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 여행 기록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은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그 반대지 않는가. 내가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은 시작이 창대했고 그 끝이 미약했다. 다행히도, 시작이 창대하고 끝이 미약한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초심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참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양력 설도 지났고 음력 설도 지난 시점에서 2022년을 돌아 보는 건 꽤 웃긴 일이지만, 내게 2022년은 정말 창대한 시작과 마주한 날들이었다. 너무 많은 변화가 불어닥치던 시간이었다. 1년 전의 나를 정말 나라고 부를 수 있을지 확신조차 할 수 없어, 테세우스의 배 같은 고전적 이야기나 종종 만지작거렸다. 내가 이렇게 많이 변해도 되는 걸까 싶었다.
여행은 하나의 마음가짐이 미약한 끝을 향해 갈 때면 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학생인 나에게 그 시간은 2월, 8월이다. 날씨가 따뜻해지거나 시원해지기 직전의 시간,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끝나버린 일들을 돌아보는 소회가 겹치는 시간. 그런 시간엔 문득 떠나고 싶어진다. 그리고 웃기게도 이런 시간의 발자취는 나를 꼭 바다로 향하게 만든다.
https://www.youtube.com/watch?v=rG69t0nVV88
기차에서 듣던 노래는 류이치 사카모토였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성, 이름' 순으로 이름을 적지만 영어권은 '이름, 성' 순으로 적기 때문에 류이치 사카모토라 적는 것이 더 익숙하지만, 실제 이름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맞다. 하지만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부르는 게 너무 입에 붙어 버려서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 그의 성과 이름의 순서를 바꿔 부르게 된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현재 시한부 인생인 상황이다.
2022년 6월 7일, 문예지 ‘신초’에 자신이 시한부 상태임을 밝혔다. 문예지에 류이치는 직장과 간 두 곳, 림프로 전이된 종양, 대장 30cm를 절제했다고 밝혔다. 암 판정 후, 치료하지 않으면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며, 수술은 예정 시간 8시간을 넘은 20시간에 달했다고 한다. 류이치는 “수술이 아닌 투약 방식으로 통원 치료를 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며 “남은 시간 속에서 음악을 자유롭게 하며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출처] https://namu.wiki/w/%EC%82%AC%EC%B9%B4%EB%AA%A8%ED%86%A0%20%EB%A5%98%EC%9D%B4%EC%B9%98#s-2.2
이런 그가 2023년 1월 17일에 신간 앨범 <12>를 냈다. 박자는 자유롭고 형식은 파괴되었으며 주제는 흐릿한 곡들의 연속이다. 무엇인가가 해체되어 나타나는 예술 작품을 보면 거장의 종말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해체는 이미 정립된 이후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예술가로서 쌓아 올린 것이 있어야, 그 후에 비로소 해체주의 예술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미 그 반열에 오른 예술가다. 집중하는 마음으로 앨범을 들었다.
1시간 1분 동안 앨범을 다 듣고 다음 곡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 'Merry Christmas Mr. Lawrence'였다. 가사 하나 없이도 이 노래만큼 겨울 냄새를 잔뜩 머금고 있는 노래가 또 있을까.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들을 때, 창밖은 아직 녹지 않은 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의 고장으로 들어가는 마음, 그 마음을 대변하는 풍경. 겨울 바다로 향하는 마음속 첫 풍경은 하양이었다.
풍경은 곧 바뀌어 바다가 됐다. "아 겨울바다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모두가 일제히 창밖으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일제히 셔터 소리를 냈다.
"바다구나, 바다야."
서울로부터 탈출해 바다로 향하는 자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낯선 곳에 오면 소소한 것이지만, 일상 속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을 찾게 된다.
가령 묵호역 앞 횡단보도는 하늘과 바다의 색을 닮아 있다던가,
등대로 향하는 곳에 있는 버스 정류장엔 의자가 하나 사라진 소파가 놓여 있다던가,
하는 사소한 풍경들 말이다.
