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mellperfumes Dec 29. 2022

시간의 문제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들어가며


모든 취미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취미란 무엇인가? 내가 기쁘기 위해서 하는 어떤 일련의 행동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경험해보는 시간이 없으면 취미를 기를 수가 없다. 특정 무언가를 내가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무언가에 나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예로 테니스같은 동적인 행동 같은 경우에는, 실제 잘 치든 못 치든 테니스를 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테니스 경기를 관람하고 규칙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겠다.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시간이 투자된다. 예로 미술작품 관람이라고 치자. 내가 어떤 재료를 써서 무슨 표현을 하는 작품을 좋아하는지, 인터넷으로 그런 류의 작품을 찾아보고, 그런 작품이 어디에 전시가 있는지, 무슨 작가를 더욱 선호하는지, 이 모든 것이 시간이다. 시간을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고 그저 취미가 주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향수는 대표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취미다. 이건 그저, 무슨 브랜드가 좋고 뭐가 어떻고의 문제가 아니다. 향을 즐기려면 필연적으로 향이 점점 몸이나 시향지에서 증발하여 향을 풍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 때문에, 몇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단 시간 부족 뿐만이 아니라도 범람하는 향수의 양과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내 취향을 찾고 연마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현재 사회에서 행동하는 방식 역시 어느 정도의 장애물로 존재하고 있으며, 디자이너 브랜드 뿐만 아니라 니치, 인디 등 여러 브랜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


내가 문제시 하는 것은, 향에 대한 탐색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향이 주는 아름다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즐길 시간의 절대량 자체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한국인들이 성질이 급하고 냄비근성이어서가 아니다. 한국은 OECD 전체로 봤을 때 아주 긴 노동시간을 가지고 있어서 애초에 여유있는 삶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처음의 밝은 느낌에서부터 서서히 변하는 미들, 그리고 아예 다른 향수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잔향의 아름다움을 느끼기가 어렵다. 물론 일을 하다가 중간중간 손목에 코를 들이대고 즐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과 여유롭게 시간을 쓰며, 향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변하고 있고, 이 노트가 점점 더 강해진다던지, 혹은 이런 면모가 있다던지, 어떻게 표현했다던지 기록하고 음미하는 것은 아주 다른 감상 방식이다.


