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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레트 Dec 17. 2022

보라색 머리로 소개하기

가면(도덕성) 벗기

추신인데 먼저 쓰기

요즘 글이 잘 안 써져요.

함께 글 쓰는 모임이 아니었다면

지난주, 이번 주 글 발행은 못했을 것 같아요.

글을 써도 뒤죽박죽이고, 마음에 안 들고

이번 발행 글은 예전에 썼던 내용의 연장선인듯한 이야기도 있네요.

정리가 안되지만, 그래도 '발행'버튼을 누르기에 기록에 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곧, 더 괜찮은 글, 읽고 싶은 글 써볼게요:)




심리검사 결과를 본 상담가는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점수가 높아야 정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 정상범위인데, 도덕성이 높아서 염려된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높은 도덕성이 치료에 방해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내가 가진 도덕성이 뭘까. 어릴 때는 딱히 착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기적이고 불여우 같은 면이 충분했고 욕심도 많아서 내 것을 스스로 잘 가졌다. 집안 사정이 꽤 힘들어지고, 종교를 갖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선한 일을 찾았다. 나로 인해 상처받았을 사람을 생각하며 울었다. 너무나도 많은 행동이 ‘죄’가 되었기에, 생각조차 스스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거룩한 모양을 쫓아 연구했다. 처음에는 모두 가면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새 표정이 가면과 닮아 있었다. 어쩌면 종교 수행의 결과로 진짜 도덕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정직한, 모범적인, 양심적인, 나아가 양보하는,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치료에 방해되는 도덕성’을 찾기 위해 상담을 되짚어본다.


“O님 직업상 남에게 보이잖아요. 존경도 받고, 도덕적으로도 꽤 높아야 하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기 힘들어요.” 내가 가진 도덕성은 남에게 비치는 모습에 기인하는지, 그저 직업에서 오는 사명감인지, 정상적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성인지를 고민한다. 내가 가진 도덕성도 결국엔 가면의 일부였을까 아니면 일말의 양심이었나.


도덕성만으로 솔직함을 가리고 있다고 주장하기엔 원래 눈치 보기가 발달해 솔직한 면이 별로 없다. 솔직함은 한 편의 글을 더 쓸 수 있을 만큼 꽤 복잡한 이야기다. 도덕성이 방해하고 있는 솔직한 감정을 살펴보니 분노가 단연 1등이다.


“내가 다 화가 나네. 화 안 나요? 이상하네.”      


상담사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대신 분노를 표현하던 상담사가 부담스러워 3회기를 채우고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내가 가졌던 도덕성으로는 가해자를 욕할 수 없었다. 80대가 넘은 노인이기 때문에, 그가 술을 마시거나 사고 후 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괴로워하겠지.’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일을 스스로 허락하기 힘들었다. 친구들이 “너는 욕부터 해.”라고 말할 정도로, 쌓인 분노를 풀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이렇게 힘든데, 정말 멀쩡하게 살고 있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당하기 힘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똑같은 일을 당하게 하고 싶다. 이 괴로움을 알게 하고 싶다. 금방 죽어버리면 어쩌지. 오래 살면서 계속 고통을 느끼면 좋겠다. 평생 저주할 거야.’


그런데 내가 가해자에게 줄 수 있는 벌은 없었다. 그렇게 법이 정해놓은 기준 앞에 선과 악의 기준이 무너졌다.

‘실수라는 이름으로 무엇까지 포용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실수로 볼 수 있을까. 뭐가 악이고 뭐가 선일까. 신만이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다면 왜 악을 가만히 허용하는 걸까. 왜 나중이 되어야 심판한다는 거지? 나는 왜 내가 정한 선을 지키려고 그토록 애써왔지? 내가 살아온 삶이 헛되지는 않았나?’


결론은 생각보다 허무하기에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다. 진짜 도덕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사색, 가치관 성립을 위한 고찰, 그리고 분노의 다른 표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결과 도덕성이라는 그릇을 깨트리고 싶었다. 범법행위라도 해야 하나. 간이 콩알만 해서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면 밤새며 되감기를 할 사람이다. 지금도 모든 일 앞에 “법이 어떻게 되지?”를 먼저 생각하고, 이익보다는 정직이 먼저다. 속에서는 남들 하듯 하라고 아우성치는데, 괴로워하면서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도덕성을 선택한다.     


