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A6 하이웨이로 4 시간 정도 내려오다 아발론 근처에서 나와 나 모흐-벙 국립 자연보호 숲으로 들어서면 높은 구릉들이 차츰 낮아지면서 넓게 펼쳐진 분지가 나온다. 분지 한가운데 마치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는 공룡 같은 꽤 높고 긴 언덕을 만난다. 이 언덕에 중세 마을 베즐레(Vezelay)가 자리 잡고 있다. 언덕 마을을 올라가면 ‘영원을 향한 언덕'위에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베즐레 수도원 성당(Vezelay Abbey)을 만난다.
몇 년 전, 베즐레를 처음 순례했을 때는 프랑스 50 십 년 만의 홍수여서 천둥이 내려치는 폭우를 뚫고 낯선 길을 전진했다. 하지만, 오늘은 길목마다 꽃동산인 5 월. 봄이 활짝 피었다. 날씨도 맑다. 저녁 늦게 지난번 머물었던 여인숙에서 도착, 꿀잠 자고 다음날 아침, 선 듯 일어나 영원을 향한 언덕을 올라 성당을 바라본다. 하늘은 청명, 공기 눈부시고, 몸은 가볍다.
베즐레 수도원 성당은 막달라 마리아를 섬기는 생 마들렌(Saint Madeleine) 성당이다. 원래 성당은 860 년 베네딕트 수도회에 소속된 클르니 수도원(Cluny Abbey)에서 막달라 마리아 성해를 봉헌하려고 수도원과 성당 지었다. 안타깝게도 1120 년 화재로 전소돼, 그 자리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큰 성당을 다시 지었다. 불행하게도 1165년, 다시 큰 화재로 교차랑과 내진이 전소되어, 과감하게도 당시 생소하기만 한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그래서 성당은 보기 드물게 신랑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내진의 고딕 양식을 함께 아우르는 성당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성당은 막달라 마리아 성해(聖人의 遺骸)를 모시는 성당이어서 수백 년 동안 오순절 성령 전파 운동 (펜타 코스트)의 중심이었다. 성당이 성령 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베즐레는 자연스럽게 산티아고 성지 순례길의 출발지로 떠올랐다. 또한, 베즐레는 2차, 3 차 십자군 원정의 출발지였다. 특히, 2 차 십자군 원정 때, 10만 명을 넘는 십자군 병력이 집결한 베즐레 성당 아래 치유의 계곡에 언덕에서 당시 유럽의 최고 신학자였으며, 시토 수도회 운동의 중심이었던 성 베르나르가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면서 성령운동을 설파 한 장소로 유명하다. 13세기 베즐레는 종교적, 정치적 뿐 아니라 경제적 중심지였다. 하지만 백년전쟁 (1339-1453) 이후 성당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프랑스 대혁명 때는 성당은 파괴돼 붕괴 직전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돼 왔다. 다행히 19세기 중엽, 복원되면서 성당은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에 지어 뛰어난 로마네스크 성당으로 꼽힌다. 성당에 들어서면 유난히 넓은 전실 (배랑,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이 나온다. 여기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이 머물면서 먼 순례를 준비했다. 전실에서 성당 안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문은 아주 크다. 특히, 문이 이고 있는 반원 팀파눔은 장대하다. 팀파눔은 문 위에 세운 장식이지만 거의 문 크기만 하다. 이 거대한 팀파눔 조각 세트는 오순절 다락방에 모여 있는 12 제자 앞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나 성령을 내리는 극적인 장면을 그렸다.
