동안 그렇게 솔개공원에 머문다.  


20.5km, 08시간 38분, 휴식시간 02시간 20분 포함, 평균속도 3.3km/h. 오늘 여정의 아주 짤막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짧게 한 문장으로 줄이면 ‘세상은 예쁘다’이다. 세상을 여행하며 아름다움을 깨닫는 경험은 참으로 소중하고 특별한 것이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다. 여행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자 교훈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더욱 폭넓게 바라볼 수 있다.


이제껏 놓치고 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여행을 통해 세상이 예쁘다는 고백을 열심히 하며 예쁜 세상과의 밀회를 이어 나갈 것을 다짐하며 진하해변을 떠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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