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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수 Jan 20. 2024

소통이라고 착각하는 당신_2


 어머니는 사람을 비교하는 것을 전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 같다. 그분에게 비교란 그저 대화 방식의 하나였다. 사람을 멀쩡히 앞에 두고 비교하는 행위는 분명 언어폭력에 가까웠다. 오래전 말이 늦었던 나의 큰아이와 말이 제법 빨라 보였던 동서 형님의 아이를 비교하는 말씀은 적잖이 스트레스였다. 한 번은 어머님이 '가는 뭐라고 뭐라고 지끼는데 야는 아직 암말도 못하나?' 하셨다. 재미있는 것은 동서 형님의 아기는 내 아이보다 한살이 적어서 그 집 아기가 지낀다는 것은 다름 아닌 옹알이었다. 그렇게 옹알이를 하는 아이와 말이 좀 늦다고 판단되는 내 아이를 코미디처럼 비교하셨다. 사람은 너무 좋은데 몇 안 되는 그분의 오점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어머님이 보유하시는 <비교 DNA>는 그야말로 강했다. 나는 신혼부터 오랜 기간 동안 남편의 비교하는 발언에 꽤 충격을 받았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라는 생각을 상대로부터 들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 말 때문에 다투다가 그런 언어 습관에 대해 지적을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말도 못 하냐'였다. 이 또한 충격이었다. 손찌검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 한마디도 맘대로 못하냐는 식이었다. 어머니도 본인이 행하는 비교에 대해서 분명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님의 건강을 위해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것을 많이 드시도록 잘 챙기셨다. '니 아부지 몸에 좋다는 거 많이 갈아 믹있다'라며 당신의 잘 한 점은 누가 알아주지 않을까 봐 공치사하셨다. 어머님 말씀만 들으면 세상 최고가는 열녀였다. 그 공치사하시는 행동들은 아버님을 다른 집 영감들과 비교하고 깎아내리면서 반의 반토막으로 희석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과 통화를 하다가 아버님의 못마땅한 행동에 대해 하소연을 자주 하셨다. 어머니가 불평하시는 아버님의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 아내에게 단단히 화가 난 여느 남편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다정하지 못하고 생전 말 한마디 안 하는 아버님에 대해 그 모습이 그분의 진심이고 본모습이라고 단정 지으신 것 같다. 오토바이로 이동을 하시는 덕분에 시내에서 물건을 살 일이 있으면 아버님은 어머님의 심부름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았다. 정말 최악은 아니라는 거다. 재미있는 점은 아버님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꽃미남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물건값을 깎을 줄 아는 분이셨다. 그것도 경상도 남자가 말이다!


 


 얼마 전에도 이 집안의 비교 DNA가 발현하여 한숨이 나온 적이 있었다. 온 식구가 모여 김장을 하는 날이었다. 남편이 무엇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시누는 자신의 오빠에 대해 칭찬일색이었다. 나와 남편, 시누와 시누의 남편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자리에서 시누는 자신의 남편에게 연신 '오빠 좀 닮아봐, 오빠 좀 닮아봐.'라고 했다. 비교당하는 사람, 비교의 기준이 되는 잘 난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자리였다. 나는 그 자리가 민망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비교당하는 사람은 어차피 비교를 당하니 기분이 나쁠 것이고 '모태 비교 DNA'를 타고난 두 사람은 문제점이 무엇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시누의 아이가 제대로 비뚤어져 버렸다. 수년 전 시누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화장실이 급한데 거실에 있는 화장실은 사용 중이라 그 집 안방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안방에는 시누와 조카가 함께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나 했더니 시누는 아이가 영어 학원에 가기 전 숙제로 익힌 영어 단어를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와 마주 앉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침대의 이불을 정리하면서 입으로는 영어 퀴즈를 내는 데 열심이었다. 엄마가 영어 단어를 말하면 아이는 우리말 뜻을 대답했는데 틀린 것이 없이 정확하게 척척 맞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좀 유난스럽다고 느꼈다. 엄마와의 영어 단어 체크 시간은 대화일까 상담일까.