그리스도가 12제자들 앞에 불현듯 나타나 제자 한 사 람마다 번개 치듯 성령을 쏜다. 제자마다 성령에 감전돼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방언이 터져 나온다. 성령이 일으키는 돌풍이 어찌나 거센지 그리스도와 제자들 옷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팀파눔 둘러싸고 있는 안쪽 홍예에는 개머리 사람, 절름발이, 귀신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사람 등,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바깥 홍예에는 사람들이 달마다 살아가는 12 달 월령기의 풍경을 새겨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의 흐름을 그렸다. 팀파눔 아래 상인방에는 성령에 목말라 아우성치는 ‘땅 위의 모든 종족’을 미니 조각으로 가득히 조각했다. 이 장대한 조각은 베즐레 수도원 성당이 중세부터 수백 년 동안 오순절 성령운동의 중심이었음을 증언한다. 오순절 성령 운동은 십자군 원정의 정신적인 주춧돌이 되어, 2차와 3차 십자군이 성당 아래 ‘치유의 계곡’에 집결해 오순절 성령을 받으며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어두운 분위기가 감도는 긴 신랑과 저 신랑 끝에 고딕 양식으로 지은 밝은 내진을 만난다.
신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마지막 양식인 반원 그로인 궁륭을 지어 아담한 공간을 품고 있다. 너무 높지 않아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가파른 높이보다 넉넉한 공간을 추구했다. 신랑의 뛰어난 특징은 내부를 모자이크처럼 다양한 색조로 지었다는 점이다. 이런 내부 장식은 다른 성당에선 찾아보기 쉽지 않다. 또한 베즐레 수도원 성당에서는 화려한 조각은 피했다. 그 대신 연회색이나 회색, 연한 분홍과 연갈색 석재들을 사용해 연한 색감으로 벽과 기둥을 장식했다. 특히, 궁륭과 아케이드에는 암갈색과 우유빛 석재를 번갈아 사용해 이방 연속무늬로 이어지는 리듬을 창조했다. 모든 석재의 색조는 무채색에 가까워 색 무늬가 첫눈에는 심심한 것 같지만 잔잔하게 우러나 마치 돌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감동을 준다. 마치 성당 내부에 조용한 배음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팔각형 아름다운 20 개 기둥머리마다 아담과 이브의 천국 추방부터, 12 제자들의 수난, 성인들의 순교 등, 모두 300개가 넘는 구약과 신약 메시지를 기둥머리마다 아로새겼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긴 신랑을 지나 내진으로 들어서면 밝아진다. 내진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 신랑보다 높고 넓고 밝다. 내진은 3 층으로 나눠졌다. 맨 아래 아케이드층, 그 위는 작은 갤러리층와 채광창으로 되어있다. 아케이드층의 기둥머리마다 세 개의 다발 기둥들이 채광창 허리까지 단숨에 올라간다. 여기서 세 기둥들은 나뭇가지처럼 갈라져 천장을 가로질러 반대쪽에서 똑같이 올라온 다발 기둥들과 만나 늑재 교차 궁륭을 이룬다. 신랑에는 창이 크지 않아서 빛이 잘 들지 않지만 내진에는 큰 아케이드층의 창과 채광창으로 빛이 들어와 밝다. 로마네스크 양식에선 공간 개념이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고딕 양식에서는 공간이 기본 개념이어서 공간을 먼저 설계한 뒤, 그 공간을 담는 구조를 설계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신랑이 돌의 아름다움이라면 고딕 양식의 내진은 공간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신랑과 내진을 잇는 교차랑에 서서 양쪽을 번갈아 보면, 두 건축 양식의 큰 차이점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랑은 색감 있는 석재들을 사용해 자연의 무늬로 장식하고, 기둥머리마다 조각을 새겼다면, 내진은 장식 없이 높은 아치 기둥을 세워 공간을 짓는데 초점을 두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지은 신랑은 벽면의 구조라면, 고딕 양식으로 지은 내진은 선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먼동이 트는 무렵 성당 안으로 그 유명한 아침햇살이 들어오는 광경을 보러 성당에 올라갔다. 정문을 비집고 성당 안에 들어서니 저 성당 끝으로부터 아침 햇살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눈부신 빛의 파도가 성당 구석구석 채우고 있었다. 아케이드 기둥머리마다 새겨진 노아의 방주 동물과 새들이, 천사의 날개소리가, 야곱의 거친 숨소리가, 세례 요한의 잘린 목이 깊은 어둠에서 깨어나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침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해 30여 분 만에 마치 암흑의 동굴에 빛 폭포가 쏟아진 듯 성당은 빛으로 가득했다.