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향수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처음에는 싫었는데 계속 맡으니까 좋았어요." 이게 특정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일일까? 나의 경우에는 알데하이드를 싫어했다. 내게 알데하이드는 너무 쎄하게 느껴졌고, 너무 날카로웠으며, 정제되지 않은 얼음 송곳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알데하이드, 특히 고전적 알데하이드가 표현하는 미적 쾌감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가 싫어하는 줄 알았던 향을 좋아하게 되는 순간은 비슷한 계열의 다른 향수들을 많이 맡아보거나, 아니면 좀 잊고 있다가 다시 맡아보고, 다시 맡아보고 해야 온다. 이것 역시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싫었던 것이라도 다시 시도해볼 시간과, 그것을 다시 음미해볼 시간 말이다. 정말 내가 어떤 향조가 싫어도, 그 향조 자체가 싫은 것인지 아니면 특정 형태로 해석한 이 향조가 싫은 건지 생각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시간을 써 가면서 천천히 자신의 취미에 대해 생각해 볼 여력이 없다. 긴 한국의 노동시간을 차치하더라도, 한국인들 전반적으로 "휴식"시간을 가질 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거나, 바로바로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면서 쉬는 경우가 잘 없는 것 같다. "불멍" "물멍"이라고 해서 불이나 물을 보면서 멍 때리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로 나올 만큼, 우리는 "휴식"시간을 가질 때도 자기관리 해야 하니까 헬스장을 가고, 외국어를 공부하고, 소비를 하고, 게임을 한다. 느리게, 여유있게 뭔가 하는 것이 정말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긴 노동시간은 또 다른 영향을 끼치는데,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에 상관 없이, 집에서 주로 일하는 직종이 아닌 이상, 향수를 뿌리는 것이 꺼려질 수도 있다. 예로, 생산직 같은 경우 육체노동을 하다 보면 땀이 많이 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때 향수를 뿌렸다면 체취에 묻히거나, 더욱 나쁜 경우엔 체취와 이상하게 섞이면서 역겨운 냄새를 풍길 수 있다. 주변 사람들도 괴롭지만, 사실 그 향을 계속 맡아야 하는 사람은 본인이므로 본인 스스로가 제일 힘들 것이며, 어쩌면 그 기억 때문에 해당 향수를 다시는 좋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사무직인 경우 강렬한 향수를 뿌리기 어렵고, 소위 말하는 "오피스 프렌들리"한 향수, "웨어러블"한 향수를 주로 뿌리게 되는데, 이 이유는 사무실이나 엘리베이터 등에서 자신의 향수 냄새로 채운다면, 다른 사람들의 질타를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좀 나이 드신 분들 같은 경우에는 강한 향수 냄새를 "일탈" "문란함" 등으로 생각하여, 회사 내 자신의 평가가 떨어진다는 말도 다른 분한테서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 향수는 화장품으로 분류되어 "유통기한"을 달고 나온다. 향수는 기본적으로 알콜과 향료다. 딱히 유통기한이 없다. 제대로만 보관하면 변향이 오지 않는다. 내 1940~50년대 샤넬 No.5는 지금 나오는 샤넬 No.5보다 좋기까지 하다. 향수의 전통을 가진 서양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유통기한"이라는 개념 때문에 한국의 소비자는 서양의 생산자가 2년 전에 만들었지만 철저한 보관으로 인해 전혀 변향이 오지 않은 향수를 받아도 상했다거나 떨이를 받는다고 느끼는데, 그건 둘째치더라도, 2년 안에 향수를 다 소비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이러면 여러가지 다양한 향을 여유롭게 즐기기보다는 소수를 정해진 시간 내에 다 써야하는 경주같이 되어버린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특별한" 혹은 "오랜 시간이 걸려서 천천히 음미하는" 향보다는 다소 단조롭고, 자기주장이 강하기보다는 은은하고 가벼운 향을 주로 선호하는 것 같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특별한" 혹은 "오랜 시간이 걸려서 천천히 음미하는" 향보다는 다소 단조롭고, 자기주장이 강하기보다는 은은하고 가벼운 향을 주로 선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다른 이유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바로 선택의 역설이다.


