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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Oct 26. 2022

아, 내 예물백! 아, 내 가방!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10

“오빠, 그냥 우리 둘이서 가서 사면 안 돼?”

“내가 우리끼리 간다고 했는데 꼭 같이 가서 직접 사주고 싶다고 하시네. 자기가 이해 좀 해 줘. 대신 가서 예쁜 거 고르자.”


오빠랑만 같이 가는 게 편한데. 우리 엄마는 오빠 시계 사라고 돈만 부치셨는데.


현서는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혼하면서 많이들 갖고 싶어 하는 예물백의 대명사인 C사 가방을 갖게 되어 몹시 설렜는데 준호의 어머니가 백화점으로의 동행을 원한 것이다. 상견례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가 백화점에서의 쇼핑이라니. 태어나서 해 본 쇼핑 중 가장 어색하고 불편한 쇼핑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예물백 보러 오셨어요?”

“네, 맞아요.”

“예물백으로 인기 있는 모델들 먼저 몇 개 보여드릴게요.”


매장 직원은 세 사람을 보더니 예물백 쇼핑임을 알아차리고 제품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현서는 미리 점찍어 둔 모델이 있었지만 이왕 시간 내서 줄까지 서서 들어온 김에 다른 것들도 매 보고 싶었다. 혹시나 점찍어둔 모델이 어울리지 않으면 다른 모델로 바꿔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거 예쁘다, 현서야. 이거 한번 매 봐.”


준호의 어머니가 가방 하나를 골라 현서에게 건넸다. 현서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좀 화려하지만 예쁘네요.”


딱히 현서 취향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래오래 맬 수 있는 클래식한 모델이 아니고 시즌에만 잠깐 나오는 모델이라 금방 질릴 것 같았다.


“이것도 괜찮고. 크기가 적당히 커서 활용하기 좋겠다.”


준호 어머니는 가방을 이것저것 골라서 현서에게 매 보라고 했다. 맘에 들지 않아도 당연히 티 낼 수 없었고, 주는 대로 매 볼 수밖에 없었다.


“고객님, 요청하신 모델이에요. 한 번 보시겠어요?”


직원이 현서가 요청한 모델의 가방을 가지고 왔다. 온라인으로 가방 디자인만 체크하고 왔는데, 실제로 어깨에 메고 거울을 보니 현서 마음에 쏙 들었다. 크기도 적당했고, 무게도 알맞았다. 단지, 현서는 블랙 색상을 원했는데 직원이 보여준 모델은 짙은 브라운 색상이었다. 현재 블랙은 품절이라 예약주문만 가능하고 세 달 정도 후에 받아볼 수 있다고 했다.


“이거 어때요, 어머니? 전 이게 맘에 들어요.”

“어머, 그래. 단정하고 잘 어울린다. 크기도 딱 맞네. 이걸로 할래?”

“네. 이걸로 할게요. 컬러는 블랙이 좋을 것 같아요.”

“블랙은 다른 가방으로도 있지 않니? 제일 기본 컬러니까. 내가 볼 땐 이 브라운이 훨씬 세련된 것 같은데?”

“그래도 블랙이 제일 무난하니까 여기저기 매기 좋을 것 같아서요.”

“이미 있는 블랙을 왜 또 추가하니? 흔한 블랙보다야 블랙과 비슷하지만 약간 색감이 들어간 진한 브라운이 낫지. 오히려 브라운이 매치하기 좋아. 현서 너 머리카락 색도 브라운 계열이잖니. 게다가 블랙은 세 달이나 기다려야 한다는데 뭣하러 그러니? 바로 사는 게 낫지.”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건 블랙 가방이 이미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데. 맘에 드는 걸로 사고 싶은데. 현서와 예비 시어머니의 대화를 듣던 점원이 눈치를 채고 한 마디 거들었다.


“블랙이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은데요? 제일 무난하고 오래 매기 좋죠. 블랙은 늘 인기가 많아서 재고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예약판매하는 거거든요.”

“아가씨가 뭘 모르네. 블랙은 너무 흔하잖아요. 이왕 C사 가방 사는 거 덜 흔한 것으로 사는 게 좋지. 남들이랑 똑같은 거 들 필요 있어요? 그리고 브라운이 훨씬 매치도 잘 되고 예쁜 것 같은데. 아들, 어떻게 생각하니?”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던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현서가 시어머니 등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준호에게 눈을 부릅뜨고 제발 나 좀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 어. 난 뭐 둘 다 괜찮은 것 같은데. 근데 가방이 원래 이렇게 비싼 거였어? 난 사 본 적이 없어서 몰랐네.”


이럴 수가. 절망적이다. 내 남자 친구가 이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다니 눈치는커녕 쓸데없이 가방 가격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다. 본인 손목에 차고 있는 그 시계는 지난주에 얼마를 주고 샀는지 기억이 안 나나보다.