감사하게도 동해 출신의 선배 한 분이 동해 맛집을 많이 알려주셔서 가벼운 마음으로 동해에 올 수 있었다.
나는 현지인의 맛집 추천을 굉장히 신뢰하는 편이다.
강원도로 겨울 바다를 보러 떠날 예정이라고 하니, 동해 맛집 여러 군데를 영업해주셔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녀왔다.
동해에서 처음 방문한 식당은 <부흥횟집>이었다.
12시 조금 넘어서 갔는데 대기줄이 있었다. 맨 앞에서 손님들과 대화하여 안내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셔서 당연히 직원이겠거니 했는데 본인도 손님이셨다. 동해에 사시는 현지인이라고 하셨다. 본인 뒤에 줄 선 관광객들을 "외지에서 오셨냐"고 물으시며 어디서 오셨는지 여쭤보시는 모습이 참 정겨웠다.
나는 이런 순간을 참 좋아한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껍데기를 갖고 사는가. 나는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선후배였고, 선후임이었고, 형이었다가 동생이었고, 대학생이거나 알바생이거나 했다. 이런 껍데기들이 우리의 일상을 이룬다.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껍데기들의 모음이 곧 우리의 일상이 된다.
하지만 여행은 이 껍데기들을 단번에 벗어나게 만든다. 나는 그저 '외지인'인 뿐인 것이다. 그 이상의 가면은 필요하지 않다. 놀러 온 사람, 관광객, 외지인. 이 도시의 주를 이루는 사람들과 결이 다른 사람. 약간의 부러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저 멀리 타지에서 온 사람. 그거면 된 거다. 여행으로 말미암는 일상 탈출은 "어디서 오셨어요?"라는 한 마디로부터 시작된다.
추천받은 메뉴는 물망치 맑은탕이었다. 맑은탕을 '지리'라고 부르곤 한단다.
물망치탕이 동해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라 해서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갔건만,
탕에서 되는 메뉴는 복밖에 없다 그래서 복으로 시켰다.
무와 미나리와 콩나물이 들어가서 굉장히 시원하다. 처음 한 입은 특별한 거 없는 평범한 국물 맛이라서 살짝 실망했지만, 시간이 지나 국물이 점점 우러나며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맛이 되었다. 복이 상당히 쫄깃해서 씹는 식감까지 즐거웠다.
나는 이 시점에서 애인에게 '해장낭만론'에 대해 설파하고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주가들에겐 다음날 해장할 음식을 고르는 것조차 하나의 낭만이다. 보통 이제 컵라면 등으로 가볍게 해장하거나, 기회가 되면 식당에 방문해 국물 요리로 해장하곤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낭만 넘치는 해장은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 날 여행지에 방문해 그 지역 특산 음식으로 해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전 날이 학회 선배분들을 모시고 가진 술자리였기 때문에, 조절한다고 마셨지만 생각보다 더 많이 마신 상황이었고, 해장이 꽤나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이동해 복지리탕을 마시며 숙취를 달래는 마음, 이거? 해본 사람만이 납득할 수 있는 애주가의 진정한 낭만이다.
바다로 이동했다.
얼마 전 방문한 송도의 바다보다 훨씬 물결이 거셌다.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 좋아 들숨 날숨을 바다 내음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다 끝을 찍고 돌아오는데 우측에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길이 있었다.
설마 저 위에 등대가 있겠어? 했는데 지도가 저 위에 등대가 있다고 알려 주길래
갑자기 등산했다.
생각보다 높아서 당황했다.
등대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냉큼 들어갔다.
엄청 힘들게 올라갔는데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크게 막 엄청나고 그러진 않았다.
이후 쭉 내려와서 동네 산책을 했다.
나는 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새우젓이 벽돌처럼 네모난 모양으로 왜 보도블록 위에 있는지 궁금해했다.
밟을 뻔
아 그리고 대게빵
묵호역에서 내려 부흥횟집으로 향하는 길에 대게빵 파는 곳이 있길래 궁금해서 현지인 선배분에게 연락드렸다.