 비슷한 모습을 다른 엄마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때, 에어로켓 대회를 나가게 되었다고 했다. 2명이 한 팀이 되어 작품을 만들면 되는데 아이의 말로는 별로 친하지 않은 반 친구 하나가 에어 로켓을 같이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친구들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내 아이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소통 능력이 부족하여 툭하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운다고 했다. 남자아이들은 짓궂어서 그런 아이를 찌질이라고 부르고 놀려댔다. 그 아이와 엄마가 에어 로켓을 만들려고 우리 집에 왔다. 부품을 조립하면서 무엇보다 설명서를 읽으며 그것에 집중해야 했다. 그런 중에 한 가지 거슬리는 일이 생겼다. 아이가 무언가를 손에 들면 그 엄마는 "이게 뭐야? 이건 무슨 모양이지? 설명서에 이렇게 나오는데 무슨 뜻이야?"라며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집중하여 만들기도 바쁜데 애한테 뭔 질문을 저렇게 해대나 생각하다가 '직업이 선생님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 엄마는 정말 선생님이 맞았다. 직업 정신을 발휘하는 것은 좋지만 굳이 남의 집까지 와서?



 그 엄마를 보면서 나는 또 다른 의문을 가졌다. 그 아이가 소통 능력이 부족한 것이 엄마의 일방적인 대화 방식 때문일까, 아니면 아이가 소통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엄마가 저렇게 노력을 하는 것일까?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 엄마는 다른 잡담 없이 매뉴얼에 있는 것을 읊는 상담자처럼 아이에게 계속 질문만 해댔다. 자신의 육아 방식이 최고의 것인 것처럼 다정한 듯 전혀 다정하지 않은 모습으로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상담자와 내담자 같은 기름기가 쏙 빠진 대화 속에서 아이도 기름기를 쏙 빼고 다른 잡담 없이 엄마의 물음에 알맞은 대답을 했다. 나는 그 아이와 그 엄마의 행동에 대한 인과관계가 차라리 후자이기를 바랐다. 만약에 전자의 경우라면 가슴 한쪽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엄마가 저렇게 쪽지시험 보듯 질문만 쏟아낸다면? 난 차라리 무뚝뚝한 엄마를 선택하겠다. 아니 똑똑하지 않아도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엄마를 택하겠다.  



 

 조카가 올바른 인성을 가지고 성장했다면 그건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다. 시누 부부의 육아 방식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조카는 어릴 적부터 많이 혼나는 편에 속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혼나곤 했다. 또래의 사촌들이 보는 앞에서 혼나고 때로는 맞는 일도 있었다. 주로 혼내는 사람은 시누의 남편이었다. 훌쩍 자란 아이는 엄마를 미워하고 엄마를 막대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예전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제목의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개선해 주는 인기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정상 범위를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바로잡아 주고 부모에게도 올바른 육아 방침을 안내해 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문제 있는 아이들 뒤에는 문제 있는 부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이 실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아니고 '우리 부모가 달라졌어요'라고 했다. 시누의 아이가 엄마를 그렇게 극도로 미워한다면 시누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유전받은 비교 DNA를 아이에게만은 적용하지 않았길 바란다.



 

 다시 돌아와서, 어머니와 아버님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한다. 두 분을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면 한없이 좋으신 분들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원한사실 행동을 절대 하지 않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신 그저 평범한 우리 아버지 어머니이다. 티격태격하는 모습만 없다면 참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이었다. 아쉽게도 갱년기가 지나도 한참 지났을 어머니는 감정기복을 주체 못 하는 갱년기의 여성처럼 아버님을 향해 갑자기 화를 내기 일쑤였고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지 않은 늙은 남편과의 하루를 잔소리와 지적으로 시작했다. 늙은 아내에게 혼나기가 일상이었던 아버님은 그분대로 화가 나신 상태로 지내시고 뚱한 남편이 못마땅한 어머님은 또 잔소리를 퍼부으시며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고 거듭되었다.



 내가 시집을 오기 전 삼 남매 중 두 자식이 아직 출가를 하지 않은 때, 아버님이 대장암에 걸려 온 식구가 절망에 빠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돌아가실까 봐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셨다고 하셨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즈음에는 사실만큼 사셔서 그때의 기억을 싹 지워버리신 건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다행히 아버님이 진단받았던 대장암은 다른 대형 병원에서 다시 검사한 결과 오진으로 판명 나고 다시 웃음을 되찾으셨다고 들었다. 어머님은 하고 싶을 말을 꾹꾹 참고 사니는 스타일도 아니다. 어머니 당신원하는 것을 아버님이 하나 안 하나 실눈을 뜨고 벼르다가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이것 좀 해주세요, 저것 좀 해주세요.' 라며 현명하게 아버님을 코치를 하실 생각을 왜 못하신 걸까. 50여 년 가까운 긴 세월을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아버님을 다른 집 영감들과 비교하기를 서슴지 않으셨는데 어머니 당신께서는 아버님으로부터 비교하는 말씀을 들어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다. 그것은 내가 내 남편에게 일러준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남편과 말다툼을 하면서 외쳤다.

