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스대성당은 처음 고딕 건축 양식으로 지은 성당이다. 생드니 수도원 성당에서는 성당의 후진을 개축하면서 고딕 양식의 방향을 제시했다면, 상스대성당은 설계부터 완공까지 고딕 양식을 처음 시도했다. 그래서, 생드니 수도원 성당의 후진 개축이 빛을 강조하는 고딕 건축 양식의 정신을 선언했다면, 상스대성당은 실제로 고딕 건축 양식의 길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처음 고딕 양식을 시도한 성당이라서 고딕 양식의 대명사인 아주 높은 공간보다는 큰 공간을 추구했다.
파리 근처에 있는 소도시, 상스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서 파리 근교를 지나 A1 고속도로 타고 동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 가면 소도시 상스를 만난다. 상스 관광안내책자에 '당신은 벌써 부르고뉴에 와있습니다.'라는 문구처럼 상스는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고뉴 지역의 맨 북쪽 입구다. 시내에 들어서면 옛적에 마차가 다니던 좁은 일방통행 차도 양쪽에 상가나 식당과 가정집들은 줄지어 있다. 타운 여기저기 옛 영광을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선 소도시 분위기가 묻어난다. 하지만 상스는 중세에서 18 세기까지도 북 프랑스에서 크게 번창했던 도시였다. 그 시절 상스는 동서로 샴페인 지방과 올리엔즈을 잇고, 남북으로는 리용과 파리를 연결하는 ‘파리의 관문’이었다. 특히, 상스에는 파리, 트로아, 오르리안즈, 샤르트르의 주교들을 감독하며 교황과 직접 소통하는 막강한 수좌주교가 있었던 곳이다. 상스는 교구를 감독하는 관구로 수좌주교가 맡고 있어 그 파워가 막강했다. 그래서 12 세기 당시 아주 파격적인 고딕 양식의 성당을 처음 지을 수 있었다.
성당 건축 역사는?
성당을 감상하기 전, 성당의 역사를 간단히 리뷰하자. 성당은 관구장인 생글리어(Henri Sanglier) 수좌주교가 성당 재건축을 결정하고 1130 년에 시공해 4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거의 완공해 성 스테판에게 봉헌했다. 1184 년 대화재로 성당 일부가 붕괴돼 빛이 성당 안으로 잘 들어오게 하려고 채광창과 늑재 아치 궁륭을 높게 올렸다. 1268년에는 남쪽 탑이 무너져 20여 년에 걸쳐 다시 짓고, 이 기회에 남쪽 탑과 연결해 정원을 품고 있는 ㅁ자형 대주교 관저도 완공했다. 원래 성당은 익부가 없는 일자형 구조였으나, 16세기에는 교차랑을 확장해 북쪽과 남쪽 익부를 플라브아양 양식으로 짓고, 크고 양쪽 익부에 화려한 장미창을 올렸다. 그리해, 성당은 1168 년 거의 완공을 한 뒤 여러 세기 동안 새로운 고딕 양식에 맞추어 다양한 양식으로 개축했다. 하지만, 성당 내부가 큰 공간으로 모아지는 일자형 구조는 그대로 유지해 처음 시도한 초고딕 양식의 기본 틀을 지금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성 스테판을 모시는 서쪽 파사드
성당은 상스 시내 가운데 넓은 광장을 마주 보고 있다. 성당 입구인 서쪽 파사드는 생드니 수도원 성당 서쪽 파사드와 비슷하게 4 개의 큰 기둥 사이로 오른쪽, 가운데, 왼쪽 부분으로 나눠지고, 다시 아래에서 위로 입구층, 아치창층, 장식 기둥층으로 나눠진다. 처음 고딕 양식을 시도하는 거라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 균형감이 조금 떨어진다. 고딕 성당의 얼굴인 서쪽 파사드의 건축과 예술이 발전하는 첫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성당은 성 스테판에게 바친 성당이어서 중앙 정문의 주제는 성 스테판의 순교다. 중앙문 가운데 문설주에는 성 스테판 직립 조각상이 하늘의 예루살렘인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서있는 모습이 성스러움을 강조해서인지 슬프고 조금 경직된 느낌이다. 성 스테판이 서 있는 정문 위 팀파눔에는 거리에서 설교하는 스테판, 돌로 쳐 죽임 속에서는 기도하는 스테판, 육체를 떠난 그의 영혼은 하늘 보좌에 정좌한 그리스도 앞에서 천사들에 둘러싸여 영접으로 받고 있는 스테판 순교의 전 과정을 그렸다. 상스대성당의 조각들은 세련미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과 달리 성당을 지은 12 세기에 와서야 고딕 양식이 비로소 꽃 피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성 스테판에게 봉헌한 서쪽 파사드 중앙문
성 스테판 조각상
성당 내부: 넓은 공간을 짓다
성당에 들어서면 큰 공간을 만난다. 고딕 양식이라 높지만, 높이 솟아 있는 느낌보다는 높으면서도 넉넉한 느낌이다. 상스대성당은 처음 초기 고딕 건축 양식을 시도해 높기 만한 공간보다는 높으면서도 넓은 공간을 추구했다. 초기 고딕 양식을 지나 높은 고딕 양식이 시작되면서 고딕 성당은 가파르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성당에 들어서서 신랑을 지나 성당 끝, 내진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서 성당 내부를 감상하자. 성당 천장은 6 분 늑재 교차 궁륭 구조다. 중심 기둥들이 솟아 궁륭 교차 늑재로 변하면서 X 식 대각선으로 늑재 교차 아치 천장을 형성한다. 다시 2 개 중심 기둥 사이에 가는 중간 기둥을 세워 중간 기둥에서 X 식 아치 천장 늑재의 허리를 가로질러 6 분 아치 궁륭을 만든다. 이 6분 늑재 교차 궁륭이 성당 구조의 기본 단위가 돼 이 구조를 반복하면서 성당 내부가 완성된다. 여기서 처음 고딕 성당의 특징인 늑재 교차 궁륭을 볼 수 있다.