근데 원래 외지인은 현지인 말을 안 듣기에 외지인인 것이다.
궁금해서 냉큼 먹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한 마리 가격이 2000원이라 사악하긴 한데, 원래 관광은 그런 재미로 돈 쓰는 거니까 괜찮다.
끝부분이 바삭해서 좋았고, 새우깡 맛 같이 느껴지는 반죽이었어서 묘하게 대게를 먹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고 숙소에 도착해 짐 풀고 낮잠 조금 잤다가 다시 나왔다.
저녁으론 냉면을 먹었다.
<냉면권가>
평양냉면 하나 함흥냉면 하나 시켜서 나눠 먹었다. 나는 을밀대가 주변인 학교에 장기간 서식하면서 평양냉면에 꽤나 길들여진 입맛이다. 평양냉면이 심심해서 별로라는 사람들의 의견 부분 수용하지만, 그래도 그 삼삼한 육수가 주는 매력이 분명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여기서의 불찰은 처음 방문한 식당의 평양냉면을 믿지 못해 평양냉면 하나 함흥냉면 하나로 나눠 시켰다는 점이다. 정말 큰 후회다. 평양냉면을 두 개 시켰어야만 했다. 나눠 시킨 선택이 아쉬웠을 정도로 맛있었다.
우선 면 자체가 굉장히 특이했는데, 혀에 닿는 순간부터 낯섦이 느껴졌다. 까슬까슬하고 건조한 것이 메밀로 만든 면인가 싶었다. 국물 자체도 평양냉면치고 간이 되어 있는 편이었는데,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면의 식감과 어우러지며 국물과 면이 하나의 음식처럼 완벽히 조합되어 있었다. 본인을 평양냉면 매니아라고 자칭하는 애인조차 굉장히 만족해하는 맛이었다.
함흥냉면도 단맛과 매운맛의 조화가 잘 잡힌 훌륭한 맛이었으나 평양냉면의 면의 질감, 그 감촉을 잊지 못하겠다. 본인이 평양냉면에 거부감이 없다면, 그리고 동해에 갈 생각이 있다면 꼭 먹어보길 권하고 싶다.
과자 몇 개 사서 영화 보고 잘 잤다.
영화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한 번 더 봤다.
나는 또 울었다.
둘째 날 아침,
https://www.youtube.com/watch?v=lVsiZwIXT5U
나는 언제나 그렇듯 여행을 오면 첫날밤을 잘 못 잔다.
분명 암막 커튼도 있었고 고층이라 크게 시끄럽지도 않았는데 밤잠을 설쳤다.
낯선 환경에서 쉽게 못 자는 체질인가보다.
점심으로 선점해 둔 식당에 가면서 언제나 그렇듯 동네 구경을 했다.
점심으로 방문한 곳은 막국수 가게다.
사실 전날 방문하려고 했지만 네이버 상에는 분명 영업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저녁에 문이 닫혀 있길래 먹지 못했다.
강원도 막국수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이렇게 또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내게 막국수는 족발에 곁들여 먹는 사이드 메뉴였는데,
강원도에서 막국수는 그 자체로 성립하는 요리라는 말을 듣고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막국수]
강원도, 경기도 동부의 향토 음식인 한국의 국수 요리. 삶은 메밀면에 양념장, 잘게 썬 김치, 채 썬 오이, 삶은 달걀 등을 얹고 동치미 국물 혹은 육수를 자작자작하게 넣어 비벼 먹는 것이 일반적이며 강원도, 그중에서도 춘천 막국수, 봉평 막국수, 강릉 삼교리 막국수, 주문진 신리막국수, 여주 막국수, 천서리 막국수가 유명하다.
