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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an 29. 2024

일본 유치원의 의자 빼기 게임(椅子取り ゲーム)

나와 너를 알아가는 시간

유치원 마지막 참관 수업에 참석했다. 
체육수업

 초등학교 입학 전 마지막 참관 수업이라고 생각하니 평소보다 의미가 깊었다. 참석한 학부모들은 아이와 함께 춤추는 시간도 갖고, 아이들이 체육(구르기, 균형 잡기, 뜀틀) 하는 모습도 지켜보고, 마지막순서인 '의자 빼기 게임(椅子取り ゲーム)'에 함께 참여했다. 

'의자 빼기 게임(椅子取り ゲーム)'중

 '의자 빼기 게임(椅子取り ゲーム)'은 어릴 때 우리나라에서 하던 방법과 동일했다. 게임에 참석하는 모든 인원수에 맞춰 의자를 준비한 뒤, 몇 개를 제하고 게임을 시작한다. 음악이 나오면 의자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음악이 멈추는 순간 의자에 앉는다. 의자에 앉지 못한 인원들은 게임에서 빠지고, 남은 인원들로 다시 의자를 줄이며 게임을 이어간다. 인원이 많아 의자의 개수를 5-7개씩 줄여갔고, 탈락자는 빠르게 늘어갔다. 개인적으로 크게 선호하는 게임은 아니었다. 음악이 멈추는 순간에 주의를 기울여 빠르게 의자에 앉아야 하는 그 긴장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슷한 이유로 숨바꼭질에서 숨는 역할을 할 때 술래에게 발견되는 순간의 그 긴장감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별다른 페널티는 없는 게임이었다. 의자에 못 앉으면 그걸로 끝이고, 생각하기에 따라 그 뒤로는 다른 사람들이 게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할 수도 있다. 물론 잘한다고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게 뭐라고 어릴 때는 음악이 언제 멈출지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한 의자 빼기 게임에서도 나의 본질은 크게 달라져 있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그 게임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어릴 때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사실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정도일까. 어릴 때는 노래가 멈추는 순간에 긴장했다면, 지금은 편한 마음으로 게임에 임했고 의자에 앉지 못해 게임에서 떨어져 나왔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고 정말 의자에 못 앉아 버렸지만;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것을 볼 계획이었는데,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아이가 아직 무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한 아이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다녔다. 

 아이는 예상보다 꽤 잘하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터득하지 못했던 요령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의자 앞을 지날 때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의자가 없는 의자와 의자 사이의 구간을 지날 때는 잽싸게 휙! 다시 의자 앞은 아주 느리게. 그 요령으로 아이는 계속 의자에 앉았다. 무엇보다 아이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좌)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게임, (우)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럼에도 의자의 개수가 줄자 요령만으로는 어려운 때가 왔고, 마침내 아이는 의자에 앉지 못했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무리로 달려갔다. 민망해서 해맑은 척했던 건지, 정말 아무렇지 않았는지, 혹은 정말 즐거웠는지는 모르겠다. 

 아이가 빠진 뒤 나는 비로소 제삼자의 입장으로 게임을 지켜보았다. 어느 정도는 요령으로 가능하지만, 운(運)도 필요한 게임이었다. 한 의자에 동시에 둘이 앉은 경우는 가위바위보(じゃんけんぽん)로 우열을 가렸고, 앉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가며 의자는 네 개, 두 개로 가짓수를 줄여갔다.  

 마침내는 의자 하나와 두 아이만 남았다. 마지막 게임이었다. 마지막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제대로 보았다. 한 아이의 예리하고 강렬한 눈빛을. 의자와 음악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던 그 아이의 강렬한 기운에 시선을 뗄 수 없었고, 그 아이가 우승자가 될 것을 예감했다. 드디어 음악이 멈췄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아이는 동시에 의자에 앉았고, 예리한 눈빛을 빛내던 그 아이는 순간 가차 없이 다른 아이를 의자에서 밀어내며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그때, 개인적으로 이 게임을 선호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를 알아챘다. 게임에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 미는 쪽도, 밀리는 쪽도 어느 쪽도 내키치 않아, 나는 이 게임을 좋아할 수 없었다. 

 마지막 게임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의 본성은, 타고난 부분이 강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애초에 게임에서 우승한 아이와 같은 성향의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편하게 인정한다. 시간이 흐르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그런 나를 바꾸려고 노력했거나, 그런 내 모습에 괴로워했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살을 겨눴던 반면 이제는 그냥 나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성향의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이렇게 태어났구나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그뿐인 것을, 전에는 그러한 나를 극복하지 못하면 마치 어떤 성취를 이루지 못할 것으로 확대 해석하며 속으로 날을 세우고 스스로에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의자 빼기 게임에서 빛을 발하는 성향이 있는 반면, 다른 분야에서 빛을 발하는 성향이 분명 있을 텐데, 전에는 나를 증명해야 하는 분야가 예를 들면 오직 의자 빼기 게임만! 있다고 여겼다. 

 또한 각자가 지닌 마음의 '결'이 있고, 다른 사람과의 '결'과의 조화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이 부담스럽고 불편했고, 나의 성정의 그 타고난 부분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안다. 아이 역시 나의 그러한 성향을 닮았다는 생각에, 솔직히 말하면 게임에서 우승한 아이와 같은 성향의 아이가 내 아이와 이룰 케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경우 어릴 때는 본능적 느낌에 따라 공동체에서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과 가까워지지 않았다면(혹은 가까워지지 못했다면), 이제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는 결이 (많이) 다르구나.'라고. 그런 타인을 밀어내기보다 가능한 한 조화를 이루는 일. 이제 아이에게 시작될 학창 시절을 떠올리자 그 부분까지 생각이 확장되었다. 

 그렇게 '의자 빼기 게임(椅子取り ゲーム)'을 끝으로 유치원 마지막 참관 수업을 마쳤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여러 차례 참관 수업을 경험했다. 참관 수업을 통해 책으로 배울 수 있는 이상의 현장 일본 문화를 경험했고, 단체에서의 아이의 모습을 보고,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나 역시 아이와 함께 성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참관 수업을 통해 각자의 타고난 모습과, 그러한 개인이 모인 공동체에 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우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아이가 스스로의 모습을 정확히 알고 그러한 자신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본다. 그 마음으로 주변과 조화를 이뤄나가기를 부디 나보다는 덜 뾰족하기를 바라본다. 나는 스스로의 모습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친해지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는 조금이나마 시행착오를 적게 겪기를 바라본다. 아이의 타고난 기질을 존중하며 그렇게 이끌어 가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동행이리라.

초등학교 참관 수업에는 더욱 자라 있을 우리를 그려본다. 

덧. 이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 참관 수업만에 관한 내용만 빠르게 쓰였고, 글 쓰는 중간도,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도 여러 번 막힌 뒤에 마침내 이 글을 맺고 조금 후련했다. 

"못 써도 쓰려고 노력하는 동안 나를 붙들고 늘어진 시간은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중략) 이 세상에 어떤 글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우리 어서 쓰자고"(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중)

 이 글을 쓰며 조금 실감했다. 나를 붙들고 늘어진 시간은 정말 글을 쓰고 있었던 시간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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