성당 벽은 기둥을 따라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아케이드층, 트리포리움층, 채광창의 3 층 구조다. 아케이드층은 성당 궁륭 높이의 절반 가량 될 만큼 높다. 아케이드층에 비하면 토리포리움층과 채광창은 비교적 낮다. 눈여겨보면 아케이드 아치가 높아 아케이드층이 품는 측랑의 큰 공간을 확보하고 이 공간이 신랑의 중심 공간을 둘러싸며 열려 있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서 느끼는 무거운 돌의 물질감을 걷어내고 공간성을 강조했다.
그러면 여기서 성당을 고딕 양식으로 만드는 특징을 짚어보자. 성당의 기둥, 창, 궁륭 교차 늑재 등, 기본 구조는 뾰족아치다.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의 통 기둥이 아니고 보다 다발 기둥들이 시도했다. 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늑재가 없는 둥근 천장이 아니고 늑재들이 교차하면서 만드는 교차 아치 궁륭도 시도했다. 하지만 가장 큰 고딕의 특징은 새로운 건축 기술로 지은 부분들이 모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통일된 구조를 지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북쪽 익부에 세례 요한을 모시는 예배실이 있다. 이 예배실은 성당을 짓은 후 40 년이나 지났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 예배실 천장은 석굴암 지붕처럼 둥근 돔이고, 돔을 지지하는 벽은 두꺼운 돌벽이다. 두꺼운 벽을 뚫어 작게 창을 내 돌의 물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돌의 무게가 중후한 미학이 보여준다. 성당을 짓고 40 년 지난 뒤, 고딕 양식이 한창 발전하는 시기 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예배실을 지었을까? 잊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향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사실, 건축 양식은 미술사를 시대에 따라 흑백으로 분명히 나누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오랫동안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을 자연스럽게 섞어 사용했다.
상스대성당과 생드니 수도원 성당은 어떻게 다를까?
여기서 상스대성당과 생드니 수도원 성당의 고딕 양식을 비교해보자. 상스대성당과 생드니 수도원 성당 후진은 거의 같은 때에 지어졌지만, 야심 찬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르는 비록 성당 의 일부분이지만 후진 회랑을 개축하면서 대담하게 처음 고딕 양식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빛을 담는 공간이라는 건축 개념을 실험했다. 하지만, 상스대성당은 처음 성당 전체를 고딕 양식으로 완공했지만, 성당 곳곳에 로마네스크 양식이 남아있어, 로마네스크 양식의 틀 위에 고딕 양식의 옷을 입혔다고 할 수 있다. 상스대성당 건축에선 꼭 빛이라는 고딕 양식의 이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성당은 보다 신중하고, 보수적이고, 신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늑재 교차 궁륭, 다발 기둥, 뾰족아치 구조, 벽 구조의 디자인, 고딕 양식의 기하학적 디자인인 트레이셔리 아치창 등, 고딕 건축의 기본 요소들을 모두 갖추었다.
플랑부아양 양식으로 지은 익부
성당 교차랑에 서서 익부를 감상하자. 익부는 교차랑 양쪽 한 구간 씩 확장해 지었다. 그래서, 원래 성당의 긴 배 같은 일자형 기본 틀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익부는 원래 성당이 완공된 뒤 350 년이나 지나 마지막 고딕 양식인 화려한 플라부아양 양식으로 지어졌다. 플랑부아양 양식에서는 아케이드, 트리포리움층, 천측창의 3 층 벽 구조에서 트리포리움층을 없애고 천측 창을 아래로 확장해 큰 스테인드글라스 천측 창과 한층 높아진 아케이드 층의 2 층 구조 변모했다. 성당 익부 벽의 아래 절반은 아케이드층이 품는 공간이며, 윗 절반은 큰 스테인드글라스 창이어서 벽의 ‘군더더기’ 물성을 걷어냈다. 물성이 제거된 벽은 한결 가볍고 밝아졌다.
