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mellperfumes Oct 17. 2022

향수, 그리고 성별

장미에는 성별이 없다

들어가며


향수 매장에 들어가 본 사람이 있다면,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 같다. 

"요새 남성분들이 이런 향수를 많이 찾으세요." 

"저희 여성향수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는데요."

나는 이런 직원들이 다 차별적이고 구태의연한 마인드에 찌들어서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본사나 백화점에서 교육받을 때 이런 말을 하라고 배웠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문제적이라고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드는 점은 있다. 여자한테서는 특정 계열 향만, 남자한테서는 또 다른 특정 계열 향만 나야 하는 것인가? 대체 누가 그렇게 정했단 말인가?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늘 그래 왔던 것인가? 시대와 지역 상관 없이? 


시대와 지역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의 경우에도, 조선시대에 선비가 사는 집을 "난향지실", 즉 "난초 향이 나는 집"이라고 불렀다. 물론 정말로 난초의 향이 선비들이 있는 곳마다 풀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난초 향은 실제 난초의 향이 아니라 난초의 향을 고매한 인격 등에 비유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이런 단어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현재는 여성적인 향이라고 생각하는 난초의 향이 남성이 갖춰야 할 미덕을 비유함에 쓰였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꽃=여성적, 나무=남성적 도식에 끼워맞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는 현재 향과 성별의 도식에 맞지 않는 사례는 수없이 나온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군인들이 장미 화환으로 군기를 장식하기도 했으며,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늘그막에는 오렌지 블로섬 향을 선호했고, 현재에도 중동에서는 장미는 남성들이, 오우드는 여성들이 사용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더 구체적이며 현대적인 예시를 알고 싶은가? 겔랑의 미츠코 같은 경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좋아한 향수지만, 동시에 찰리 채플린이 좋아한 향수기도 하다. 겔랑의 지키는 처음에 남성들을 위해 나왔지만, 여성들도 즐겨 썼고, 겔랑의 아비 루즈 같은 경우도 여자들이 사용하기도 했다. 장 뒤프레의 발 아 베르사유는 굉장히 애니멀릭하고 앰버리하며 플로럴한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사용했고, 동시에 마이클 잭슨이 가장 좋아한 향수 중에 하나다. 샤넬 코코는 캐서린 제타존스, 귀네스 팰트로가 쓰는 향수기도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애용하는 향수기도 하다. 


물론 요새는, 특히 니치 브랜드 혹은 인디 브랜드에서, 성별을 상관하지 않고 향수를 내기도 한다. 사실 이 트렌드가 새로운 것은 절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겔랑 지키도 중성적인 느낌으로 많이 팔렸고, CK 원 같은 경우도 처음에 나왔을 때 유니섹스 마케팅을 펼쳤다. 아직도 성별로 나눠져서 향수 마케팅을 하는 경우가 많다. 멀리 갈 것 없이 아무 백화점이나 들어가면 맨 처음에 말했던 멘트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굳이 백화점이 아니라 올리브영 같은 편집샵을 가도 여성 향수와 남성 향수가 나눠져 있다. 그러나 이런 성별을 나눈 마케팅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보이고 있다. 예로, 세르주 루텐 사이트의 FAQ 부분에서는 예전에 이런 글이 있었다(임의로 내가 번역했다). 


향수에게 성별이 뭐냐고 물어보십시오. 참나무가 수컷인지 암컷인지, 아니면 장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시계는 시간을 확인하려고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크든 작든 몇 시인지 정확히 보여서 약속시간에 맞춰 가면 되는 겁니다! 남성을 위한 CD와 여성을 위한 CD가 따로 있습니까?! 이상하죠! 향수는 감각을 위한 제품이지 특정 성별을 위한 제품이 아닙니다. 