[출처 ] https://namu.wiki/w/%EB%A7%89%EA%B5%AD%EC%88%98
<동원막국수>
와 정말 맛있다.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맛이다. 들기름을 위에 뿌려주신 걸로 추정되는데, 첫 젓가락부터 고소한 향이 비강을 강타한다.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김가루와 연결되면서 코와 입이 모두 즐겁다. 국물 자체도 자극적이기보다는 적당히 심심한 편인데, 그 점이 오히려 음식의 전반적인 고소함을 한층 강화시킨다. 고명이나 양념장에 별다른 기교도 없다. 그렇기에 고소함 이외에 다른 튀는 맛이 없고, 이 점이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소함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참기름 혹은 들기름은 보통 밥에 비벼 먹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나.
국물 요리에 사용되어 식감을 돋우는 방법도 정말 매력적이다.
식당 바로 앞 바다로 왔다.
월요일 아침이기도 해서 그런지 사람이 정말 없었다. 좋았다.
동해 바다를 보면 글을 쓸 수 있을지 알았지만 크게 떠오르는 영감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쓴 시 다시 덧붙여 놓는다.
혼자 슬픈 감정으로 오래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은 꽤나 비극이다.
이후 동굴까지 걸어갔다. 도보 30분 정도라고 하길래 갈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르막길의 연속이라 살짝 후회했다.
동굴에 입장하기 전 매표소 직원분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서울에 비해 동해가 날씨가 엄청 좋다고 자부심 있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며 여행을 온 기분을 또 느낄 수 있었다. 현지인과 외지인이라는 이분법이 있을 때,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에게 외지인인 거였으니까. 나의 서울과 자신의 동해를 비교하며, 자신의 동해가 가지는 이점을 내게 설명해 주는 모습이었으니까. 나는 별안간 서울이 가지는 이점을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구태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서울이 싫은 서울 사람이다.
<천곡황금박쥐동굴>
위쪽에서 아래로 자라고 있는 종유석과 땅에서 위로 자라고 있는 석순이 석주를 만들기 위해 수 만년 동안 자라서 현재 5cm 정도를 남겨두고 있는데,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서 하나의 기둥을 이루려면 앞으로 200~300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여기 동물 초입부터 헬멧을 주는 게 심상치 않더니, 머리를 엄청 박았다.
거짓말 안치고 30분 구경하면서 300번은 박은 것 같다.
키 큰 사람이 방문한다면 주의하시길. 나는 그냥 두 발로 걷는 딱따구리 그 자체였다.
원래 가려던 카페가 있었는데 문 닫아서 다른 곳으로 왔다.
분명 네이버에는 영업 중으로 되어 있었단 말이지...
이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근데 여행지의 낭만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있는 것이다.
새롭게 갔던 카페에서 다빈치 코드를 무상 대여해 주셔서 알차게 하고 놀았다.
아 이게 실화 기반 속담이었구나?
새로운 도시에 오면 꼭 버스를 타고 싶어진다.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풍경을 보면 현지인과 외지인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이 타는 버스를 타고,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를 지나, 현지인들과 같은 박자로 버스에서 하차하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 지역에 장기 거주한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누가 봐도 놀러 온 관광객인 티가 다 나겠지만 말이다.
원래 방문하려던 곳은 동해돌짜장이었다. 이전에 동해에 다녀 온 가족들이 맛있다고 극찬을 그렇게 했기 때문. 해외여행 가서 김치 먹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인 나는, 바닷가에 가서 왜 짜장면을 먹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변에서 하도 평가가 좋아서 방문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런데 참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된다고 돌짜장 집이 이날 휴무였다. 하지만 버스는 이미 탄 직후였고 다른 선택지는 없어 원래 내리려던 정류장에 내리게 되었다. 내려서 근처 식당을 찾아봤는데 평가가 괜찮은 생선구이 집이 있길래, "아 여기다" 싶은 마음으로 향했다.
아무렴, 동해에 왔으면 생선을 먹어야지.
생선집 가는 길에 마주한 학교 앞 분식집을 보며 나눈 대화
M) 저기 갈까?
H) 그래?
M) 가서 서울에서 떡볶이 먹으러 동해까지 내려왔다고 하는 거지
H) 아 여기 학교 나온 사람이 여기 분식집 극찬해서 내려온 느낌으로?
M) 그치! 그럼 서비스 주지 않을까?