플라부아양 양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북쪽 익부 장미창을 감상하자. 직경이 11 미터의 장대한 장미창이 북쪽 익부 입구 벽의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다. 북쪽 장미창의 주제는 ‘천사들의 합창’이다. 이 장미창은 그리스도의 빛이 마치 꽃봉오리들이 잇달아 피어나는 것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불꽃이 터지는 이미지를 그린 장미창이다. 안쪽 꽃잎에는 진한 붉은빛, 바깥 꽃잎에는 밝은 코발트 빛이다. 꽃잎마다 천사들이 공후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하늘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장미창의 트레이셔리 디자인과 코발트와 붉은빛이 어우러져 우아하다. 파리대성당의 장미창이 레뇨낭 (빛 사방으로 퍼지는) 양식의 대표적인 장미창이라면, 이 장미창은 화려한 플라부아양 양식의 대표작이다. 파리대성당 장미창에선 하늘의 빛이 중심에서 사방으로 곧장 퍼진다면, 성당 장미창에선 마치 천사들의 노래가 퍼지는 듯 불꽃이 우아하게 번져 나간다. 처음 성당을 찾은 때는 비가 내리는 저녁이었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 어둠이 깃든 성당을 잠시 돌아보고 트로아로 떠났다. 그래서 성당을 생각하면 우중충한 느낌이었다. 다음 해는 다시 성당을 찾았을 때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땐 이틀 머물면서 성당을 보다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서 큰 공간을 마주했다. 아! 여기가 처음 고딕의 길을 연 성당이구나 하는 감동이 왔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무거운 물성이 걷히고 공간성이 느껴진다. 교차랑에 서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어둠에서 깨어나는 북쪽과 남쪽 장미창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중세 사람들은 병마가 들끓는 가난하고 불안한 이 땅의 삶에서 잠시나마 그들이 앙망하던 하늘나라의 끝자락을 체험할 수 있는 행복한 감격을 느꼈을까. 다만 다시 보고 다시 볼뿐이다.
북쪽과 남쪽 익부 파사드
북쪽 장미창을 감상 한 뒤 밖으로 나와 북쪽 익부 파사드를 감상하자. 북쪽 익부 파사드는 플라부아양 양식의 ‘고딕의 절정에서 피어난 마지막 불꽃’으로 불리는 대작이다. 북쪽 익부 파사드는 16세기 플랑부아양 양식의 중심이었던 건축가 마르땡 샹비주(Martin Chambige)의 뛰어난 작품이다. 마르땡 샹비주는 고딕 성당 중 가장 높은 천장이 50 미터나 되는 보베대성당의 장대한 남쪽 익부 파사드를 지었다. 여기 성당의 북쪽 파사드는 보베대성당 파사드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규모는 작지만, 파사드 양쪽에 높이 솟은 장대한 기둥과 그 기둥 사이 벽에 수많은 조각들을 벽 무늬로 장식했다. 그리고, 두 지주 기둥 사이에 정문을 세우고, 정문 위에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불꽃처럼 긴 타원형 탑을 올렸다. 이 불꽃 모양 첨탑은 그 위 ‘천사들의 합창’ 장미창을 향해 불타 오른다.
성당 남쪽 외관과 주교관과 박물관으로 둘러싸인 ㅁ 자 모양의 아담한 뜰이 있다. 이 뜰에서 여기서 음악이나 예술 공연, 시민 모임 등의 다양한 행사들이 열린다. 아침 일찍 아담한 뜰을 둘러싸는 ㅁ자 건물 박물관을 들어가보니 뜻밖에 규모가 크다. 성당 유품 뿐 아니라, 열 몇개나 되고 전시실마다 성당 유품 뿐 아니라 석기시대, 청동기, 철기시대를 지나 프랑스 대혁명까지 상스-파리 지역 중심으로 발굴한 고고학 유품들이 가득하다. 센강 중심으로 발달한 북프랑스 지역에 선사시대 전부터 인류가 살아온 문화 인류의 역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아침 일찍 성당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오니 마침 성당 앞 광장에 장이 섰다. 좌판부터 커피, 연어, 도미, 베이커리, 화원 등,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다. 우리 시골 5 일장 같다. 사람들이 붐볐다. 농심 신컵도 눈에 띄었다. 반가웠다. 2 통 샀다. 낯선 여행자 눈에는 상스가 좀 후미진 작은 타운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인산인해 파리처럼 상스에서도 사람들이 매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