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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Nov 09. 2024

요즘에 관하여

 요즘 재발견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일본어'이다. 일본어는 여성에 특화된 언어라고 생각했다. 나긋나긋 조곤조곤 속삭이는 그녀들은 내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혹시 언어는 행동을 규정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겪어본 일본 여자들은 소위 '여장부'하면 떠올릴만한 여자들은 드물었다. 세심하고 상황 파악이 빠르고 고도의 촉을 갖춘 그들은 매력적이지만, 함께하는 시간 동안 왠지 긴장을 늦추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은 있었다. 

 요즘에는 여자들에게 특화된 매력을 지녔다고 생각한 그 일본어의 다른 매력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은 남자의 일본어이다. 일터에서 마주하는 남자들을 보며 느낀다. 여자의 일본어와 남자의 일본어는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여자의 일본어가 나긋나긋 조곤조곤 본인이 가진 매력을 어필하는 언어라면, 남자의 일본어는 언어를 통해 '난 남자야'라는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는 언어라고 여겨진다. 어휘 선택, 사용하는 단어, 본인을 지칭하는 표현, 말투까지 극명하게 다르다. 한국어는 남녀의 언어가 부분적으로 다를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고 목소리나 말투 등으로 차이가 드러난다면, 일본어는 본질적으로 남녀의 언어 자체가 다르다고 느껴진다. 역시 타 문화의 언어를 관찰하는 묘미는 이런 곳에 있는 것 같다. 

 남녀 간 두드러진 언어 차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전통적'이라고 표현할 만한 성 역할도 아직 많이 규정되어 있는 느낌이다. 보수성이 짙고, 특히 나이 드신 분들에게서 그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남자의 영역과 여자의 영역의 명확한 구분. 어쩌면 그래서 이곳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무언가 크게 달라진 느낌이 안 드는지도 모르겠다. 왠지 지금 사는 이 도시의 몇십 년 전의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실제 일본 사람들의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이 어떠한 형태로 흐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이 든 여자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시프트제(shift, 근무시간이 고정되지 않고, 일정 기간마다 변경되는 근무제)로 나이 많으신 분들과 근무시간이 겹치는 날도 있는데 하루는 나에게 물어보셨다. "남편 담배 피워?" 아니요. "남편 술 마셔?" 아니요. 그러자 돌아오는 답변. "성실하네." 엥? ㅋㅋㅋㅋㅋ  혹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시는 건가...  아무튼 우리나라와 비슷한 듯 다른 부분이 많은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종종 생각을 붙잡는 부분들이 눈에 띄고, 그런 부분들을 포착하는 일은 퍽 흥미롭다. 

 그리고 일본에서 지내며 느끼는 사실은 이곳은 나와 케미가 잘 맞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 나는  종종 안전함을 느낀다. 어쩌면 그 안전함은 외롭지만 자유로운 이방인의 익명성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나의 내면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헤집는 사람이나 상황은 드물기에, 외부적인 요소로부터 오는 파도는 적겠구나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안전함. 물론 마음속 파도는 피해 갈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타인에게 예의를 지키되 좀처럼 스스로가 정한 선을 넘지 않는 이들의 성향에서 느껴지는 안전함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이곳과의 케미가 좋다고 느낀다. 어쩌면 그것은 이 나라와의 케미가 아닌 내가 있는 이 도시와의 케미일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불안정했던 오래전 도쿄에서의 삶을 떠올려 보면 이 도시와의 케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아주 조금은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거나..

 그래서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물 흐르듯 잔잔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이 도시의 시간 속에 머물다 보면 나는 이곳에서 나 자체로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나에게도 내가 나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래서 나는 나로 살아도 괜찮겠구나 싶은 마음이... 아니면 나는 의외로 나에게 잘 맞는 삶에서 머물고 있거나..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파도에 휩쓸려서 살아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곳에서는 마침내 글을 쓸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군대 이야기에 관한 글을 쓰며 그 시절의 기억들을 헤집으며 요즘 글을 쓰는 이유를 알았다. 언제나 저마다의 이유로 글을 쓰지만 요즘 나는 한편으로는 그리움 때문에 글을 쓴다. 그 시절의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 머물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어떤 일들은 지나갔고 끝맺은 일이라 해도, 기억은 그 형태로 고정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아니면 미처 몰랐던 숨겨진 시간들이 이제야 드러나거나, 그 시간을 해석하는 스스로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시절을 떠올리는 일은 나에게도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글을 쓰는 일은 퍽 즐거운 일임을 알아간다. 그 시간들을 혼자 기억하지 않고, 누군가 누구라도 좋으니 원하는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기 위해 글을 쓰고 싶어 졌고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요즘 계속 흘려보내고 있는 머릿속의 생각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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