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예민 영어강사의 수업일지 5
수업이 다 끝나고 수업자료를 챙겨서 나가려고 하는데 수강생 T가 다가왔다.
"선생님, 선생님이 볼 땐 Amy랑 Billy 중에서
누가 더 영어를 잘하는 것 같아요?"
난감한 질문이고, 내가 싫어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T의 생각도 궁금해져서 질문의 공을 T에게 다시 넘겨본다.
"Tony가 볼 땐 어떤데?"
"Amy는 발음은 좋은데 말할 때 문법적으로 틀리는 부분이 가끔 있는 것 같고, Billy는 writing한 거 보면 문법은 엄청 잘 아는 것 같은데 말할 때 너무 떠듬거려서 둘 중 누가 더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일단 이 말부터 할게. 둘 다 열심히 잘하고 있어. 누가 더 잘하고 못 하고는 없어. 둘 다 목표지점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그래도 누가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아요?"
"Amy는 영어의 소리에 먼저 익숙해져서 말하기에 자신감이 있고, Billy는 영어를 글로 쓰는 데 먼저 자신감이 생긴 것 같은데? 근데 둘 다 어떻게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어 내는지 방법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니까 각자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연습 중인 거 아닐까? 꾸준히 하다 보면 앞으로 영어에 더 익숙해지고 자신감이 생기겠지. 아직 연습하면서 영어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잖아."
영어공부에 있어 각자의 목표지점이 있다. 누군가는 원어민과의 자연스러운 대화, 또 다른 이는 회사에서 영어로 업무 가능해지기, 또는 토익 만점, 영어로 원서 편하게 읽기 등 다양하다. 그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공부하고 연습하면서 그 목표에 다가가면 되는 것이다. 각자 원하는 목표가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다르기에 누가 더 잘한다 못한다 우위를 정할 필요가 없다. 영어를 자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더 영어에 익숙할 것이고, 영어를 사용할 수 없지만 스스로 매일 연습하며 활용해 보려고 노력했다면 못지않게 영어를 쉽게 사용할 수도 있다.
'영어권에 살다 왔으니 영어는 완벽하겠지', '한국에서만 공부했으니 영어권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보다는 더 못할 거야' '발음이 좀 구린데 나보다 영어를 못하겠네' 이렇게 판단하며 순위를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판단의 주체가 되었다가도, 내가 그 판단의 대상이 되면 그 상황은 전혀 유쾌할 수가 없고, 그 판단의 눈과 귀 때문에 본인도 모르게 위축되기 십상이다.
성격적인 요인도 중요하다. 누군가의 앞에서 말을 해야 할 때, 모두 다 나를 주목하고 있을 때에도 평소 실력대로 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긴장되고 떨려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토대로 한 사람의 실력을 평가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은 적절하진 않은 것 같다.
우리도 면접을 보러 갔다가 그런 순간들을 자주 마주하지 않나.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다 못 하기도 하고, 압박 질문에 나도 모르게 어버버 하다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국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고, 옆에 있던 다른 면접 참가자가 '저 사람은 한국말을 나보다 못하네'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터디하다가 우리끼리 다른 팀에 있는 사람들 누가누가 영어를 잘하는 것 같다. 아니다 누가 더 잘한다. 이렇게 얘기를 가끔 했거든요. 제가 볼 땐 Amy가 더 잘하는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실수가 많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선생님 생각이 궁금했어요."
"사실 이런 질문은 Tony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많이 하는 편이야. 그런데 이런 질문이 점점 없어지면 좋을 것 같애."
'어학연수나 유학을 가서 영어를 마스터하려면 한국인 없는 곳에 가야된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인이 없는 외국인으로만 둘러싸인 환경에 있어야 습관적으로 한국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고 최대한 영어를 많이 사용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 한 가지 의미가 더 숨어있다. 그건 바로, 옆에 한국인이 없어야 틀려도 편하게 영어를 사용해 볼 수 있다는 거다.
생각해보면 참 씁쓸하다. 그만큼 옆에 있는 한국인이 자를 들고 대기하다가 내가 영어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 가늠하며, 실수를 했을 땐 여지없이 '쟤 틀렸네. 생각보다 못하네.' 이런 판단을 할까 봐 신경을 많이 쓴다는 이야기이니까. 그럼 어디 신경 쓰여서 말을 편하게 꺼낼 수 있겠나. 틀릴까 봐 말을 못 꺼낸다면, 그것은 그만큼 말할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영어를 배우고 사용하러 그 멀리까지 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말할 때 글 쓸 때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다.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고, 그 언어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한 실수를 금세 스스로 깨닫는다. 누군가의 실수에 자를 들이대며 그것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자. 넘어져봐야 일어날 수 있고, 그렇게 여러 번 반복되다 걷고 뛰고 점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Tony는 한국어 잘해?"
"네? 당연하죠. 한국 사람인데."
"그래? 그럼 어느 상황에서나? 어려운 사람 앞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도? 아니면 글도 잘 써? 문법적으로도 완벽하게?"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자신 없네요."
"영어도 똑같애. 내가 잘 아는 주제로 편한 사람과 얘기할 때는 말이 잘 나오기도 했다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떠듬거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표현을 몰라서 망설이기도 하는 거지. 난 사실 국어교육도 전공했거든? 그런데도 맞춤법이랑 띄어쓰기 틀릴 때도 많아."
사실 어느 하나의 언어를 굉장히 잘한다고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라는 이 4 skills에서 모두 완벽히 잘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어민들조차도 writing에서 문법적 오류를 보이거나, 매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사람도 많다. 어느 한 언어에 완벽하기란 아주아주 어려운 일이고, 우린 그저 그 언어를 자주 사용해보면서 실수를 수정해 보고 다듬으며 익숙해지는 것이다. 영어강사조차도 원어민만큼 유창하기는 쉽지 않으며 원어민도 컴퓨터처럼 완벽할 수는 없다.
한국에 온 외국인이 한국말을 할 때 조금은 어색한 표현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 외국인이 한국말을 꽤 잘한다고 칭찬해준다. 틀린 표현을 해도 상황에 따라 알아듣고 반응을 해주며, 그들이 그 표현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준다. 우리끼리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도 누군가의 앞에서 창피했던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 후로 입을 닫거나 포기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여유를 주자. 조금씩 실수를 줄여나가면서 반복적으로 교정하고 다듬는 연습을 하면 된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 아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인 베아트리체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 아이'라는 타인들의 인식과 그 시선에 항상 묶여있다.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자신이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실수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친구들과 스케이트도 타지 않는다. 그런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전혀 생소하지 않다. 어쩌면 영어를 배울 때 우리 주변에 이런 베아트리체가 많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