도넛 맛 3개 중 하나 고르기 vs 3000개 중 하나 고르기 


선택의 역설이란 간단하게 설명하면, 행동경제학에서 선택의 폭이 너무 넓을 경우, 사람들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로, 딸기맛, 초콜릿맛, 바닐라맛, 이렇게 도넛 3가지가 있고 그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빠르게 결론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도넛 맛이 3000개라면 어떨까? 이게 대체 정확히 무슨 맛인지, 옆에 있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기 어렵다. 어떤 맛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니, 내가 하나를 골랐을 때 어쩌면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다른 맛을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어떻게 해도 종류가 3가지였을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이 현상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향수 시장에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다. 먼저, 향수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향이 들어간 제품-핸드크림부터 시작해서 옷에 뿌리는 페브릭 퍼퓸, 헤어스프레이, 방향제, 샴푸, 바디워시 등등-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굳이 향수를 뿌릴 필요 없이도 여러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그걸 무시하고 향수를 골랐다고 치자. 한 해에 몇 개의 신생 브랜드, 몇 개의 새로운 라인이 만들어지는지를 무시하더라도, 한 해에 시장에 나오는 향수 자체가 너무 많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조향사 중 한 명인 에드몽 루드니츠카는 프래그런티카에 의하면 평생 20개의 향수를 조향했다. 샤넬 No.5를 조향한 에른스트 보는 18개를 조향했고, 겔랑 가문의 천재 중 한 명인 자크 겔랑은 39개를 조향했다. 장 카를의 경우 10개다. 현재까지 활동하는 조향사 중 유명한 몇몇을 보자. 도미니크 로피옹 같은 경우 308개가 있다. 베르트랑 두쇼프는 264개, 장 클로드 엘레나는 133개, 소피아 그로스만은 72개, 자크 폴쥬는 74개, 알베르토 모리야스는 452개, 칼리스 베커는 121개다. 조향사 수 역시 20세기 초반보다 훨씬 많고, 전통적인 조향 수업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많은 수고, 브랜드들도 한 향수를 만든 후 몇 년씩 걸린 다음 새로운 향수를 런칭하는 게 아니라 라인을 여러가지로 다양화한 다음에 이 라인에서 몇 개, 저 라인에서 몇 개 런칭하는 경우도 있다. 각종 한정판, 무슨 기념판 까지 고려하면 향은 같아도 향수병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소비자는 "다른 제품이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고르기는 아주 어렵고 거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요새 유행하는 브랜드/향조가 무엇인지를 계속 우리 얼굴에 들이밀며 비비는 압박, 우리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부추기는 SNS와 향수 커뮤니티의 압박과 여러가지를 다 고려한다면 우리는 결국 스스로 시향이나 착향을 하고 결론을 내리기보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추천하거나, 커뮤니티에서 좋다고 추앙하는 것을 시도해보거나, 아니면 "유명하니까", "어디서 들어봤으니까" 시도해보게 된다.


이 모든 행동을 한다고 해서 멍청하거나, 팔랑귀라거나, 타인에게 너무 의존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향사 아무나를 데려다 놓고 앞에 비슷비슷한 오렌지 블로섬 향수를 아무 라벨 없이 동일한 플라스틱 병 100개에 넣어 갖다 놓은 다음에 제일 좋은 거 하나를 3분 안에 고르라고 하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일반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특이하기보다는 무난하고, 호불호가 갈리기보다는 대중적인 향을 고르게 된다. 만약 여기 두 향수가 있다고 치자. 하나는 10명이 7점을 주었다. 다른 하나는 6명이 10점을 주었지만, 나머지 4명이 1점을 주었다. 그러면 평균값은 전자가 더 높이 나온다. 또한, 개인적 경험이긴 한데 사람들은 마구 찬미하는 반응 보다는 불호를 표시하는 반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좀 더 대중적인 향수가 선호된다. 그런데, 우리가 "대중적"이라고 생각하는 향들이 계속 유행하게 된다면, 이것은 향수 표현 방식의 다양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특이하기보다는 무난하고, 호불호가 갈리기보다는 대중적인 향을 고르게 된다. 만약 여기 두 향수가 있다고 치자. 하나는 10명이 7점을 주었다. 다른 하나는 6명이 10점을 주었지만, 나머지 4명이 1점을 주었다. 그러면 평균값은 전자가 더 높이 나온다. 또한, 개인적 경험이긴 한데 사람들은 마구 찬미하는 반응 보다는 불호를 표시하는 반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좀 더 대중적인 향수가 선호된다. 그런데, 우리가 "대중적"이라고 생각하는 향들이 계속 유행하게 된다면, 이것은 향수 표현 방식의 다양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즉각적인 반응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하면 그에 대한 거의 즉각적 피드백이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예로,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노트북이 30초 동안 작동을 중단하다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굉장히 짜증이 날 것이다. 아무 시간이 아니라, 정확히 30초가 걸린다는 것을 알아도 짜증날 것이다. 내 인생에서 30초가 날아갔다고 그렇게 큰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30초 동안 다른 것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화장실을 들리던지, 생각을 정돈한다던지 등의 행동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분노에 길길이 휩싸여서 아마 다 사그라들때까지 적어도 30분이 걸릴 것이다.


