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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 Mar 20. 2020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요 우리, 어려워도.

런던에서 살아남기#3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몇 년 전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브런치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 늘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다. 승인이 나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블로그에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었지만 그래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글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나 혼자 적고 생각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이 글이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읽어도 되는 글인지,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글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리는 일임을 알지만 꼭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고 나서 내 글을 사람들에게 펼쳐 놓고 싶었다. 

앞서 두 번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기다렸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브런치 작가 승인 메일을 본 순간 기쁨과 동시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제목의 메일 밑에는 그 전날 밤 학교에서 온 메일이 있었다. 'You should return to your main place of residence, such as a parental home, if you can'.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영국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으니 학생들에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인생은 늘 종이 한 장 차이로 희비가 갈린다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반가운 시작과 갑작스러운 끝맺음. 두 메일 사이에 놓인 얇은 선의 위와 아래는 전하는 내용이,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의미가 너무나도 달랐다.





한국에 돌아가게 됐다.


이 곳에 오기 전에는 런던에서의 삶을 어떻게 시작할지, 어떻게 펼쳐 나가게 될지 상상했었다. 챙겨간 짐을 풀어 기숙사를 내 방처럼 만들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도시와 친해지고, 보고 싶었던 공연을 실컷 보는, 새로운 모든 것에 젖어들 상상이었다.

상상 속에 있던 일들을 하나씩 현실로 끄집어내고 나서부터는 모든 것을 다 끝낸 후에 한국에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해 상상했다. 졸업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끝내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잔뜩 사고, 정들었던 곳곳을 다시 가보면서 추억을 되새기는 그런 일들. 힘들었지만 이 정도면 잘했다, 하는 뿌듯함을 안고 홀가분하게 돌아가리라 상상했었다. 이렇게 급한 짐만 싸들고 한국에 돌아가는 일은 내 상상 리스트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 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 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 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철없는 저는 못 알아들을 테고 앞으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게 되겠지요.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133p.


집을 떠나오기 전 마음에 계속 맴돌던 문장이다.

정들고 익숙한 모든 것들을 떠나야 했던 그때의 나에게 저 문장은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그리움의 촉매제였고, 소위 말하는 '눈물 버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영국에서의 시간은 저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역시. 아마도 나는 더 먼 미래의 내가 그 당시의 나에게 미리 던져준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고, 해야 할 일들은 잔뜩이며, 상황이 나아지면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지만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지금의 상황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은 그토록 그리웠던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다가, 또 어느 순간은 좁다고 생각했던 내 방 구석구석마저 벌써 그립고 애틋하다.


런던의 내 방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


왜 인간은, 나는 늘 이런 식일까.

눈 앞에 놓였을 때는 얼마나 중요한지 혹은 행복한지 알지 못하다가 지나고 나서, 끝이 보일 때가 되어서야 아쉬움을 느끼는 것일까. 

인생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모두가 예상치 못했던 각자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정말 매 순간을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당장 몇 시간 후, 며칠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혹은 먼 곳에 일어난 일이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을 테니까.


앞으로의 '런던에서 살아남기'는 서울에서 쓰게 되겠지만, 그래도 멈추지는 않으려고 한다.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적는 글이었으니 오히려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더 잘 써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몇 달 후에는 후속 편으로 '서울에서 살아남기'를 시작할지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 외에 '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도시였던 이 곳. 늘 애증, love and hate라는 말이 런던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단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love에 중점을 두고 다시 한번 이 곳에서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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