H) 오~~~~~
->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 분식집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ㅋ
<동그라미해물집>
원래 예약을 하고 오는 집이라고 한다. 주문과 동시에 생선을 굽기 때문에 음식이 늦게 나오는 편이다.
원래는 기차 타는 시간인 7시에 맞춰 짜장면 집에 가려고 했던 거라, 예상보다 더 늦은 시간에 저녁을 먹게 됐는데,
음식까지 늦게 나온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인당 16,000원이다. 전복 회도 있고, 멍게도 있고, 생선구이도 7조각이 나오는데 16,000원이다. 와 진짜 믿기 어려운 가격. 서울이었으면 금액 2배는 더 불렀을 거다. 간이 자극적이지 않게 되어 있어서 생선 살의 단단한 식감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워 주셔서 더욱 좋았다. 왜인지 나이가 들수록 생선구이가 더욱 좋아지는 것 같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방문했다면 분명 술을 적셨을 테지만 빨리 먹고 기차를 타러 갔어야 했기 때문에 속도 내서 먹었다. 급하게 먹고 온 게 너무 속상해서 재방문 의사가 높아질 정도다. 서울은 생선구이를 먹기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지 않는가.
그러고 택시 타고 무사히 역에 도착했다.
마침 이날이 실내 마스크가 의무에서 권고로 바뀐 첫날이었기 때문에
마스크를 벗고 역사 안을 들어가는 짜릿함을 즐길 수 있었다.
인류가 처음 달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역사적 순간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
일을 하러 서울로 돌아가는 관광객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하듯
동해역의 기차는 '노동자'를 창문으로 몸소 표현하고 있던 것이다.
떠나가는 이의 마지막 상징성까지 보장해주는 동해역의 세심함 덕분에 잊지 못할 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 왔다. 정말 오기 싫었다. 서울은 종종 정말 쇳내가 나는 도시처럼 느껴진다. 어딜 가도 사람이 많고 속 편한 공간은 점점 작아진다. 그리하여 이따금 생각하게 된다. 작은 방 속에 누워있는 나는 얼마나 더 작은 존재인 것일까.
서울이 싫은 건, 내가 이곳에서 살아오며 좋은 일 나쁜 일을 모두 겪은 경험 때문일 것이다. 시골에서 상경하신 우리 엄마는 일찍이 말했다. "서울 사람들은 서울 좋은지 모른다." 정말 그렇다. 서울 사람들은 서울 좋은지 모르고 자꾸 서울을 벗어나려고 한다. 근데 정말 서울이 엄청나게 좋은 곳이었으면 서울을 벗어나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모든 이가 고향으로부터의 작별을 좋아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이 작은 나라의 수도로서의 도시, 서울은 정말 무엇일까? 작은 나라의 더 작은 도시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과 희망과, 그리고 동시에 절망과 좌절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과 잔뜩 밝은 얼굴로 대학로를 쏘다니는 사람이 공존하는 도시가 서울이다. 신축 한강뷰 아파트와 쪽방촌이 공존하는 도시가 서울이며, 강남 8학군과 교육 저소득층이 공존하는 도시가 서울이다. 이 안에서 살아가기는 때로 '살아가기' 이상의 '살아남기'가 된다고 느낀다. 서울의 삶은 문자 그대로 투쟁 같아지는 면모가 있다.
그리하여 서울에 도착해 숨을 쉬는 건 더욱 쇳내가 난다. 지나가는 자동차, 높아지는 마천루, 가득 찬 콘크리트, 보이지 않는 바다, 부의 상징으로 변모된 한강. 외지인이 됐다가 다시 현지인이 되는 건 정말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약한' 일이다. 즐거웠던 여행, 행복했던 여행, 목표대로 바다를 실컷 보고 온 여행을 마치며,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빠르게 달리는 KTX에서 잠을 자다 눈을 뜨면
나는 더 이상 동해의 외지인이 아니라
서울의 현지인이 된다.
이때 나는 무엇이 얼마나 바뀐 것일까?