택배나 배달 같은 경우 역시 조금만 늦어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현대인이다. '왜 늦지? 오늘 안에 받아야 하는데(정말 그 정도로 급한 것인가?), 오늘 몇시까지 오기로 했는데.' 이런 생각이 우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혹자는 이것은 내가 돈이라는 재화를 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이 오가지 않는 영역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 바로 오는 피드백을 원한다. 가까운 관계에서의 연락 문제에서도 마찬가지고, 심지어는 인권문제에서도 이런 빠른 반응을 바란다. 소수자에 대해 인권침해 사례나 어떤 비극이 벌어졌을 때, 나는 인터넷에서 무슨 단체는 이것에 대해 뭘 하고 있냐? 라는 반응을 많이 봤다. 여성 단체, 성소수자 단체, 장애인 단체, 노동자 권익 단체, 이주민 단체 등 거의 모든 소수자 이슈에 대해, 평소 그런 권리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런 가치를 공유한다는 사람 마저도 "왜 OO단체는 지금까지 성명서를 내지 않았습니까?" 라는 말을 한다. 대부분의 이런 단체는 굉장히 소규모며, 기부금에 의지해 운영되고 있고, 전업으로 해당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적고, 기업이었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퇴근했을 저녁이나 새벽 늦게 일어나도, 바로 뭐라도 하라고 보챈다. 성명서의 경우에는 당연히 해당 단체의 구성원들이 무슨 내용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토의가 필요한데도 그런 즉각적 반응을 원한다.


하물며 내가 돈을 내는 소비 행위에서는 어떻겠는가. 예로 카페에서 알바생이 음료가 밀린다고 했고, 알바생들이 힘들게 음료를 만드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일부 사람들은 음료가 늦으면 짜증을 낸다. 그깟 몇천원 내면서 그 알바생의 자존심까지 짓밟을 권리가 어디서 생겨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다. 창작매체 역시 마찬가지다. 리 모두는 사람들에게, 단체에게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바로 딱딱 반응이 오기를 바란다. 말 못하는 상품에는 어떻겠는가? 마찬가지다.


이게 향수에 가면 어떻게 되냐면, 사람들이 시향지를 맡고, 착향을 하고, 좀 시간을 두어 이 향수가 어떻게 내 몸에서 변하는지 생각해보지 않고 바로 구매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진다. 그래서 맨날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과 사이트에 "샀는데 안 맞는다"라는 평과 함께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향수병이 매물로 나온다. 이건 사실 그나마 좀 나은 것이고 앞에서 말한 시간 부족, 그리고 너무 넓어진 선택지와 맞물려 "친구가 쓰는 게 좋아서 샀는데 안 맞는다", "연예인 누가 쓴다 해서 샀는데 안 맞는다" 이런 문구도 많으며, "선물받았는데 싫다"같은 경우도 많다. 즉 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선물한 사람의 경우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잘 알 기회가 없었고, 향수를 시향이나 착향을 해 볼 경험이 없거나 적었으며, 내가 정확히 뭐가 싫은지, 싫은건지 아니면 익숙하지 않아서여서인지 탐구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즉각적으로 좋다/싫다 밖에 판단을 내리는 것이 익숙하고 사실 그렇게밖에 빨리빨리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꾸물거린다는, "선택장애"있냐는 말을 듣는 사회에서 살아왔으니까. 그러니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패턴이고, 이런 선택을 내린 사람들은 악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즉각적인 반응이 오는 것이 일상적으로 된 사회에서는 향수의 표현 방식이 조금 달라지게 된다.


