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리 Jul 11. 2022

을처럼 일하기

을로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게 싫을 때가 있었다.

당장 오늘 저녁 퇴근 시간도 예측하기 어렵고,

오늘 저녁 예약해 둔 필라테스를 갈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고,

이번 주 주말 가족 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확신하기 너무 어렵던 때.


내 인생을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내 시간은 왜 내가 주인이 될 수 없는가!

너무 화가 나고 답답해서, 을로는 죽어도 살지 않겠다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대행사에서의 삶이란 이랬다.

물론 즐거움도 많았지만, 항상 클라이언트에 의해 흘러가는 삶.


나의 생각과 우리의 아이디어는 항상 클라이언트를 위한 것이어야 했고,

갑에게 컨펌받기 위해, 제안을 셀링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갈아넣어야 했다.

모든 생각을 오로지 그 프로젝트, 갑을 위해서 모으고 쏟아냈다.


한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시간은 프로젝트마다 상이하지만 보통은 워킹데이로는 2주, 1달이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 농도는 주어진 시간보다 더 짙었다.

왜냐면 정말 하루종일 생각하고 회의를 하거든.

회의실에 모두가 노트북 하나씩을 가지고 앉아 점심도 회의실에서 샌드위치, 김밥 등등을 배달시켜 자리에 앉아 입에 넣으며 쌓여가는 이면지와 커피컵을 보면서 아무 말이나 마구마구 던져내고 쏟아낸다.

샤워를 할 때도 생각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생각한다.

자다가 좋은 생각이 날 때면 벌떡 일어나 메모장 어플을 열어 생각을 적어낸다.

물론 아침에 보면 다 쓰레기통행이지만...


그만큼 온 신경을 프로젝트에 쏟는 삶을 10년을 보내고 클라이언트 사이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지금.


무조건 을로는 살기 싫어! 라고 생각했던 지난 날이 무색하게,

나는 지금 여전히 을처럼 살고 있다.


무언가를 항상 평가 받고, 제안을 셀링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10년을 일하다 보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항상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살고 있다.

오히려 지금은 마케팅 총괄을 하며, 물론 위로는 아직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 자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의 전문성을 충분히 인정 받고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증명에 대한 압박에 시달린다.


누구보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이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

그러다 보니 점심도 가끔 거르고, 샤워를 하면서도 생각하고, 아침 출근길 운전을 하면서도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인지, 생각은 나를 찾아온다.

여전히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생각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나는 기분이 좋다가도,

이만큼 몰입하지 않는 직원들을 보면서 가끔 살짝 화도 난다. (이것은 꼰대라는 증거겠지...)


사실 다른 사람이 몰입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차이점이라면 '을'로서 살아봤느냐 아니나는 점이다.

클라이언트에게 좋은 생각을 팔지 못하면 내 주말이 없어질 수 있다는 부담감부터,

이 클라이언트와의 대행이 끊어질 수 있다는 생존에 대한 문제까지... '을'에게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이유가 수만가지 존재한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몰입도가 내는 결과물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요즘 대행사의 고퀄리티 인력들이 점점 이탈하는 추세이다. (나를 비롯하여? 후훗)

대행사에 가기를 망설여하는, 그리고 대행사에 있으면서 자신의 진로를 불안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대행사에 몸 담아 그 삶을 경험했고, 양질의 퀄리티로 일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있어봤고,

모든 것을 프로젝트의 성공에 초점을 맞춰 살아봤다는 것은 살면서 엄청나게 큰 자산이 된다.


을처럼 일하면, 어디서든 성공하고 인정받을 것이다.

당신, 오늘 하루 을처럼 일해보라.


작가의 이전글 KPI 설정의 중요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