“그래, 현서야. 브라운 해. 블랙은 당장 사서 매지도 못하고 내가 볼 땐 브라운이 훨씬 잘 어울려. 사서 당장 내일부터 예쁘게 매고 다니면 좋잖니. 이걸로 하자. 이걸로 포장해 주세요.”


준호의 어머니는 가방에서 카드를 꺼냈다. 점원은 현서를 바라보고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방을 포장하러 들어갔다. 울고 싶었다. 아무리 선물해주는 입장이라도 받는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주었다면 굉장히 고마웠을 텐데. 이렇게 고가의 가방은 언제 또 살 수 있을지 몰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져 결정한 모델이었는데. 정성스레 포장된 C사 가방이 하얀색 꽃을 달고 까만 종이가방에 담겨 현서의 품으로 왔다. 예전부터 하나쯤은 꼭 갖고 싶었던 C사 가방을 샀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준호의 어머니는 예비 며느리에게 비싼 가방을 사 준 기분을 마음껏 즐긴 후 먼저 집으로 갔고, 현서와 준호는 카페로 갔다. 현서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알아챈 준호가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현서야, 왜 그래. 몸 어디 안 좋아?”


몸이 안 좋냐니. 지금 그게 할 소린가. 

너 때문에 나의 가방 색이 바뀐 거야!

준호가 직접적인 역할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생각했다.


“오빠, 저기 말이야. 아까 가방 고를 때, 나랑 어머니랑 하는 대화 못 들었어?”

“어울린다고 했던 거?”

“아니, 나는 블랙을 원한다고 했는데 어머니가 계속 브라운 권하셨잖아.”

“아, 브라운이 자기한테 잘 어울린다고 하셨던 거? 잘 어울리는 거 산 거 아니야?”


이 남자랑 결혼을 해도 되는 것인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준호의 표정을 보니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묻는 듯한데, 이 남자는 정말 이 상황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는 건지 답답했다.


“나는 블랙을 원했어. 몇 번이나 블랙을 원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가 계속 브라운 하라고 하시더라고. 보다 못한 점원도 블랙이 더 낫다고 얘기해줬는데, 결국 어머니가 브라운 하라고 하시면서 계산하셔서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어. 어머니가 오빠한테 의견 물어보셨잖아. 그때 내가 오빠한테 신호 줬는데 못 봤어?”

“신호? 난 전혀 몰랐는데.”

“내 표정 못 봤어?”

“어... 못 봤는데. 뭐가 더 어울리냐길래 난 둘 다 괜찮다고 생각해서...”


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볼 땐 둘 다 너한테 잘 어울렸어, 현서야. 오늘 산 브라운도 아주 잘 어울리던데? 뭘 걸쳐도 옷걸이가 예쁘니 잘 소화하더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지금 이 남자는 포인트를 못 잡고 있다.


“정 맘에 안 들면 가서 블랙으로 바꾸던지.”

“어떻게 그래? 내 의견을 말씀드렸어도 어머니가 콕 집어서 이걸로 하라고 골라주신 건데 나중에 따로 가서 교환한 거 알면 안 좋아하실 거 아니야.”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맘에 드는 거 사야지.”


여기선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내가 확실히 잘 말씀드릴게. 걱정 말고 원하는 것으로 골라.’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애초에 같이 백화점을 간 것부터가 꼬였다. 준호 선에서 막았어야 했는데.


“그리고, 아까 가방 색깔 고르는데 가격이 어떻고 그런 얘기는 갑자기 왜 했어?”

“나는 가방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거든. 비싸도 1~2백이면 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비싸서 좀 놀랬어.”

“오빠 시계도 비슷하지 않았어? 시계는 그렇게 비싸도 되고, 가방은 안 되고?”

“아니, 누가 그렇대? 그냥 가방이 비싼 게 신기해서 그랬던 거지. 별 뜻은 없었어. 솔직히 시계가 비싼 건 이해되는데 가방이 비싼 건 납득이 잘 안 가긴 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서.”

“내가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오빠가 물건의 가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 게 아니야. 오빠 시계 살 때 내가 비싸다고 뭐라고 하길 했어, 우리 엄마가 오셔서 모델을 딱 집어서 골라주시길 했어? 오빠는 편하게 원하는 거 잘 샀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잖아. 결혼할 때 한 번 받는 예물백인데 원하는 걸로 고르지도 못하다니.”


준호는 어느 누가 봐도 스마트한 청년이다. 그래서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이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을 해 줘야 하다니? 진짜로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건지 현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결혼을 하는 건가? 내가 지금 단순히 가방 색깔 하나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닌데.


현서는 앞으로 펼쳐질 ‘시월드’와 중간 역할 못 하는 남편의 예고편을 본 것만 같아서 마음이 뒤숭숭했다. 게다가 어쩌면 나의 유일한 C사 백이 원치 않는 브라운이 될 것이란 생각에 몹시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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