먼저, 강렬하고 화려하고 예쁜 첫 인상을 가져야 한다. 베이스 노트는 나쁜 의미로 굉장히 대중적이고 몰개성해도 상관 없다. 어차피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경험하고 사람도 많이 없고,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통 분모가 있다는 것이니까 오히려 나중에 가서 사람들이 싫어할 요인이 줄어든다. 노트와 미들의 일부에서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  


또, 지속력이 아주 짧아도 큰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좋다. 탑 노트가 큰 임팩트를 줬으니,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경험하려 뿌리고 또 뿌리게 된다. 지속력이 짧으니 그만큼 더 많이, 더 자주 뿌리게 되어, 오히려 그 향수가 더 많이 팔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향수가 단조로워도 괜찮다. 사실 전통적으로 향수는 뒤로 갈수록 계속 다양한 모습들이 반짝이며 나오고, 다채로운 변화가 있거나, 아니면 서로 대조되는 매력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큰 임팩트를 준 탑 노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유지되기를 원한다. 그러면 더욱 단순하고 간단한 느낌의 향수를 만들 수 있다.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누군가의 불호 요소를 위에서 말했듯이 건드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기에다 지속력이 짧게 만들면 사람들이 그 향에 흥미를 잃거나 지루해하기 전에 향이 사라지므로 더욱 금상첨화다.


이 세가지 모두 현재 진행되고 있는 향수 표현 방식의 변화다.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특히 니치 향수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 나는 잘 모르겠다.


디자이너 vs 니치 vs 인디 특별함


디자이너 향수, 니치 향수, 인디 향수에 대한 정의는 사실 내리기 굉장히 어렵다. 상당 부분 자의적이고, 딱딱 나눠지지 않고 애매한 브랜드들이 많고, 무슨 학계 내 전문용어처럼 향수 브랜드 분류체계에 대한 권위있는 단체같은 것 역시 없다. 내가 여기에서 정의를 어떻게 적든지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조소를 불러올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디자이너 향수는 일반적으로 패션이나 시계, 쥬얼리 등 향과 관련 없는 제품을 파는 브랜드에서 만든 향수를 이렇게 칭한다. 넬, 디올, 에르메스, 입생로랑 등이 대표적이다. 니치 향수는 향수 혹은 향 제품만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브랜드에서 나온 향수다. 에디션 드 프레데릭 말, 딥티크, 라티잔 파퓨머, 구딸 파리, 세르주 루텐 등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인디는 소규모 창업자들이 패션 하우스나 향수 회사에 속하지 않고 사적으로 소유한 브랜드에서 나오는 향수다.


이렇게 보면 명확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정의에 따르면, 톰 포드는 많은 사람들이 니치 브랜드라고 생각하지만 톰 포드 역시 옷이나 선글라스 등 향과 관련 없는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디자이너 브랜드다. 겔랑 같은 경우 많은 사람들이 디자이너 브랜드, 혹은 대중적인 브랜드라고 생각하겠지만 향 제품 빼고는 화장품, 스파 서비스 등이 다이기 때문에 니치와 디자이너 사이 어딘가에 속해 있다. 에스티 로더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위에서 말한 정의는 자의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디자이너는 조금 더 대중적인 취향의 향을 내놓고, 니치는 조금 더 예술적인 목적을 추구하며, 인디는 마니악한 향을 내놓는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이 역시 현실과 잘 안 맞아들어간다. 디자이너 브랜드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프리미엄 라인을 만들어 "니치같은" 느낌을 주고 있고, 니치 브랜드에서도 늘 실험적이거나 예술적인 향만 나오진 않으며, 인디 브랜드에서도 굉장히 대중적인 향 역시 많다. 또, 원래는 니치적인 감수성이었던 향수 표현방법, 혹은 향수 조합이 크게 히트를 치면, 여러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그것을 따라하기도 한다. 예로, 에디션 드 프레데릭 말의 장미와 패츌리 조합 향수인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가 대박을 터트리자, 여러 하우스에서 앞다투어 장미와 패츌리 조합 향수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 장미+패츌리 조합은 대중적인가 아닌가?