"당신은 집에서 왜 비교당하는 경험을 못해 봤는지 알아? 그건 내가 그런 천박한 짓에 취미가 없기 때문이야!"

당신이 비교를 당해본 경험이 없다면 그건 너무나도 간단하게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비교하는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비교를 당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나서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그저 당신 앞의 파트너가 '비교'라는 교양 없는 행위를 안 한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조금은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어머니는 아버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닦달하며 그저 평범하신 아버님을 형편없는 영감으로 몰아치셨다. 어머니는 또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희생만 하고 살았다'


 

 제3 삼자이고 며느리인 내 눈에는 분명 이 두 분에게는 화해가 필요했다.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두 분은 화해를 할 시간을 영영 가지시질 못했다. 아버님응급실에 누워 계신 며칠 동안  잠시 만이라도  정신을 차리시는 순간이 왔으면 했지만 현실은 야속했다. 뇌사 상태에 빠지신 아버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할 때 나는 과연 식구들이 하는 말들을 아버님은 듣고 실까 궁금했다.



 돈독함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던 노부부는 그렇게 헤어졌다. 스스로 세상 최고 가는 아내라고 자부하듯 상대방의 긍정적인 면은 무시해 버리는 어머니의 태도는 분명히 오만함이었다. 아버님에게도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었다. 좋은 면이던 별로인 면이던 어머니의 성격을 많이 닮은 남편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은 마누라 100번을 바꿔도 불평불만 계속 나올 사람이야."




 어머니에게 아버님과의 결혼 생활이 온통 불만 투성이었던 동안 아버님이 바라보는 어머니는 어떤 종류의 아내였을까. 내가 아버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으니 그분이 만약 어머니와의 결혼 생활이 만족스러웠다고 하신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시골집에 방문했을 때 아버님 생각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어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저렇게 그리워하실 것을.......'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를 보며 속으로 상상했다. 아버님과 말다툼을 일삼던 날들이 떠올라 후회가 밀려온다고 하신다면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싶다. 아버님도 야속하게 그냥 떠나셨잖아요. 화해할 시간도 안 주시고.

만약 그런 후회조차 느끼실 감정의 여유가 없으시다면? 내 머리는 다시 띵해진다. 




 어머니가 마지막 인사를 하실 때 '다음 생에 다시 만나요'하기 전에 '그동안 타박해서 미안해요.'라는 말도 같이 덧붙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면 가시는 아버님 마음도 한결 더 편안하지 않으셨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길게 못 사시고 가신 아버님은 당신 딸이 자식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는 것을 보지는 못하셨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적 아들과 통화를 하면 아버님에 대해 하소연하던 어머니는 이제는 당신 딸과 손주에 대한 하소연으로 채우기 바쁘시다. 남편은 가족들과 통화를 할 때 늘 스피커폰 기능을 사용해서 듣지 않으려고 해도 통화 내용을 듣게 된다. 

"옛날에 어디 놀러 갔던 거 기억나나? 그때는 아가 그렇지 않았었거든. 사진을 보는 데 눈물이 나는 거라. 아가 어쩌다가 저렇게 괴물이 됐나. 내가 사진을 보면서 눈물이 났데이. 어쩌다가 아가 괴물이 됐나. 아이고"

남편은 어머니께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쩌다 그렇게 되긴. 지들이 그렇게 키웠지."



  

 아버님과 어머니가 큰소리로 말다툼을 하실 때 그러거나 말거라라는 듯 방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시누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누의 아이가 아빠에게 혼나고 상심에 빠지면 그 사이에서 시누는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을지 걱정스러워진다. 어머니처럼 시누도 '어쩌다가 애가 저렇게 되었나?' 하는 의문을 갖는다면 그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내 아이들이 엇나간다면 그것은 엄마인 내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아이가 엄마를 미워한다면 그 원인은 분명 엄마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망신을 당할까 주저하던 방송 출연 신청은 결국 없었던 일로 되었다. 그런 의견도 존중한다. 어쨌든 아이가 엇나간 원인에 대해 시누와 그 남편은 영영 풀 길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온 식구가 바라는 것은 아이가 그간의 못된 행동을 깨닫고 보통 아이로 스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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