2017년에 프레데릭 말은 뉴욕타임즈와 인터뷰 중에 "유니섹스 트렌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임의로 내가 번역했다): 


향수 시장에 대해 생각해 보면, 굉장히 섹스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캘빈 클라인의) 옵세션을 생각해 보면, 하나는 여성용, 하나는 남성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광고에서는 "이걸 뿌리는 여성분, 모든 남자들이 당신을 쫓아다닐 겁니다." 라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광고에서는: "아, 무슈! 이걸 뿌리면 모든 여자들이 당신을 쫓아다닐 거에요." 라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둘은 거의 비슷한 향수였습니다! 실제로는, 뮤스크 라바줴의 경우, 굉장히 관능적이라 저는 섹시한 여성을 떠올렸는데, 남성들이,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그걸 사갔습니다. 또,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를 사는 고객들은, 40%가 남성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CK 원은, 혹은 우리 브랜드의 경우 코롱 비가라드는, 대략 "저는 깔끔하고 깨끗해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향수입니다. 이건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향수가 아닙니다. 그냥 자신을 말끔히 단장했고 하루종일 그런 느낌을 갖고 지내는 거죠. 이런 향수 역시 남성과 여성 모두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네, 더 많은 사람들이 성별 중립적인 향수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하지만, 사실은, 향수에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 뿐입니다. 이건 고루한 규범이에요. 우리는 현재 훨씬 더 성별에 대해 유동적인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읽고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나 역시 성별에 따라 다른 옷, 머리 스타일, 색깔, 향을 써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이런 성별에 대한 규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나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규범이 점점 더 다양하게 변주되거나 타파되고 있는 사회에서, 아닙니다, 당신은 남성이고 이것은 여성용 향수입니다/당신은 여성이고 이것은 남성용 향수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여러가지 문제를 떠올릴 수 있고, 똑같은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제일 중요한 문제는, 어디까지나 향수는 그것을 뿌리는 사람이 가장 많이 맡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면 뿌리는 것이 가장 좋다. 가장 오래 그 향을 맡으며 지내야 하는 사람은 나니까. 괜히 남들한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다가 전혀 취향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고통만 주는 향수를 뿌리는 것은 고역스러운 일이고, 오히려 향수에 대한 모든 관심과 호기심을 죽여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이 여러 취미에 대해 흥미를 잃는 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마음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별 같은 것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취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 절망스럽지 않은가. 


최근에 어떤 국내 인디 브랜드에서 "우리는 성의 구별이 없는 미래를 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해방을 원한다." 라고 적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향수 설명 글을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그러기에는 모든 향수의 광고 카피가 다 이성간의 상열지사나, 이성에게 자신을 과시하는 내용밖에 없었다. 남성적인, 여성적인, 이런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미소년, 사랑하는 그녀에게, 이런 단어가 들어간 글을 써 놓고 화자는 앞의 경우 여성, 뒤의 경우 남성을 상정해 놓았다. 그러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해방은 결국 이성에게 자신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의미의 것인가? 동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거나, 아무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고 그저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그냥 내가 남 상관하지 않고 설령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사회가 특정 성별이 행해야 한다는 규범과 맞지 않아도 해버리는 것이 훨씬 더 해방적이지 않는가. 성별 중립적인 것은 무엇인가. 거창한 말을 써 놓고 전혀 그것이 반영되지 않는 카피를 써 놓은 것을 본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이렇게까지 모순적인 글은 처음 봐서, 잠시 냉소하다 이렇게 성별 중립, 혹은 유니섹스 라는 말이 곡해되는구나 싶어 입 안이 썼다. 



끝맺으며


이 공간에서도, 인스타그램에서도 나는 대부분 여성용이라 불리는 향수를 리뷰하기 때문에, 나를 여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내 성별과 상관 없이, 빈티지 향수 대부분이 여성을 타게팅하여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어떤 이유로든 내 성별이나 모습 등 내 신상이 추정될 만한 내용을 단 하나라도 공개하고 싶지 않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리뷰를 이해가 쉽게 가게 잘 써서, 내가 잘 몰랐던 향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서, 이런 것 때문에 나를 팔로우했으면 좋겠고, 이것은 설령 내가 사람이 아니라 통 속의 뇌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어떤 특성을 가진 누군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향수를 뿌릴 당신도 마찬가지다. 향수는 향이 중요하지, 당신의 아랫도리에 뭐가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그 향을 어떤 이유로든 간에 골랐고, 그것에 만족하면 된 것이다. 성별 따위로 당신의 취미를 얽어매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당신의 성별보다 더 많은 다양한 점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말 케케묵은 느낌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