또 다른 경우에는 디자이너는 흔히 볼 수 있거나 들어본 브랜드, 니치는 디자이너가 아닌 것, 인디는 더욱 소규모의 사람들만 아는 것이라고 뭉뚱그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니치 향수가 어느 정도 유명해지면 디자이너 향수로 변하는 것인가? 어느 정도 규모의 사람들이 알아야 인디 향수가 니치 향수로 진화하는가? 역시 쉽지 않다.


여기에 요새 아티잔 브랜드, 즉 조향한 사람이 해당 브랜드를 소유하거나 공동소유하고 모든 향수의 포뮬러를 직접 썼으며 이에 대한 법적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브랜드, 라는 분류까지 나오고 있다. 어떤 경우 아티잔 브랜드란 더욱 고급스럽고 예술적이며 장인정신이 있는 브랜드라고 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비스포크 등 여러가지 다양한 분류들이 있는데, 일단 주로 쓰이는 것은 디자이너, 니치, 인디인 것 같다.


게다가 현재는 "니치", "인디"라는 말도 너무 과도하게 쓰이고 있다. 사람들은 "니치 브랜드"라고 하면, 좋은 재료를 쓰고, 좀 더 고차원적인 표현 방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돈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재료를 쓰기도 하고, 오히려 더 뛰어난 표현력을 가지기도 하며, 무엇보다 니치 브랜드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라고 해서 디자이너 브랜드 향수를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니치 브랜드 향수를 만드는 사람은 조향사고, 디자이너 브랜드 향수를 만드는 사람들은 익명의 화학실에서 로봇같이 일하는 화학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인디" 역시 마찬가지여서, 조금 아마추어적이고 원료가 저가여도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솔직히 말해서 인디 브랜드 같은 경우 원료도 별로고, 완성도도 떨어지고, 제대로 된 자격증이 없어 꼼수로 판매중인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브랜드 컨셉 자체도 속되게 말해서 "이건 좀 에바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다.


니치 브랜드는 비싸고, 디자이너는 좀 더 대중적이니까 싸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럴 때마다 좀 웃긴데, 같은 브랜드에서도 좀 더 싼 향수가 있고 비싼 향수가 있다는 것은 둘째 쳐도, 디자이너 향수 같은 경우에도 비싼 것들은 굉장히 비싸다. 샤넬 No.5의 엑스트레 보틀 같은 경우 15ml에 32만원이다. 좀 더 고가 라인인 레 젝스클루시프 라인이 아니라 그냥 샤넬 No.5인데도 그렇다. 이것은 샤넬 No.5 오 드 퍼퓸이나 오 드 뚜왈렛과 달리 엑스트레는 더 높은 부향률을 떠나서 정말 천연 그라스의 자스민과 장미가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고, 무엇보다 엑스트레는 이 향수가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조향사가 의도한 예술적 목표와 가장 알맞는 표현방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원본의 형태를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디자이너, 니치, 인디를 정의하든 상관없이, 모든 향수는 상품이다. 예술품이면서 동시에 상품이고 그것도 전세계에 단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여러개가 존재한다. 이런 면에서 음식과 비슷한데, 아무튼 이런 특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팔려야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향이 신선한 실험적 시도여도 팔리지 않으면 단종되며, 아무리 향이 예술적으로 뛰어나도 이윤이 남지 않으면 재조합되거나 단종된다. 실제 사례도 있다. 때문에 아무리 "니치적인" 혹은 "인디의" 감수성과 브랜드 목표가 있더라도, 어느 정도는 대중적인 감수성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점 때문에, 당신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뭐라고 분류하든지에 상관 없이, 우리의 생활 방식과 사회화된 행동 패턴과 향수 시간이 굴러가는 방향성 때문에, 특정 표현방식이 유행할 가능성이 높다.