그릇을 깨트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렇다면 도덕성을 포함한 가면이라도 벗을 수 있을까. 가면과 닮아 있는 얼굴이 아닌 원래 내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나를 찾으면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을까. 솔직해지면 이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직업적 도덕성 때문에 해보지 못한 일을 해 보자. 하고 싶으면 뭐든 하자.’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미용실을 찾아가 “에쉬-바이올렛색으로 해주세요.”라고 당당히 말했다. 탈색은 5시간 동안 굉장히 따가운 고통을 참으면서 예뻐질 때까지 견뎌야 하는 일이다. 아침도 먹지 않고 시작해 배가 고프고, 허리도 아프고, 심심함이 도가 넘을 때쯤 끝났다. 결과물은 꽤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는데, 외모를 꾸미면서 그렇게 비싼 가격을 쓰기는 처음이다. “여보 기분 좋아지는 일이면 해.”라는 남편의 멋진 말에 ‘에라 모르겠다.’ 하며 결제했다. 돈은 쓰는 맛이 있다고, 이틀간 기분이 꽤 좋았다.


우연히 글쓰기 첫 모임에 나갔는데, 집에 돌아와 나를 소개하며 “보라색 머리입니다.”라고 어필했다. 모두 ‘아, 보라색 머리 기억나요.’라고 답했다. ‘튀어 보이긴 싫지만... (알고 보면 즐기나?) 나를 나타내고 남이 기억하기에 좋네. 역시, 보라색 머리로 하길 잘했다.’ 싶었다. 생애 처음 해 본 일이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앞으로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하면서 나를 찾아가고 싶은 설렘까지 느꼈다.


그런데 이틀 후 처음 머리를 감고, 거울을 보니 색이 얼룩덜룩하다. ‘잉? 머리가 왜 이렇지?’ 염색 스프레이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딱 한 번 머리를 감은 뒤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한 부분은 노랗고, 한 부분은 여전히 보라색이다.

‘그렇게 비싼 돈을 냈는데... 이틀짜리 행복이라고?’


(굉장히 정상적으로) 화가 났다. ‘생애 처음 탈색도 했는데, 컴플레인이라고 못할까. 안 해본 일 해보기로 했잖아. 말해보자.’하는 용기가 생겼다. “바쁘신데 죄송한데요. 한 번 감았는데, 머리가 이렇게 되었어요. 굉장히 비싼 돈이잖아요, 한 번에 이렇게 되는 건 너무한 거 같아요.” 그동안 가면과 어울리지 않아서 하지 못했던 ‘불만을 표현하는 일(컴플레인)’의 첫 모습은 가면을 닮아 있었다. 최대한 정중하고 조용하게, 예의 바르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말한 덕분에 ‘색깔이 빠지는 게 싫다면 쨍쨍한 색으로 해야 한다.’라는 답을 듣고 무료로 한 번 더 염색하게 되었다. 결과는 아이가 즐겨보는 만화 티니핑에 나오는 방글핑(보라색 캐릭터)이 되어서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안 하던 일은 안 해야 하나.’ 하는 팔랑귀 같은 결론에 이르려다가, ‘머리 하나로 사람 기분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할 수 있구나.’ 하는 결론만 내었다.      


쨍쨍한 보라색은 머리를 감을수록 에쉬 바이올렛 같은 예쁜 색이 되어 한동안 ‘나’를 나타내 주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또 다른 가면이 되었지만, 전의 가면보다는 가벼웠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면이 아닌 나를 위한 가면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탈색 머리의 수명은 너무나도 짧기에 이제 더 이상 ‘보라색 머리’라고 나를 소개할 수 없다. 한 번은 누군가 ‘탈색이 눈에 안 좋고, 몸에 안 좋고, 관리가 힘들고.’라는 나쁜 점을 내 앞에서 나열하기도 했다. 그래도 생애 한 번은 보라색 머리로 해보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안 해본 일에 도전하며 나를 찾아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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