내진 회랑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막달라 마리아 성해를 모신 지하 예배소가 나온다. 성당 지하 예배소엔 막달라 마리아 성해를 모시고 있다. 여기서 순례자들은 기도하고 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를 떠났다. 지금도 베즐레에선 봄과 가을에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고 있다.
성당에서 베즐레 언덕 마을의 등뼈 같은 가운데 길 따라 내려가면 큰길은 작은 길로, 작은 길은 다시 골목길로 나누어진다. 길 양쪽에 수령이 오래된 집들이 홍합처럼 붙어있다. 낡은 집들이지만 쇠락했다는 느낌보다는 베즐레 역사 속에 녹아든 자연 같다. 등뼈 길에는 드문드문 조가비 동판이 박혀 있어 순례자들이 성당에서 기도드린 후 이 길로 내려와 먼 순례길을 떠났음을 알려준다. 크고 작은 길마다 아기자기한 레스토랑, 특산물 백포도주 가게, 그냥 가게, 화랑도 많고 유서 깊은 현대 미술 저보스 미술관도 있다.
저보스 (Christian Zervos) 미술관은 깨끗한 흰 이층 건물이다. 20세기 전반 현대 미술의 황금기에 미술 평론가 저보스의 소장품을 대문호 로맹로랑이 집필하던 사저에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밖에서는 그냥 깨끗한 이층 집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크고 넓은 반지하, 일층, 이층이다. 여기에는 특히 피카소 작품이 많아 피카소 전시실이 두 개, 피카소 외에도 칸딘스키, 에른스터, 클레, 레게, 미로, 지아코메티, 등, 20세기 미술 대표 작가들 망라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미술관 뒷문을 밀고 나가면 긴 직사각형 테라스 정원이 나온다. 모르반계곡이 탁 트이게 내려다 보인다. 5월의 고느적한 오후. 한갓지다. 중세마을 언덕에 이런 알짜배기 현대 미술관이 숨어있다니!
성당 오른쪽 숲으로 난 오솔길을 잠시 내려가면 넓은 뜰이 나오고 뜰 가운데 아람 드리 주춧돌 바위 위에 세운 전신주 높이의 나무 십자가가 우뚝 서있다. 여기가 성 베르나르드 수도원장이 2차 십자군 원정 설교했던 유명한 자리다. 베즐레 수도원 성당 펜타 코스트 오순절 성령운동 조각이 완성된 지 16년이 지나 베즐레 수도원 성당 아래 언덕에 루이 7세가 이끄는 왕, 귀족, 기사 등, 농노까지 총 망라한 십여만 명 군사들이 여기서 베르나르드 수도원장은 교황은 '신의 분노를 잠재우며 분연히 일어라'는 역사적인 설교를 했다. 성 베르나르 수도원장은 당시 유럽 기독교의 최고 정신적 지도자였다. (세인트 버나드 반려견은 성 베르나르드 이름을 땄고, 알프스 산 시토회 수도원에서 수백 년 동안 키워온 구조견이다.).
베즐레는 주민이 500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쥘 루아, 로맹 롤랑 등 유명한 문인들이 머물렀던 예술의 마을로 지금도 음악가, 문인들이 모여 살면서 창작 활동을 하는 마을로 유명하다. 유서 깊은 문인 묘역도 성당 뒤 언덕에 있어 지금도 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베즐레 마을은 미네랄 맛과 과일향이 조화를 이룬 샤도네이 백포도주로 유명하다. 해마다 겨울이면 와인 축제가 열려 이 조그만 마을에 와인 애호가 수만 명이 모여든다. 프랑스에서 해마다 가장 아름다운 100 개 마을 중 하나로 꼽힌다.
마을 아래쪽으로 완만하게 펼쳐진 ‘치유의 계곡”은 콤포스텔라 순례의 출발지 되었으며, 여기서 2차, 3 차 십자군 원정도 출발했다. 베즐레는 중세에는 주요 성지 순례지였으며, 지금도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