프레데릭 말은 아래 영상 1:24부터 이렇게 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_1t0BvNYJ5A&ab_channel=EditionsdeParfumsFr%C3%A9d%C3%A9ricMalle


"1990년대 후반부터, 향수는 중요성을 잃은 듯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향조를 썼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천편일률적인 향수를 만들었습니다; 셀프 서비스 향수 샵에서 클리넥스처럼 고르기 쉬운 향수들 말이죠. 이미지에 주로 중점이 있었습니다: 모델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아름다운 향수병을 디자인하고, 소위 향수라 불리는 제품을 런칭할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 말입니다. 향수의 향 그 자체는 제일 마지막으로 고려되는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향수라는 예술이 곧 사라질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조향사들이 늘 마케팅쪽 사람들이 똑같은 제품을 만들게끔 요구한다고 불평하곤 했어요. 제게 그건 마치 포뮬러 1 카레이서들에게 택시 운전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향수를 사용하던 사람들-일부러 과거형을 썼습니다-이 다른 사람들과, 혹은 자신들의 할머니들과 비슷한 향이 나고 싶지 않아하는 것을 봤어요. 실제로 향수 업계가 향을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향수 자체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향수의 중요성을 다시 높이고 싶었습니다."


이게 1990년대 후반~2000년대의 문제라면, 지금은 비슷한 영향을 끼치는 다른 문제가 산재중이다. 프레데릭 말은 위 영상에서 저 말을 한 다음, 그렇기 때문에 향수 병이 아니라 향이 초점이 되게끔 향수 병은 심플하게 디자인하고, 광고 마케팅을 하지 않고, 런칭 이벤트를 기획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에디션 드 프레데릭 말 브랜드에서 이 세 가지 원칙에 부합하는 것은 향수 병의 심플함 뿐이다. 이 브랜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니치 브랜드가 이런 식이다. 한국에서는 인플루언서들에게 향을 홍보해 달라고 하며, 이것은 따로 마케팅비를 책정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소위 "어떤 연예인이 썼대"라는 말을 퍼트린다. 이렇게 사람을 모델로 쓰지 않을 경우, 브랜드 이미지-친환경적, 세련됨, 발칙함, 힙함,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 향을 '제대로' 알고 너희 대중은 모른다는 스노비즘-을 소비하게끔 한다. 런칭 이벤트는 팝업 스토어, 체험단 등으로 바뀌었다. 심플한 향수병 역시 원래 의도는 장식적이고 화려한 요소를 줄여 향이 초점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 심플함 역시 하나의 미적 요소로 변화하여 누가누가 더 단순하지만 세련된 향수병을, 혹은 단순한 형태지만 갖가지 고급 재료로 포장했는지를, 그것도 아니면 라벨에 예쁜 도안을, 마지막으로 그것마저 아니라면 친근하고 아마추어적이며 접근성이 높아보이는 느낌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경쟁이 되어 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향조를 썼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천편일률적인 향수를 만들었다는 지적은 지금의 향수에도 유효하다. 너무 많고, 레드오션이기 때문에 트렌드에 올라타 어떻게든 돈을 만드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겹친다. 이쯤 되면 뭐가 그렇게 다르고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끝맺으며


좀 덜 냉소적으로 쓰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게 한국만의 문제인지는 사실 다 모르겠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내가 다른 글을 쓰면서 너무 화내고 냉소적이고 씁쓸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고 한 적이 있는데, 처음에 이 글을 쓸 때는 진지하게 한국에서 이런 면 때문에 소비자 개인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기 어렵고 스스로의 취향을 찾아보기보단 커뮤니티 등의 유행을 따라가기만 하는 슬픈 일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라고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까 거의 무슨 향수 업계 망해라, 니네들이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냐, 다들 똑같아! 라고 외치는 것 같은 괴물이 나와 버려서, 심성이 뒤틀렸나, 요새 스트레스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나 라는 생각마저 든다. 좀 더 마음을 곱게 먹어야 하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향수, 그리고 성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